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e Luder to L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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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영민
  • 승인 2017.09.22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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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훈, 루터의 재발견 질문, 저항, 소통, 새로운 공동체 최주훈 지음, 복있는사람, 2017년
최주훈, 루터의 재발견 질문, 저항, 소통, 새로운 공동체 최주훈 지음, 복있는사람,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2017년이다. 타락하고 부패한 로마교로부터 루터라는 한 사람에 의해 희망의 씨앗이 심겨졌다. 역사적인 선상으로 볼 때 루터가 아니더라도 종교적으로 황폐한 교회 속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일어났어야만 했던 일이다. 만약 누군가 죽어있는 말씀을 살려내지 못하고 병들었던 교회를 향해 소리치지 않았다면 죄의식은 소멸되었을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소멸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이런 역사와 교회의 고통 속에서 루터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철저한 고행과 금욕을 해도 그의 영혼은 더 시들해져간다.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견학을 가니 물질과 권력에 물든 교회와 교황과 사제를 보며 침체를 겪는다. 신앙과 구원과 교회에 대한 혼란을 겪는 중 신약성경을 연구하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다. 캄캄한 어둠 가운데 생명의 빛줄기가 그를 향해 쏟아진다.

그의 본 성은 Luder이고 그 뜻은 동물을 유인해서 죽이는 ‘유혹하는 사냥꾼’이다. 그러나 복음의 정수와 하나님의 구원을 깨달은 후 그는 Luther로 개명한다. 그 이유는 ‘자유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ελευθερος’에서 앞뒤에 ‘ε,ος’만 빼고 ‘λευθερ’만을 취하여 그의 존재와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전자인데 그는 후자로 살아가며 그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우리는 중세시대가 종교적으로 화려한 열심은 있지만 얼마나 신앙적으로 부패했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나 하나님의 교회가 새 생명을 얻게 되는 세기적 사건이 일어난다. 이 책은 종교개혁 당시에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자세히 소개하고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루터교단의 목사로서 그 역사적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의 고발 끝나지 않고 오늘날로 연결하여 우리 교회가 어떻게 변해야될지를 제안한다. 책은 ‘질문, 저항, 소통, 새로운 공동체’라는 4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총 9장으로 구성되었다. 필자가 볼 때 저자는 루터의 신학과 사상을 잘 계승한 목사이고 학문적 지식과 목회적 사랑으로 교회가 새로워지길 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타락한 교회에서 교회가 개혁되어 나왔는데 이 시대는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경: change Luder to Luther

그래서 필자는 본 글을 통해 책에서 강조되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루터의 사상을 세 가지로 써 보고자한다. 우선 성경의 회복이다. 당시 교회의 언어는 라틴어였고 모든 예배는 이것으로 드려졌다. 이 성경은 교황과 사제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통해 신비한 존재가 되고 이것으로 신자들을 유혹하는 도구로 이용한다. 성경이 루터에게 놀라운 자유를 주었는데 언어로 막혀진 성경은 성도를 사냥하는 것이 되었다.

실제 로마교는 마음과 눈과 귀가 닫힌 성도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고 면죄부를 팔며 종교장사를 한다. 언어로 차단된 교회는 높은 뜻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부패한 중간자들 때문에 폐쇄적인 공동체가 된다. 이들은 하늘을 향해 커튼을 치고 자신만의 성벽을 높이 쌓고 성도들의 혈을 뽑아낸다. 성경의 사유화는 교회를 장사판으로 만들었고 지도자를 변질시켰고 성도들을 무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루터는 독일과 독일교회를 위해 성경을 번역한다. 그는 죽기까지 개정을 거듭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민중 속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리하여 성도는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거룩과 자유를 누린다. 생명의 말씀이 독점되지 않고 대중에게 보편화된 것은 개혁 중에 개혁이다. 이것은 불통의 시대를 소통의 시대로 바꾸었고 높아진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혁명이었다. 자유를 주는 복음을 읽을 수 있고 소유할 수 있게 된 가치는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보편과 일상: change Luder to Luther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칭의로 국한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정치와 교육과 복지와 사회제도와 문화를 아우르는 것이다. 즉 종교개혁은 교회의 소유가 아니라 교회로부터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개혁을 자신들의 ‘바름’을 가지고 상대의 ‘다름’을 적화시키는 오류에서 벗어나, 예수의 정신과 사상이 세상속에 흘러가도록 방향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와 개혁의 정신이 잘 녹아져 있는 유럽의 선진국을 보면 이 위대한 사상이 사회를 회복하고 구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인권과 생명존중과 약자를 향한 배려와 나눔의 실천이 소중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에 비해 오늘날 우리는 ‘개혁’이라는 가치를 나와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정죄하고 배제하고 혐오하며 사냥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개혁이 주는 자유의 정신을 상실한 압박이 되고 말았다.

