교회 생활 그 임계점에서
교회 생활 그 임계점에서
  • 강현아
  • 승인 2017.09.22 01: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너무 낡아 삭아버린 부대에 왜 저토록 집착하는 것인지
한국교회는 청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마음이라고 있는 것일까? 선포라는 이름으로 일방주의가 여전한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 편집자 주
한국교회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배재와 혐오의 근거를 찾는 것으로 교회다움을 지키거나 회복할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이 제기된다.

주체적인 삶에 관하여

임계점이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지쳤지만, 교회를 향한 이상과 신념에 관한 한 자부심은 있었다. 교회는 인간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세속화된 교회의 그지없는 타락 속에서도 신은 자비롭다는 단 하나의 믿음. 그리고 그루터기와 같은 성도들은 곳곳에 남아 있을 것이므로 신의 은총은 지속되며 유효할 것이라는 막연한 소망.

하지만 근래 나의 이 오래되고 원대한 교회에 대한 환상이 무참히 깨어지고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한 사람의 신념에서 비롯된 일인지, 교회 구성원 다수가 동의하고 있는지,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가 같은 입장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고립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믿음의 문제로 받아들이기엔 교회의 가르침이 상식과 충돌하거나 양심에 위배되는 경우도 있었다. 요령껏 들으라는 충고를 듣기도 했지만 근본적 해결책이 아닌 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더욱 난처한 것은 한낱 평신도에 지나지 않는 무력한 개인의 망설임이 어느새 암묵적 동의라는 공모의 혐의를 의심받는 처지에 놓이게 했다는 사실이었다.

명제 중심의 설교와 죄에 대한 물음

술, 담배, 혼전관계, 동성애 등의 문제가 설교 시간마다 화두에 오르곤 한다. 이러한 쟁점들을 죄로 규정하거나 윤리적 판단을 서두르는 명제 중심의 설교에는 질문과 반론의 여지가 존재하기 어렵다.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 믿음을 의심받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신앙생활의 실천적인 지침들은 대개 무엇이 죄이고, 죄가 아닌지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죄에 대한 규정과 교리 중심의 명제적 설교는 이성적 사유보다 맹목적인 동의를 요구할 때가 많다. 그러나 교리를 계시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입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말대로 교리는 성경 이야기들의 결론이 아니며, 핵심도 아니다. 단지 이해를 돕는 도구일 뿐이다. 도그마에 가까운 신앙의 규범들이 작동하는 기제는 단순하지만, 양날의 검과 같은 파급력을 지녔기 때문에 설교자의 자기성찰이 무엇보다 필요하게 된다. 설교는 성도 개인에게 강한 주술적 반응과 헌신을 요구하지만, 교회 내에서만 유통되는 통념에 관한 질문마저 봉쇄하여 독점적 권위를 획득했다. 전통은 교회의 위계와 질서를 특정한 방식으로 영토화, 코드화함으로써 억압을 고착화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 받는 이유

한국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된 이유를 개인 영성의 해이와 경건 생활의 부족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설교를 어렵지 않게 접한다. 주일성수와 헌금, 기도, 말씀, QT 등의 개인의 경건 생활이 무너진 까닭에 성도는 이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자조 섞인 설교.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관해 교회가 어떠한 요구를 할 때, 일반적으로 사회는 인간의 도덕과 양심에 근거한 호소를 귀 기울여 듣지만, 이제 더이상 교회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게 된 사태에 대한 탄식은, 결국 동성애 합법화 반대와 같은 시급한 시대적 과업으로 귀결된다. 성도 개인의 경건과 내면의 영성은 한국 교회의 유산인 신앙의 전통들을 계승하는 한 방법이며, 당면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응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윤리와 인권 감수성,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나 정치적 식견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유를 개인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태도는 균형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한국 교회의 병폐들은 개인 구원과 내면의 영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생긴 변괴의 결과가 아닌지, 동시에 자문해 봐야 한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기득권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사회적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한국 사회의 공적인 이슈들에 무관심할 때가 많았고, 현실 정치에 대해서도 비판적 자세를 취하지 못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회의 약자 편에 서기보다 정치 권력에 편승해 특권적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배금주의와 집단이기주의와 같은 종교적 위선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사회에서 외면 받는 이유에는 더욱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원인이 얽히고설켜 있는 까닭이다. 날 선 비판의 원인을 무작정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기보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회 공동체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주체적인 신앙에 관하여

나는 누구보다 교회의 합치를 바라지만, 균질화되고 정형화된 신앙의 모습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리라 생각지 않는다.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차이를 무시한 채, 모두 비슷하게 묶어 버리려는 동일성의 철학이야말로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루터로부터 배운 것은 주체적인 삶만이 구원한다는 혁명성이었지, 계몽주의가 아니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가 말한 신 앞에서의 단독성(특이성 singularity)과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이라는 필연적 실존의 과정 역시 주체성의 문제이지, 개인 경건에 관한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실존적 상황을 매 순간 돌파할 수 있는 신앙의 결의는 교리와 전통이라는 기존의 권위에 무조건 의존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 스스로의 윤리적 당위와 헌신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그러니 세상에 신과 오직 그 자신만이 존재하듯 신을 경배(예배)하기보다는 신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더 옳다. 그것이 신을 경배하는 바른 태도이며, 의례의 목적 아닌가. 사랑하라는 신의 유일한 '정언명령'은 말(언표행위)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의지, 실천 행위로서만 가능해지는 격률인 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이든, 타인이나 이 세계를 향한 사랑이든, 모든 사랑은 윤리적 태도인 동시에 실천 강령일 수밖에 없다.

루터로부터 촉발되어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정점을 찍은 이 '주체적 삶'이란 신앙 판단의 준거는, 이제 사유가 가능한 신앙적 주체와 더불어 타자적 존재였던 다른 주체들로 계승될 뿐이다. 전통이라는 낡은 권위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뿐더러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갈 것이다. 너무 낡아 삭아버린 부대에 왜 저토록 집착하는 것인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현실의 교회와 그 사랑의 나라, 번뇌와 믿음 사이의 간극이 크게 느껴져 친구들 앞에서 울던 날, 너무 쓸쓸한 나머지 혼자 속으로 기도문처럼 몇 번이고 읊조렸던, 독일 루터교 신학자이며 교육가였던 멜데니우스(Rupertus Meldenius, 1582-1651)의 저 유명한 구호.

In Necessariis, unitas;
in non necessariis, libertas;
in utrisque, caritas!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 사랑을!

 

글쓴이 강현아는, 프리랜서 작가이며 고등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이로, 아직은 전통적인 한국교회 속에서, 교회다움을 생각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