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항공의료선교 개척자, 박형동 선교사
한인 항공의료선교 개척자, 박형동 선교사
  • 신기성
  • 승인 2017.10.3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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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날개로 알려진 박선교사의 새로운 비전과 음악 선교

 

[미주뉴스앤조이=신기성 기자] 오늘은 90년대 초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근 10년간 다양한 사역을 펼치다 2002년 도미하여 현재 내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박형동 선교사를 만났다.

박선교사는 1982년 가톨릭 의대를 졸업 한 후 성모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를 수련하고 전문의가 된다. 후에 오산 공군부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중 미군 대위의 전도로 회심하게 되고 이어 아프리카 의료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후 2 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91년 당시 대학 일 년 후배이자 정신과 전문의였던 부인 서미라씨와 함께 탄자니아의 아프리카 최고 봉 킬리만자로 산 근교에 있는 킬리만자로 기독 병원(Kilimanjaro Christian Medical Center, 이하 KCMC)으로 파송돼 의료 선교 사역을 감당한다.

10년간의 선교 사역을 마치고 2002년에 미국으로 건너온다. 박형동 서미라 선교사 부부는 함께 미국에서 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내과 전문의가 되어 현재 Hospitalist 란 직함을 가지고 주로 미국 중서부의 의사가 부족한 지역에 일종의 순회 진료(Travel Doctor)로 활동하며, 거주지인 뉴저지를 오가며 일하고 있다.

박선교사는 공군에 근무 할 당시 드물게 미군으로부터 경비행기 조종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항공의료선교 사역도 개척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음악을 통한 선교가 주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굳게 믿고 주로 의사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창단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일인이역을 일을 감당하고 있는 박선교사를 만나 보았다.

 

비록 오래전 일이지만 이제 막 전문의가 된 의사 부부가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시행하기까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1984년에 성모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수련할 당시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정부파견의사로 근무하던 대학 9년 선배가 병원을 방문하여 아프리카 실상을 소개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 아프리카 병원에서 일을 한다고 상상하니 가슴이 마구 뛰더군요. 그때 아마 아프리카에 간다는 생각이 처음 싹튼 거 같아요. 그러다가 1986년 “Out of Africa”란 영화를 아내와 같이 보고 새로운 삶을 더 크게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공군 군의관 시절인 1989년 미군 대위로부터 전도를 받고 회심을 하게 되었고, 마음속에 심겨져있던 씨앗이 갑자기 자라게 되더군요. 제대 후 대학에 들어가 간이식을 연구하려던 생각을 접고 그 후 2년간 아프리카를 세 번이나 다녀오면서 준비를 한 후 , 1991년 9월에 탄자니아로 건너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지나고 생각하면 부르심이었던 거였어요.

 

 

부르심이었다고 어떻게 확신 할 수 있었나요?

부르심이 있으면 자꾸 미래 일을 상상하게 되고 생각만 해도 기쁘고 의욕이 솟게 되고 사명감이 생기게 되지요. 남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일에 열정이 생기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길로 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본인만 알게 되지요. 마치 임신 초기에 아기 엄마만 알듯이, 나중에 과정과 열매로 부르심이 맞았다고 확인하게 되지요. 하지만 늘 좋은 열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프리카 하면 흔히 덥고 미개하고 열악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서의 10년간 생활은 어땠나요?

물론 그런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 하는 아프리카와 실제는 매우 다릅니다. 타잔 영화에나 나오는 그런 아프리카가 아닙니다.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는 지대가 높은, 사바나 기후여서 살기 좋은 곳이 아주 많습니다. 거의 매일 해를 볼 수 있고, 캘리포니아보다 조금 더운 곳이라고 생각하면 대략 맞습니다. 자연 환경이 좋은 곳이 정말 많고, 그런 곳에 주로 인구가 밀집되어있지요. 물론 전기, 수도, 교통, 의료 등 모든 사정이 열악하고 가난합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주로 병원 사역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이나 미국과 질환 면에서 어떻게 달랐었나요?

