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으신 하나님’(1) - “악은 참 쉽다”(Evil Is So Easy)
‘말 없으신 하나님’(1) - “악은 참 쉽다”(Evil Is So Easy)
  • 김영봉 목사
  • 승인 2017.10.1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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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슈사쿠 소설 [침묵]과 마틴 스콜세지 영화 [싸일런스(Silence)]로 돌아보는 믿음 여행
김영봉 목사가 시무하는 와싱톤사귐의교회는 오는 11월 11일(토)에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의 저자인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 김승철 교수를 초청해 엔도 슈사쿠의 책 <침묵>에 관한 강연을 갖는다. 이에 맞춰 김영봉 목사는 10월 15일부터 연속설교를 통해 소설 <침묵>과 마틴 스콜세지 영화 <싸일런스(Silence)>와 함께 믿음을 돌아보는 여정을 마련했다. 본문은 그 첫 설교다. - 편집자 주 -

 


로마서 6:13-23

1.

1923년에 태어나 1996년에 세상을 떠난 작가 엔도 슈사쿠는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은 그는 평생토록 종교적인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아 글을 썼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침묵> 외에도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사해 부근에서>, <깊은 강> 등의 작품을 통해 그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씨름 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침묵>이 유명해진 이유는 문학적인 면에서의 탁월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제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인간이 고난의 현장에서 자주 겪게 되는 하나님의 부재 혹은 하나님의 침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문제로 인해서든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서든 적어도 몇 번은 이 문제에 심각하게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국경을 초월하여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었습니다. 특히 신학생들에게는 토스토엡스키나 엘리 비젤 같은 문학가들의 작품과 함께 필독서로 읽혀지는 책입니다.

저도 신학대학원에 들어가서 이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에도 나름 진지하게 읽고 또한 심각하게 이 주제를 붙들고 고민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며 생각하니 ‘그 때 무엇을 알았을까?’ 싶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인생의 고난을 별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의 개인적인 아픔과 사회적인 고난을 직접 그리고 간접으로 경험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이 나이에 다시 읽으니 전과 다른 무게와 깊이로 다가왔습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1988년에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언젠가는 꼭 영화로 만들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하지요. 영화에 관심 있는 분들은 마틴 스콜세지라는 이름을 신뢰합니다. 그는 영화로 말하는 사상가입니다. 또한 그는 자주 신앙적인 주제를 영화로 다룹니다. 그러니 그가 이 소설에 관심을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선듯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하지요. 서양인인 자신이 동양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영상으로 만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주제 자체가 너무나 무겁고 깊습니다. 그래서 숙제로 마음에 두고만 있었는데, 30년이 다 차기 전에 결국 그 소원을 풀은 것입니다. 스콜세지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적 여정의 한 과정으로서 영화 Silence를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영화는 상업적인 면에서 실패했습니다. 현대인들은 현실 세상의 일들을 잠시라도 잊고 위로와 쉼과 즐거움을 얻으려고 영화관에 옵니다. 어렵고도 불편한 주제를 붙들고 씨름하려고 극장을 찾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고통스럽습니다. 영상미가 뛰어나지만 영화 전체에 극단적인 모습의 악과 고통이 가득합니다.

스콜세지 감독은 상업적인 실패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또한 각오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 점이 스콜세지 감독에게 더 끌리게 만듭니다.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가 영적 탐구의 과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기에 또 다른 이들의 영적 탐구의 도구로 귀하게 사용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은 상업적인 성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이 소설과 영화를 가지고 연속 설교를 계획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 소설과 영화를 도구로 삼아 우리의 신앙의 핵심에 속하는 몇 가지의 문제들을 하나씩 다루어 보려 합니다. 제가 의도하는 것은 문학평론도 아니고 영화평은 더욱 아닙니다. 이 소설과 영화가 날카롭게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영적 여정에 뜻밖의 은총이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2.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영화를 통해 눈으로 느끼면서 저에게 가장 먼저,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질문이 있습니다.

