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ident Alien
Resident Alien
  • 김영웅
  • 승인 2017.09.23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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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하우어워스 , 윌리엄 윌리몬 |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 복있는사람 | 2008년
스탠리 하우어워스, 윌리엄 윌리몬 |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이 땅에서 그분의 교회로 살아가는 길 | 복있는사람 | 2008년

A. 나는 Resident Alien이다. 미국이라는 땅에 합법적으로 거주 (resident)하고는 있지만, 나의 시민권 (citizenship)은 미국에 속하지 않는다. 현재 나는 외국인 (alien) 신분이다.

B. 그리스도인은 Resident Alien이다. 세상이라는 곳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고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현재 모든 그리스도인은 외국인과도 같은 나그네 된 백성이다.

C. 나는 미국에 살지만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나의 충성은 미국을 향하지 않는다. 미국 역시 시민이 아닌 나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국에 영향을 받지만 주요 관심은 한국을 향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방식은 내가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D.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 시민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인의 충성은 세상을 향하지 않는다. 세상 역시 시민이 아닌 그리스도인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세상에 영향을 받지만 주요 관심은 하나님나라를 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방식은 그리스도인이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에 비교한 육적인 ‘신분’과 영적인 ‘신분’의 차이 (A와 B)를 거부감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 비교한 ‘삶’의 차이 (C와 D)에 대해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짐작하건대 아마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를 고려하게 되고, 찔림을 받지 않을까 싶다. 머리로 이해는 되고, 또 그렇게 배웠고 심지어 가르치기까지 했었으나, 실제 자신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고 스스로가 판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문제다. 언젠가부터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삶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사적인 영역으로 감춰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암묵적인 관행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습성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복음이 아닌 거짓과 위선의 공공성을 낳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경솔하게도 ‘이신칭의’라는 말을 왜곡했고, 예수를 믿고 바뀐 신분에 의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자발적 순종’을 거부하는 데 엉뚱하게도 분별력을 동원했으며, 구원 받고자 하는 마음만은 그대로 남긴 채,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켰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신분'에 있을지 '삶'에 있을지 묻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우리는 은연 중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삶도 결코 따로 해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죄책감이 진하게 묻은 거짓된 정체성을 만들고 그 뒤로 비겁하게 숨어버렸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하나님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한낱 공과공부 책자에나 소개되는, ‘뻔한’ 지식으로 추락해버렸다.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겠지만, 평신도보다는 아무래도 이를 지속적으로 배우고 가르쳐야 할 선생들 (목회자와 신학자)에게 어쩌면 더 무거운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싶다.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먼저 알고 먼저 맛본 후 더 깊이 연구하거나 교회를 통하여 널리 가르치는 일만이라도 변질되지 않고 본래의 의미에 충실했다면, 기어이 평범성까지 획득해버린 오늘날의 영적인 재앙을 초래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선생들은, 교회뿐 아니라 모든 시공간에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 대신 예수에게서 뽑아낸 추상화된 관념들만을 가르치며 기독교를 지적인 문제로 변질시켰다 (계몽주의). 그들은, 좌로는 자유주의, 우로는 보수주의로 나뉘어 서로 적대시하기도 하고 때론 공존의 방향도 모색해 왔지만, 모두 사회윤리라는 면에서는 근본적으로 세상에 타협하고 심지어 부역하는 과업을 달성해내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콘스탄틴주의). 또한 그들은 복음을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시켜 개인구원론이라는 우리 속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가뒀으며 (개인주의), 제국의 단맛에 길들여지지 말라고 설파하면서도 스스로는 그 단맛의 근원까지 독차지해버렸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선생들이 그렇진 않다는 점이다. 이 책의 공저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77)와 윌리엄 윌리몬(William Henry Willimon, 71)은 우리들의 선생 (각각 신학자와 목회자)이면서도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현대 교회와 목회에 대해 예언자적 메시지를 과감히 선포한다.

그들이 파악하고 책 전반에 걸쳐 거듭 강조하는 교회의 문제점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콘스탄틴주의, 계몽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어버린 후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신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정치와 사회체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교회의 의미를 축소하는 대신 국가와 사회에 대한 참여와 봉사를 늘릴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양극화와는 별개로 보수주의나 자유주의 모두 제국의 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나아가 그 체제를 지지하거나 보호하는 역할까지 교회가 해왔다고 이 책에서 두 저자는 냉철하게 진단하고 있다. 좌우할 것 없이 전반적인 기독교 자체가 국가에게 귀속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콘스탄틴주의와 더불어 기독교는 합리성을 필두로 한 영적이거나 지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교로 타락한 모습까지 갖췄으며, 국가와 사회가 어떻든 개인만 구원 받는다면 기독교는 본연의 임무를 다한 것처럼 여기게 되는 형태도 띠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두 저자의 진단은 일차적으로 미국의 기독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책을 죽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한국의 기독교 역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박근혜 전 정부를 앞장서서 옹호하고 부역하고 신봉했던 기독교인들, 번영신학으로 점철된 여러 대형교회 세습을 합리화시키는 기독교인들,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여 목사의 위치를 준하나님급으로 격상시켜놓은 기독교인들, 그러한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이 왕인 것처럼 교인들에게 윤리적 범죄까지 저지른 일부 목사들, 이렇게 드러난 모든 현상을 되짚어볼 때 한국의 기독교도 사탄의 체제에 뿌리깊이 물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책은 위에 언급한 부인할 수 없는 문제점에 대해서 부인할 수 없는 해결책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교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며, 교회 공동체가 본래의 정체성을 찾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원서 제목은 ‘Resident Alien’이고, 한글 번역본 제목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다), 이 책은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를 주요 구절로 삼는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신분과 정체성을 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두 저자는 그리스도인을 나그네 된 거류민 (Resident Alien)이라고 인식할 뿐 아니라, 교회를 ‘식민지’라고 일컬으며, 식민지로 살아가는 일이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 개인의 정체성도 중요하지만, 이 책은 그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 교회의 정체성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두 저자는 산상설교 자체도 개인이나 세상을 향해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식민지에게 주신 말씀이라며, 식민지 시민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의 타협적인 사고를 거부하고 세상에 대항하는 문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미국 신학자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1927-1997)가 말한 ‘고백 교회’를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교회는 개인의 정신을 바꾸거나 사회를 변혁하는 데 주된 정치적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으로 하여금 만물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결단케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십자가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가 없이는 세상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고, 이 세상 속에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음도 알 수 없으며, 세상이 파괴되고 타락한 상태에 있고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에 관한 언어를 몸으로 살아내어 가시적인 교회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변혁하거나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것에 힘쓰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의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유일한 공동체로서,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나라가 세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믿고, 제자도에 따르는 희생을 분명히 알고 기꺼이 그 값을 치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요청은 안전함과 풍요로움을 제공했던 세상 시민권을 포기하는 대신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나그네 된 백성이 되어 교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식민지 삶을 공동체를 이루며 살라는 초청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의 지배체제에 순응하며 그곳의 가치체계에 의해 살아가고 있거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관념적으로만 해석하여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거나 좀 더 합리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거나, 복음의 공공성을 차치하고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복음으로 예수의 능력을 한정시켜 버리며 살아가고 있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두 저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보자. 은연 중 세상과 타협하며 이중적으로 살아왔던 시간을 반성하고, 그 동안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렸던 개인과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으며, 신분과 삶이 일치되는 종말론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김영웅은, 하나님나라에 뿌리를 두고, 문학/철학/신학 분야에서 읽고/쓰고/묵상하고/나누고/배우는 것을 좋아하며, 분자생물학/마우스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가난한 선비/과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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