예. 저는 외과 의사였으니 수술이 주 업무였고, 종합병원이었던 관계로 다른 외과의사 4명이 더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비행기로 이동 진료할 틈이 생겼었죠. 하지만 아내는 인구 400만인 킬리만자로 지방을 통틀어 유일한 정신과 전문의였으니 엄청 바빴었습니다. 환자는 한국이나 미국서 보는 환자 다 볼 수 있습니다. 단지 빈도가 확연히 틀리구요. 이를 인구통계학적 차이(demographic difference)라고 하죠. 물론 말라리아 주혈흡충 등 열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질환도 많았지요. 무엇보다도 그때는 에이즈가 막 기승을 부릴 때라서 정말 많은 환자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친하게 알고 지내던 친구도 많이 죽었습니다. 참으로 암담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탄자니아와 케냐, 그 밖의 여러 나라에 옛날 서구 선교사들이 세운 작은 규모의 병원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 병원 주위에는 예외 없이 경비행장이 있습니다. 세계 어디나 의사 특히 전문의는 대도시에 편중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더욱 그렇지요. 탄자니아도 수많은 지방 병원 중에 외과 의사가 있는 병원은 당시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오지의 환자들이 큰 도시의 종합 병원에 방문하여 수술을 받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비용도 많이 들구요. 기다리다 포기하는 환자가 더 많지요. 그래서 아프리카는 예전부터 환자를 모아 놓으면 나이로비 등지로부터 외과의사가 정기적으로 경비행기를 이용해서 방문하여 며칠 체류하면서 한꺼번에 많게는 20건까지 수술을 하고 돌아가고, 현지의사는 수술 후 회복을 담당하는 항공의료서비스(Flying Doctor Service)란 것이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직접 비행 조종도 배우고 수술도 하게 됐던 계기였습니다. 제가 수술 할 수 없거나 복잡한 처치가 필요한 환자는 비행기로 후송을 해서 동료 의사들과 같이 수술한 후 다음 방문 시 데려다 주곤 했습니다.

 

비행 중 사고를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었나요?

왜 없었겠습니까?(웃음) 부쉬에 추락 하여 비행기가 큰 덤불에 걸렸는데 몸 하나 안 다친 적도 있었고 한번은 아내 포함하여 4명의 의사가 타고 이륙하던 중 실속에 걸려 큰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활주로가 짧고 지대도 높고 동물들도 많아 사고 위험이 높고요, 실제 알고 지내던 비행사 중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5명은 됩니다. 제가 무사 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지요. 정말입니다. 그때의 경험은 책으로 써도 될 만큼 흥미진진한 일이 많았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또 이야기하기로 하죠.

 

선교사로 파송 되었으면 의료사역 이외에 교회 개척이나 전도 등의 활동도 해야 하는 가요?

의료선교사가 복음 증거 사역을 반드시 병행해야 된다 아니다는 예로부터 신학적 논의가 되어 왔던 일입니다. 저는 하지만 그게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당시에 지원하는 교회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감도 있었고, 나름대로 열심을 보였었습니다. 병원에서 처음 시작한 영어 예배부가 나중에 지역에서 제일 큰 영어 회중을 가지는 교회로 성장 할 때는 보람도 느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내가 5년간 휴가 때 외에는 거의 한주도 빠지지 않고 피아노 반주도 하고 저도 노력을 많이 했었습니다. 현지 목사를 도와 개척한 교회도 떠날 때 즈음에는 많이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의료 선교사가 병원에서 사역 하는 가운데 예수와 닮은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너무 부족한 게 많습니다. 실수도 많이 하고 주님의 영광을 가렸던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어떤 점이 가장 아쉽다는 생각이 드나요. 그리고 만약 다시 가게 된다면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요.