인간은 왜 이리도 악한가? (How are we humans so evil?)

엔도는 이 소설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심각하게 제기합니다. 그 문제를 극한 상황까지 밀어부쳐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스콜세지 감독 역시 그것을 영상에 잘 담아 놓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인간의 악의 문제입니다.

이 소설의 역사적 배경은 1637년의 일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때는 1614년에 에도막부가 기독교 선교 금교령을 내린 이후로 기독교인들에 대한 지독한 박해가 지속되고 있던 시기입니다. 당시에 일본의 기독교인 수가 37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방 영주들에게 수탈 당하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던 하층민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이 복음으로 들렸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존재들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층민들 사이에 기독교 복음이 급속하게 번져 나갔습니다. 새로이 권력을 잡은 에도막부는 이 사태를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선교 금지령을 내렸고 선교사들에게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자주 보듯, 신앙에 대한 박해는 더 강력한 확산을 불러 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터툴리안 주교는 “순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다”(The blood of martyrdom, the seeds of the Christians)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러자 권력자들은 더 지독하고 잔인한 박해 방법을 고안해 냅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고문 방법을 창안했습니다. 소설과 영화에 그 장면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유황물 고문이 그 예입니다. 스콜세지는 지금은 관광 도시로 유명한 운젠에서 선교사들과 신도들에 대해 가해졌던 지독한 고문을 그리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합니다. 바닥에 작은 구멍을 낸 국자로 그 뜨거운 온천물을 떠서 상처 부위에 혹은 머리에 한 방울씩 떨어뜨립니다. 그것도 부족하면 열탕에 빠뜨리는 고문을 가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가 바닷가 십자가 처형 장면입니다. 로마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처형 방법입니다. 바닷가에 십자가를 세우고 끝내 배교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을 매달아 두어 파도에 시달려 죽게 만듭니다. 그렇게 죽고 나면 뼈 한 조각도 남지 않도록 화장을 합니다. 온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렇게 합니다. 공포감을 심어 주어 기독교를 신봉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중에도 최악은 양쪽 귀 뒤편에 작은 구멍을 내고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 두는 고문입니다. 온 몸을 꽁꽁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상태에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습니다. 머리는 오물을 넣은 고동이 속에 넣습니다. 그러면 양쪽 귀 뒤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피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립니다. 매달린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밤새도록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렇게 절규하다가 정신을 잃으면 꺼내어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에 ‘후미에’라 불리는 예수상을 밟으라고 회유합니다. 발만 한 번 올려 놓으면 그 지옥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칼부림 한 번으로 죽는 것이라면 순교가 오히려 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거꾸로 매달려 한 방울씩 흘러내리는 피를 통해 서서히 죽어 가는 고통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막 한 복판에 인질들을 무릎 꿇려 놓고 목을 베는 ISIS의 야만성에 치를 떱니다만, 에도막부의 야만성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지독하고 야만적이고 잔인한 박해 정책을 통해 에도막부는 37만 명이나 되던 기독교인들을 모두 배교자로 만들거나 처형했습니다. 발각되지 않은 사람들은 ‘가꾸레 기리시단’ 즉 지하 교인이 됩니다.

오늘날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가 되지 않습니다. 천주교로 따지면 기독교 선교 역사가 5백년입니다. 또한 일본 땅에 뿌려진 순교의 피는 그 어느 땅에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 인구가 1%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역시 찾아보기 어려운 예입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에도막부의 지독한 박해가 그 원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철저하고도 오랜 박해로 인해 일본인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깊이 트라우마가 형성되어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3.

이 작품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업습니다. 인간은 때로 왜 이렇게 악해질까?

물론, 인간이 늘 악한 것만은 아닙니다. 악한 인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선한 사람이 더 많지요. 이 작품 안에도 순박하고 순수한 영혼들이 많이 나옵니다. 바닷가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려 순교 당하는 이치소우와 모키치는 선한 본성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의 악이 더욱 몸서리치게 느껴집니다.

