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목사의 비리만 봐서는 안된다
단순히 목사의 비리만 봐서는 안된다
  • 최태선
  • 승인 2017.10.22 0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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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삼중직]-2, 제사장
본 글은 최태선 목사의 칼럼 <예수의 삼중직> 중 지난번에 게재한 '왕'에 이어 두번째 글이다. - <편집자 주> 

이제 예수의 삼중직 가운데 두 번째로 제사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과 제사장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일만을 하는 사람들로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과 관련하여 왕과 제사장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인간 왕이 세워진 후 곧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초대 왕인 사울이 집권한 2년 째 블레셋이 엄청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일주일을 기다리라고 하였지만 기한이 다해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사울이 독단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무엘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왕이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약속한 기일에 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고 말했고, 그것이 사실이었지만 번제는 제사장인 사무엘의 일이었습니다.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 왕으로서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제사장이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그 일은 왕이 여호와의 명을 지키지 아니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로 이스라엘은 다른 왕인 다윗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왕이 생기기 이전부터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사울 왕과 다윗 왕을 세운 절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와 같은 제사장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제사장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담당함에 있어 최우선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때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오던 중 소가 뛰는 바람에 궤에 손을 댄 웃사가 죽는 일이 일어납니다. 잘못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궤는 율법에 정해진 레위인들이 매고 와야 하는데 그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웃사가 죽는 것을 본 다윗은 한동안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방치해두었다가 이번에는 제대로 레위인들에게 궤를 매게 하여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운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도맡은 제사장들을 보호하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무엘 이후로는 왕이 제사장을 임명하기 시작했고, 왕이 임명한 제사장은 왕의 의중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과 운명을 같이하는 운명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왕이 이전 왕이 임명한 제사장을 죽이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산당을 제거해야 함에도 왕의 눈치를 보며 그것을 언급하지도 못하는 어용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는 세 번째 직임인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슬픈 역사

결과적으로 제사장들 역시 이스라엘의 왕들처럼 슬픈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왕의 운명과 함께 하는 운명 공동체가 되었고, 하나님이 아니라 왕을 위해 존재하는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제사장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여호와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예수님의 성전청결 기사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성전 중심의 종교인 유대교는 성인 남자의 경우 최소 일 년에 세 번을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세 번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 한 번이라도 참석해서 나머지 두 번의 제사에 해당하는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예물은 돈과 가축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거룩한 곳이어서 예물 역시 거룩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먼저 돈은 세상에서 사용하는 것과 다른 성전에서 주조한 은화가 사용되었습니다. 당연히 환전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과도한 이익을 남겼습니다. 가축의 경우는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하는 제사장이 따로이 있었는데, 멀리서부터 끌고 오느라 더러워지고 상처 입은 가축들은 대부분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결국 성전에서 가축들을 구입해야 했는데 그 가축들의 가격이 과도하게 비쌌습니다. 결과적으로 신심을 악용하여 축재를 하는 종교 장사가 되었고 그것을 주님은 '강도의 굴혈'이라는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제사장들의 성전은 결국 무너져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사장들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 예언하셨고 주님의 말씀대로 서기 70년에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라진 지성소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주님은 다른 의미로 성전을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기자들에게 예수님의 운명과 관련하여 가장 현저한 사실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일종의 가림막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찢을 수 없는 강하고 두꺼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찢어진 것은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성소는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몸에 방울을 달고 허리에 밧줄을 두르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곳입니다. 인간인 대제사장에게 그 일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대제사장이 그 안에서 죽어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며 그 시체를 꺼내기 위해서 몸에 밧줄을 들렸던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성소의 휘장이 갈라진 것은 이제 누구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신호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제사장,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주던 중보자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제사장의 존재 자체가 의미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라도 하나님과 조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놀라운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제사장의 모든 직임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제사장의 직임은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만인제사장

하지만 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직임이 사라졌지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장인 시대가 열렸습니다. 만인 제사장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특별한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이스라엘은 모두가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라는 새로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개신교의 타락과 함께 만인제사장의 의미가 목사와 성도의 구분이 없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지만 만인제사장의 의미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새로운 시대의 선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라는 하나님의 일을 담당하는 특별한 직책은 없습니다. 목사와 선교사들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후원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디에 있건 무슨 삶을 살건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하나님과 관련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도록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해야 하는 새로운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대로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욕망에 이끌리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제사장적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

그런데 왕 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사장직과 관련해서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슬픈 역사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목사라는 직임이 특별히 강조되어 목사와 평신도라는 계층으로 나뉘고, 목사는 전권을 휘두르며 하나님 나라 방식의 반대 방향인 지배하고 다스리는 위치에 서있고, 목사가 아닌, 다시 말해 평신도라고 불리게 된 사람들은 마치 벽돌 공장의 벽돌처럼 일정한 모양으로 찍어져 창조의 모습을 상실하고 마치 북한 주민들처럼 억압되어 찌그러든 '난장이'*들이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현상인 성범죄나 헌금 유용과 같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비리들이 열매로 드러나자, 이제야 비로소 그 동안의 교회가 잘못되었음을 자각한 분들이 교회를 떠나 가나안 교인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목사의 비리가 아니고, 목사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예수님을 좇는 제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목사를 몰아내고, 목사교를 폐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현재의 교회의 상태, 다시 말해 세상과 다르지 않은 사회 속에서는 주체가 누가 되든 똑같은 행태가 반복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일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제사장인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와 자매가 되어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고 버팀목이 되는 성령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두가 제사장인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걸맞은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끄시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기회들을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사명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그 새로운 역사에 참여하는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존 듀이가 사용한 단어로,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여 정상적인 국민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난장이로 지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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