우선 그때 저는 한창 젊었고 의욕이 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도 전형적인 한국 남성으로서 성미도 급했었죠. 뭐든지 단기간에 이루려 했고요. 아프리카 사람들은 절대 서둘지 않습니다. 그리고 화도 잘 안내는 거 같아요. 물론 그러한 그들의 성품 때문에 수술 후 많은 환자들이 교정할 시기를 놓쳐 사망하곤 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교육을 통해 의료 시스템을 점차로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마음에 화가 난적도 많고,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좌절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미숙 했었던 거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 붉힐 잘못도 많이 했었지요. 나중에 탄자니아를 나오기 바로 전에 들은 설교에서, Being이 Doing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주님이 게게 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갔을 때 우리가 지상에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뭐로 분주 했는지는 그리 중요할 것 같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었느냐가 더 중요 할 거 같아요.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살던 다른 곳에 살던 우리의 성품이 예수를 닮을 수만 있다면 복음 증거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40 이 넘은 나이에 미국에 와서 다시 레지던트 수련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미국에 오시게 되었나요. 그 과정에 어려운 일은 없었나요?

한때 아프리카 최초로 심장 수술 센터를 세우려고 한 2-3 년간 동분서주 한 적이 있습니다. 중간에 가족을 남겨두고 한국에 혼자 일년 동안 대학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따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 때가 가족 모두에게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위에 기술했듯이 제가 여러모로 지혜가 부족해서 좌충우돌만 하다가 결국 그 계획을 눈물을 머금고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독하게 마음먹고 사생결단으로 덤볐으면 뭔가 이룰 수는 있었겠지요. 하지만 아내도 많이 지치고 우울증 증상도 생기고, 저도 이제 안식년이 필요하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애들 교육도 생각해야 하고... 그래서 장고 끝에 미국 오기로 승부수를 던진 거죠.

왜 어려운 일이 없었겠습니까? 40대 중반이 되어가는 나이에 모든 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데요. 근 꼬박 1년은 공부만 한거 같아요. 주님의 은혜로 미국 의사 자격 시험(United States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이란 관문을 통과하고 어렵게 내과 레지던트 자리를 얻어 같이 3년간 서로 뉴욕과 뉴저지의 다른 병원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여러모로 도와주셨던, 만백성 교회의 목사님과 여러 교우님들의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두 분이 하시는 일을 비교적 생소한 “Hospitalist”라고 들었습니다. 어떠한 직책이고 또 왜 뉴저지 집을 나두고 타지에서 주로 일을 하시나요?

박형동 선교사의 아내인 서미라 정신과 전문의 탄자니아 진료 당시 사진

예전에는 의료 시스템에서는, 자기가 돌보던 환자가 입원하면 내과의사가 직접 병원에 들려 치료하곤 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어서 입원 환자는 대부분 Hospitalist가 치료에서 퇴원까지 담당하고 개원의들은 거의 외래 환자만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따로 오피스가 없고 병원에서만 일하는 셈이지요. 이 시스템은 하루 12 시간씩 일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오고 가는 여행 시간 포함, 대략 한 달에 3주는 나가있고 약 일주일이나 열흘간은 뉴저지에 있곤 합니다. 지금은 거의 이년간 오레곤 주에서 일하고 있지요.

처음에 비자 문제로 의사가 없는 소도시를 전전 하다 보니 객지 생활을 하게 되었지요. 처음 3년은 각자 다른 주에서 일을 했었구요, 지금은 거의 같은 병원에서 일을 합니다. 숙식은 Hampton Inn에서 주로 하구요 이제는 호텔이 집보다 더 편해 졌습니다. 나중에 뉴저지에 job을 찾으려 하니 잘 안되더군요. 중간 중간 여행 하는 재미도 솔솔 있고... 근데 저희는 계약상 부족한 의사가 채워지기 까지만 일하는 임시 의사이므로 일 년에 한번 씩 병원을 옮겨야 합니다. 대개 다른 주로 옮기게 됩니다. 둘 다 역마살이 껴있는 셈이죠(웃음)

 