이렇듯, 인간이 행하는 악은 극심한데 그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평범해 보이고, 그 악으로 인해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희생은 너무도 덧없습니다. 그렇기에 악이 더 공포스럽게 보입니다.

등장인물 중에 악의 화신은 이노우에 사마입니다. 그는 치쿠오 지방의 총독이며 에도막부의 기독교 박해를 책임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때 복음을 믿고 세례 받았던 사람으로서 이제는 박해자의 앞잡이가 된 것입니다. 그는 금교령과 추방령을 어기고 숨어서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들을 배교시키는 특별한 고문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선교사들에 대한 처형은 믿는 사람들에게 순교의 열정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선교사들을 배교시킴으로써 신도들을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존경하는 스승 페레이라가 배교했다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로드리고 신부와 가르페 신부가 포르투칼에서 마카오를 거쳐 일본으로 잠입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들은 한 동안 숨어서 ‘가꾸레 기리시단’ 즉 지하 교인들을 찾아 돌보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체포당합니다. 가르페는 죽음을 택했고, 로드리고는 살아남았지만 끝내 배교합니다.

처음에 로드리고는 회유와 고문에도 불구하고 배교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신문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합니다. 이노우에를 불러 달라고 말입니다. 그 사악한 박해자와 맞서 보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이노우에를 여러 번 만났습니다. 다만 그가 그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로드리고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맥없이 웃으며 그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문지르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자신의 상상을 뒤엎은 상대를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 발리나뇨 신부가 악마로 부르고 선교사들을 계속해서 배교하도록 한 이노우에를 그는 오늘까지 창백하고 음험한 얼굴을 지닌 남자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눈앞에는 사물에 대한 이해심이 넓을 것 같은 온화한 인물이 앉아 있다. (172-73쪽)

 

사실,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 이노우에가 누구인지 짐작하지 못합니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악해 보입니다. 그에 반해 이노우에는 훨씬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포르투갈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악의 화신이었던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유대인 사상가가 나치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에 아이히만의 악명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히만이 흉악한 악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줄로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정에서 본 아이히만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한나 아렌트는 “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말을 유행시켰습니다.

악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부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데, 그 악이 엄청난 희생과 고난을 만들어 내는 모순과 역설을 표현한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가 한나 아렌트의 글을 읽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한나 아렌트가 말하려 했던 것을 엔도는 이야기로 그려 놓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라스베가스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으로 충격 속에 빠져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59명이 죽고 5백명도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뉴스 미디어에서는 희생자의 수치를 가지고 현대 미국 역사에서 최악의 총기 사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사실이 있습니다. 범인 스테펜 패덕(Stephen Paddock)이 왜 그런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아마도 끝내 풀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 동기를 찾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나마 위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동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총기와 탄약을 모으고, 그토록 오랫동안 범행 장소를 물색하고, 그토록 치밀하게 범죄를 계획했고, 상상할 수 없는 악을 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한 순간에 산산조각 냈는데, 그럴만한 뾰족한 동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도박을 즐기는 것처럼 혹은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것처럼, 그냥 재미로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이 작품 속에도 악을 하나의 기술로 무심하게 혹은 재미로 행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영화중에 제가 가장 참기 힘들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영상으로 보여 드리고 싶은데 제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도 구역질을 느낄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중간 즈음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간수들이 한 낮에 신도들을 감옥에서 끌어내어 후미에를 놓고 밟으라고 강요합니다. 하지만 네 사람 모두 거부합니다. 간수들은 한 사람은 그대로 두고 다른 세 사람은 감옥으로 돌려보냅니다. 간수들은 태도를 바꾸어 그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마치 그냥 풀어 주기라도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긴장을 풀고 있는 사이 한 사무라이가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듯이 다가 와서는 한 칼에 그 사람의 목을 벱니다. 사무라이는 무표정하게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사라지고 간수들은. 머리 잘린 사람의 두 다리를 끌어다가 신도들이 파 놓은 구덩이에 집어 던집니다. 목에서 흐른 피가 작열하는 태양 빛에 선명하게 보입니다. 너무도 악한 일을 너무도 쉽게 행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이 돌아갑니다. 태양도 그 빛을 잃지 않습니다.