또한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이분법적인 신앙으로 교회와 예배와 성인의 유물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가 거룩한 장소이고 우리의 소소한 일상이 예배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쫓기는 듯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루가 주는 미소와 행복을 발견하도록 도와준 개혁이고 성도는 제사장이라는 고귀한 직분으로 이 땅을 섬기는 사명자라는 것을 알려준다.

 

목사: change Luder to Luther

중세 시대에 교회의 타락과 몰락은 성경을 읽지 못하는 성도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독점화하고 권력의 절정에 있었던 교황과 사제들 때문에 발생했다. 이들은 교회를 수치스러운 세상의 영광으로 높은 담을 쌓아 회칠한 무덤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미래를 여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교회를 통해 미래를 닫는 주역이 된다. 유럽의 전염병 때문에 무자격자들이 선발 되었고 성직매매로 사제가 되고 족벌주의로 성직을 나눠먹었다.

그리고 로마교는 사제를 선발 때도 교황이 안수할 때 사도성이 계승되고 인간이 파할 수 없는 신적 능력이 주입된다고 보았다. 또한 루터의 개혁 이후에도 이 개혁의 정신이 독일 전역에 스며들었던 것이 아니다. 이 복음의 자유를 오용하여 게으름과 나태함이 빠진 목사들이 있었고 이들은 교회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허물고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그들을 향해 차라리 개집이나 지키라고 한다. 생명 걸고 무너진 것을 세우고 굽은 것을 곧게 펴고 험한 것을 평탄케 하였더니 그것을 유지해야 될 목사들이 망치고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사냥하는 목사가 아니라 자유를 주는 목사를 세우기 위해 공동체로부터 직무를 부여한다. 루터와 함께 운동을 했던 ‘요하네스 부게하겐’은 비텐베르크 시 교회의 개신교 최초로 청빙목사가 되는데 그는 로마교의 안수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대학과 시의회의 통과를 통해 직분을 수여받는다. 이것은 목사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보여주는데 그는 신앙과 지성과 사회적 인격을 갖추어 복음의 자유에 합당한 사람이여야 한다.

 

결론

루터는 전통과 구습을 향해 질문하고 부패한 종교와 권위를 향해 저항하였으며 막혀진 하나님과 인간을 향해 소통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였다. 그는 권력화되고 사유화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국을 만드는 썩어가는 교회를 고치길 원했다. 자격 없고 무능하고 자기 위장만 생각하는 지도자들을 성직자로 인정할 수 없었고 끌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성직자의 개혁도 외쳤지만 성도 한 사람이 진리를 분별하고 정의와 공의로 가득해지길 원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거짓 교회를 거부하고 바른 교회를 세워갈 수 있으며 개혁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 당시 성도에게 주어진 만인제사장과 직업소명론은 시대와 교회를 개혁하기에 충분했다. 교회는 성도를 사냥하려고만 했는데 루터는 복음과 믿음으로 자유를 주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떤가? 그야말로 권위적이고 폐쇄적이며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일이 발생하는 곳이 되었다. 하늘과의 소통과 세대 간의 소통, 세상과의 소통이 다 불통이 되었다. 교회는 중세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많은 범죄를 하고 성도를 압박하는 곳이 되지 않았나?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을 추구해야하는데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우스운 꼴이 되었다. 더 이상의 변화는 불가능한 것인가? 이 루터의 재발견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는 재미를 넘어 우리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교회를 그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쓴이 방영민 목사는, 열린교회 부목사/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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