병원 근무 중 복음 증거 할 기회는 생기나요? 미국은 그러한 것에 제약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병원일은 주중에는 무척 바쁩니다. 더구나 12시간 일에다, 어떤 때는 하루도 안 쉬고 2주 연속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 저녁 시간에는 파김치가 되어 호텔로 돌아오곤 하지요. 병원에서 따로 전도 해야겠다고 계획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참 신기한 것이, 제가 아침에 성경도 읽고 묵상하고 그간 주님과 관계가 좋았다고 생각 되는 주간은 어김없이 환자들과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 할 기회가 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기도를 해 줍니다. 그러면 많은 환자들이 감동을 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요즘은 주님과의 관계가 좋은지 거의 매일 그런 일이 생기더군요. 지난 주일에는 12명 환자 중 9명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물론 이런 날은 드물고요, 보통 하루 2-3명과는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고 기도하곤 하지요. 주님과의 관계가 나쁠 때는 일주일 내내 지나도록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고 기회도 오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준비가 제대로 되고 다시 마음이 청결해 질 때 까지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목사가 ‘전도는 하는 것이 아니고 되어지는 것이다’라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저도 같은 체험을 해오고 있습니다. 하루 일과가 그간의 저의 영적 상태를 너무나 잘 대변해 줍니다.

 

듣고 보니 병원보다 더 좋은 선교지가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병원에는 정말 어려운 환자들이 많겠군요. 아프리카나 한국과 비교해 주로 어떤 환자가 주류를 이루나요?

저희들이 대하는 대부분의 환자는 나이들어 오는 노인성 질환 환자들입니다. 심부전, 폐렴, COPD라는 폐기종, 중풍 등... 말기 암 환자도 항상 몇 명씩 있구요.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과 관련된 질환으로 입원한 환자들이 참 많습니다. 알코올 중독과 관련된 환자는 세계 어디나 많겠지만 미국은 마약 중독이 정말 심각합니다. 퇴원시키면 몇 주 후 또 들어오고. 어떨 때는 정말 예수 밖에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미국 사회가 마약으로 크게 병들어 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들을 위해 뭔가 적극적으로 헌신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현재 미국서 따로 의료선교 단체를 설립하거나 소속되어 일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탄자니아를 나오고 처음 십년 가까이는 거의 해마다 탄자니아를 방문하며 여러 가지 일을 계획했었습니다. 그 결과 저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오종성 선교사가 탄자니아 현지서 제 바통을 이어받아 사역을 지금 거의 1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조용히 의사로서 일만 하고 지내고 있다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최근에 저희 교회(열린교회) 담임 임영건 목사님과 Grace Recovery Ministry란 단체를 등록하여 2개월 간격으로 2박 3일 일정의 신유집회 성격의 모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3기 모임인 이번 주말 집회에선 마약 중독에 관한 강의와 상담을 할 계획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해 봅니다.

 

 

 

화제를 바꾸어 의사들만의 교향악단 창설을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이 인터뷰의 계기이기도 한데요. 구체적으로 그 동기와 목적 등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예, 저는 사실 중 3때 베토벤 음악에 흠뻑 빠져 당시 고등학교 입학시험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고전 음악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다닐 때 바이올린도 배워 지금까지 일 년에 두어 번은 지역 관현악단 제일 뒤에 앉아 같이 연주도 해오고 있구요. 어릴 때 지휘자가 되는 것이 제 꿈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등 대가들의 음악이 인생 전반에 실로 매우 큰 영향을 준다고 봅니다. 인생을 지켜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확실한 이정표가 됩니다. 더구나 어릴 때 접할수록 그 기대 효과는 크다고 봅니다. 아프리카에 살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해 왔습니다. ‘저렇게 순수한 아동들이 어려서부터 고전 음악을 알게 되고 그것을 스스로 즐길 줄 알고, 거기에 예수의 말씀만 들어가면 더 이상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정말 그들의 음악성은 뛰어나고 천부적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아프리카 나라에 오케스트라가 있는 경우는 드물며 전문 음악 학교도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군악대는 여기저기 있는 거 같아요.

 

근데 미국에 의사 교향악단을 설립하는 것과 아프리카와는 어떤 연관이 있나요?