 

4.

이 작품에 가득 차 있는 극대치의 악의 모습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모습의 악의 실체를 보면서 우리가 절실하게 깨닫는 진실이 있습니다. “악은 참 쉽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 “악은 참 쉽다!”는 말은 우리 모두에게 악의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소문으로만 듣던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고 놀란 이유도 여기에 있고, 로드리고 신부가 이노우에를 앞에 두고도 그 사람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라스베가스 총기 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아주 평범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진술입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악의 모습과 그 사람의 평소 삶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악은 특별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노우에, 아이히만 혹은 스테펜 패덕처럼 악의 화신이라고 불릴만한 사람도 평상시에는 그리고 겉으로는 저와 여러분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에게도 그런 끔찍한 악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때로 그 악의 가능성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이번 라스베가스 총격 사건이 일어나자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 사건을 “an act of pure evil”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한 터럭도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철두철미한 악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에 대해 어떤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이 오랜만에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고 칭찬했습니다만, 어떤 심리학자는 이 표현이 악에 관한 진실을 호도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렇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럴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이러한 악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진 존재로서 자유 의지를 부여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 그리고 선을 택할 수도 있고 악을 택할 수도 있는 자유 말입니다. 인간이 인간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 자유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 로봇 AI가 보편화되면 인류는 비로소 자유 의지가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첫 아담은 그 자유를 오용합니다. 제대로 사용된 자유는 인간됨을 완성시키지만, 잘못 사용된 자유는 인간됨을 파괴합니다. 그로 인해 인간에게는 악의 가능성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악의 가능성은 어떤 환경을 만나느냐에 따라 험하게 표출되기도 하고 약하게 표출되기도 합니다. 요즈음 과학자들은 두뇌에 있는 ‘옥시토신’(oxytocin)이라는 호르몬이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이 호르몬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받고 관심 받을 때 생겨나는 물질입니다. 이 호르몬 생성이 활발한 사람은 공감 능력(empathy)이나 관용(generosity) 혹은 사랑의 감정이 풍부하고 또한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큰 반면,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두뇌에서는 이 호르몬이 잘 생성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환경이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결정하는 하나의 증거를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입니다. 환경적인 요인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회 심리학자들은 어떤 집단이나 권위에 예속하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악을 즐기는 경향을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이미 범죄한 사람과 아직 범죄할 상황에 이르지 않은 사람으로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큰 사고 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스테펜 패독보다 본성이 선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악이 드러날 상황을 아직 만나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안심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니 흉악한 범죄자 앞에서 의인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없습니다.

 

5.

둘째, “악은 참 쉽다!”는 말은 악이 쉽게 강화되고 확산되며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로 물든 우리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악에 손을 담그면 그 다음은 아주 쉽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악에 쉽게 무감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내면에는 악을 탐하는 못된 성향이 있어서 한편으로는 악을 미워하면서도 또한 그 악을 즐깁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결국 포로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죄의 노예”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내가 택한 죄가 나중에는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선택한 악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전염됩니다. 모두에게 악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나만 깨끗하게 살려고 해 보아야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아삽은 사람들이 거침없이 악을 행하여 번영을 누리는 것을 보고는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시 73:13)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인간이 행하는 악은 환경을 오염시킵니다. 악에 오염된 사람들이 제도와 법을 만들고 조직과 단체를 결성하면 그 모든 것이 악의 도구로 작용합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모여 단체를 결성하면 그 단체 안에서 악은 더욱 강고해집니다. 또한 그 단체 안에서 개인은 더욱 악해집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 두려움 없이 악을 표출합니다.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도 전쟁터에서 무심하게 악을 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행한 악은 이 땅을 더럽힌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아울러, 인간의 마음을 점령하여 악의 도구로 만들기를 탐하는 악한 영적 세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이 처음 악을 선택한 것도 사탄의 유혹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유혹을 받았다고 해서 죄가 면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선택한 것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속이는 자 즉 ‘거짓의 아비’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교란시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요일 5:19). 그래서 그 악한 영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 유혹은 집요하고 또한 아주 교활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닙니다”(벧전 5:8)라고 경고합니다. 처음에는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지만, 그것이 거듭되면 결국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 모두에게는 악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또한 선의 가능성도 있어서 철저한 악인이 되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철두철미 악의 화신이 되었다면 그는 악한 영에 의해 사로잡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작품에서 악의 화신인 이노우에를 보아도 그렇고, 라스베가스 총격범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다만 인간의 악한 선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에 대한 욕구를 따라 유혹을 좇다가 결국 자신을 내어 주어 악한 영의 도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 역시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으면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악한 영의 도구가 되었다 해도 “나는 죄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결과는 결국 자신이 계속 악을 선택해 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6.

