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정의를 향한 실천이어야 한다"
"신학은 정의를 향한 실천이어야 한다"
  • 마이클 오 기자
  • 승인 2017.10.15 0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조명되는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신학

[미주뉴스앤조이(LA)=마이클 오 기자] 이기심과 탐욕을 연료로 하는 폭력은 이 시대를 정의하는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다. 어느 시대든 폭력이 존재해 왔지만, 오늘날처럼 삶의 구석 구석에 자리잡은 적은 없다. 전쟁과 테러, 살인과 폭행 등 지구 곳곳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들이 뉴스를 채우고 있다. 영화와 광고 등 미디어를 통하여 접하게 되는 대부분의 이야기와 이미지에도 폭력은 빠질수 없는 구성요소이다. 그야말로 월터 윙크의 말처럼 사회 전체가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다.

Walter P. Reuther Library

이러한 만연한 폭력의 신화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폭력의 신화를 향한 저항으로써 신학의 가능성은 없을까? 이러한 질문 앞에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신학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아이위트니스 뉴스 (Eye Witness News)는 그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그는 폭력의 잔인함을 누구보다도 깊게 깨닫고, 평생 그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와 평화의 길을 걸어갔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그의 평생에 걸친 수고와 업적 뒤에는 언제나 정의와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학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성공회 주교로써 인종차별 정책에 대항하여 반대운동을 펼쳤다. 흑백연합정부가 들어선 1994년부터는 진실과 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통하여, 분노와 복수를 통한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치유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전생애를 바쳤다. 그의 헌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노벨 평화상이 주어지기도 했다. 

 

투투의 영성

투투는 무엇보다도 깊은 기도 가운데 있는 영적 지도자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깊은 영성은 협소한 종교의 담에 갖힌 경건함 보다는, 오히려 정반대의 것을 의미한다. 그의 영성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정의의 행동과 자유를 향한 투쟁 가운데 깨어난 것이었다. 그의 용기는 정치적 폭압과 그의 교회내에서 조차 일어나고 있는 학대에 맞섬으로, 압도적인 국가의 폭력을 향해 행진하는 발걸음으로 얻은 것이다.

 

행동하는 신학과 그 뿌리

그의 사회적 행동은 언제나 개인적인 성찬의식을 통해 시작되었다. 매일의 성찬의식을 통해 침묵 가운데 침잠하여 하나님을 음성을 듣고, 그가 해야할 말과 행동을 분별하였다. 이러한 패턴은 그의 어린 시절 스승들로부터 배운것으로, 인종 차별정책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을 가했던 트레볼 허들스턴도 이들중 한명이다. 

투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학과 교리를 이야기할때 항상 인용되는 인물중에 하나이다. 특별히 기독교의 성육신적 특성에 대한 그의 통찰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을 바탕으로 그는 세상 가운데 교회가 성육신적으로 화해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새겨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신성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죄악도 사람을 용서와 구원으로부터 떨어뜨리지 못한다. 따라서 용서와 타인의 포용은 인간과 사회를 위해 근본적인 것이 된다. 

변화산상 이야기는 그가 가장 아끼는 신학 주제이다. 그는 이 이야기가 피할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시기에, 절망에 맞설수 있는 소망과 용기의 상징으로 다가온다고 이야기한다. 악한 권력에게 대항하고, 억눌린자들에게는 희망을 전하는 그의 말속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음성이 함께 울리고 있다. 다시말해 그의 외침은 단순히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져온 하나님의 음성의 연장이며, 선지자들의 재현인것이다.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걸었던 절망적인 여정가운데에서도, 그는 항상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깊이 이끌려져왔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투투는 그의 격렬한 삶의 현장 가운데에서도 항상 하나님과의 소통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이야 말로 그의 삶을 진정으로 뜨겁게 하는 연료가 된 것이다.  

 

신학과 현실

학문적 체계로써 신학은 중요하다. 학문으로서 신학이 기여하는 역할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학문은 사회적, 역사적 좌표를 가지고,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학문이든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실용주의적인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신학이 위치해 있는 사회와 역사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의 장이라는 신앙적 선언이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전제에 관련된 것이다. 결국 신학도 하나님의 현실 가운데 있으며, 그 가운데 의미와 이야기를 생산해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의 학문적 체계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책임을 진 존재라는 것이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삶과 신학은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의 삶은 그의 신학적 실천이였으며, 그의 신학은 그의 삶을 가능하게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연료였던 것이다. 그러한 신학은 피상적 논리체계로써의 학문이 아니라, 삶 가운데 경험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의 결과이자 반응으로써 신학을 의미한다. 

오늘날은 수많은 가치가 혼재하고, 기준이 사라져버린 시대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세대에 폭력과 악은 경계를 넘나들며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피상적인 사상과 신학은 이러한 시기에 아무런 능력이 없다. 오직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그 현실위에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의 나침반을 따라 살아가는 신학과 신앙이야 말로 유일한 출구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데스몬드 주교의 삶과 신학이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