악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악에 물들어 있고 악을 행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때로 우리 중 누군가를 통해 극한적인 모습의 악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악은 금세 세상을 지옥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 악은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와 법과 조직 안에 스며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빌미로 악을 탐하고 삽니다. 그 모든 것 배후에는 악한 영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이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소설로써 그리고 스콜세지는 영화로써 그 현실을 절절히 느끼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때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만드는 이 공포스러운 악의 현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악의 현실에 압도되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오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악을 알지만 악을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선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때문이며, 우리 존재 안에 물든 아담 즉 죄악의 본성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치료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악의 궁극적인 지배자인 사탄의 본영이 무너졌기 때문이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모든 악의 가능성이 완전히 치유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악의 현실이 아무리 공포스러워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믿습니다.

둘째,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고 거룩함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은 우리 각자가 먼저 내 안에 있는 악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죄에 물든 우리의 옛 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에서 바울 사도가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롬 6:22-23)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난 이후로 매일의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을 택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악은 참 쉽지만, 알고 보면 선은 더 쉽습니다. 선을 선택하고 행하다 보면 악을 선택하고 행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희열과 의미를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선은 악보다 더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을 선택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 머무르려는 선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롬 12:17)

셋째, 악의 현실은 우리에게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할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악의 뿌리 그리고 그로 인해 온 세상에 독초처럼 퍼지고 있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항구적인 대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음과 같이 반문할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의 악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합니까? 기독교 선교가 오히려 악을 확산시키는 도구가 되었던 역사를 모릅니까?”

그것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전한 것이고 교권을 확산시킨 까닭에 생긴 문제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먼저 내가 복음에 의해 변화되고 그 안에서 성장해 가면서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것만이 악의 현실에 대한 궁극적인 대책입니다. 아니, 진정한 궁극적, 항구적 대책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결국 모든 악이 사라질 날이 올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복음을 통해 우리 세상을 오염시키고 때로 질식시키려는 악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또한 영예입니다. 그래서 전도하자는 것이고 또한 선교하자는 것입니다.

넷째, 한 편으로는 복음을 통해 악의 뿌리를 치유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악의 강화와 확산을 막도록 힘써야 합니다. 악의 현실이 분명하고 심각한데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다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도 현실의 악에 눈 질끈 감고 하나님 나라만을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또한 헌신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각자 선 자리에서 이 세상에 깊고 널리 퍼져 있는 악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속한 사회의 조직과 제도와 법이 좀 더 정의로워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구조적인 악을 이용해 부정한 이득을 즐기던 사람들이 강력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방해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 전까지 결코 끝나지 않을 싸움입니다. 노력한다고 언제나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점점 나아져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보는 것처럼 수십 년 동안의 진보가 하루 만에 와르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희망은 종말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악의 현실과 싸우는 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완전한 선과 정의를 바라보면서 할 수 있는 대로 이 땅의 악의 현실을 치유해 나가는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진실로 새로 지어지고 그 복음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는 도구로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7년 10월 15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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