지금 부터10년 전에 창단된 전 세계 의사들만으로 구성된 WDO(World Doctors Orchestra)란 교향악단이 있습니다. 세계 각국을 돌며 일 년에 3-4 번 공연하고 있습니다. 저도 멤버여서 내년 3월에 두바이 공연에 바이올린 주자로 처음 참석할 예정입니다. 주로 유럽이나 미주 등 잘 사는 나라의 의사들이 참석해서 좋은 공연장에서 연주하고 각자 경비 외에 300 Euro를 Donation 합니다. 물론 Charity에 Donation이 쓰여 진다는 명분이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이러한 오케스트라를 설립하여 궁극적으로 중남미나 아프리카 등 선교지에서도 공연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제 비전이지요. 아마 처음부터 4-50명이 같이 아프리카에 가기는 쉽지 않겠지요. 한 10명만 간다고 해도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은 무궁무진 합니다. 꼭 교향곡을 처음부터 연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의사들이 제일 많이 가는 단기선교가 될 수 있겠군요.

잘 보셨습니다. 저도 해마다 여기저기서 중남미 단기선교에 같이 가자는 요청을 받아왔지만 아프리카에 대한 부담으로 적당히 거절해 왔습니다. 단기선교에 의사 한분 모셔가기 정말 힘들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사들 교향악단이 간다면 적어도 의사 한 20명은 가게 되겠죠? 그들이 연주뿐만 아니라 지역 병원에서 컨설팅을 해주고, 가능하다면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 강의도 할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도 미국서 잘 살던 의사들이 선교지를 직접 체험해 보면 뭔가 느끼지 않을까요?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지 선교지를 섬기려는 의사들이 저들 중에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문 음악인들이 섞여 있으면 저들 나름대로 독주회를 따로 개최하거나, 현지인 중 악기를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레슨도 할 수 있겠고, 마스터 클래스도 할 수 있지 않을 까요

 

그러면 의료인 이외 전문 연주가들도 참석 할 수 있나요? 전문인 음악선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물론 입니다. Medical 계통이 아니더라도 저희와 생각을 같이 하는 분들의 적극 참여를 희망합니다. 솔직히 말해 의사들만의 연주는 소리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줄리어드 출신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배운 전문가들이 중간 중간 섞여서 연주를 리드하면 소리가 훨씬 좋아집니다. 지금 독주자가 될 수 있는 출중한 기량을 가진 연주자들이 수두룩하지만 결국 그 중 일부만 독주자의 길로 나서게 되지 않습니까? 저는 그들 중 일부가 아프리카나 중남미 등으로 눈을 돌리면 많은 독주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좋은 일을 한다는 큰 성취감도 느끼게 되고요. 가끔 전문 연주자들이 탄자니아에 연주하러 오면 그 지역에 사는 외국인, 특히 유럽 사람들은 다 오더군요. 저도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구석구석에서 사역하는지 몰랐습니다. 저들에게 사역지에서의 문화에 대한 갈증은 대단하며 아프리카인들의 음악에 대한 열망 또한 대단합니다. 그들은 단지 기회가 없고 여건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언제 창단 연주를 계획하시나요? 목명은요?

12월 16 일 베토벤 탄생일에 맞춰 베토벤 곡 일색으로 연주할 계획입니다. 에그몬트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2번, 교향곡 3번 ‘영웅’ 등입니다. 일단 ‘North America Medical Orchestra’라고 명명해 두고요, 단원들은 일단 뉴욕에 있는 기존의 medical orchestra에서 대부분 충당 할 예정입니다. 다음 연주회부터는 미국 전역에 홍보하여 차츰 참여 범위도 넓혀 보려하고 한국에서도 몇 분 초빙하려합니다. 일단 이번 연주회가 성공하면 내년부터 일 년에 3-4 차례 공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탄력이 붙는 시기가 있겠지요. 기회가 되면 가까운 아이티나 중남미에 시범적으로 몇 명 연주자 들이 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WDO에서 협력하면 내후년쯤 탄자니아에서 연주가 가능할 수도 있겠죠.

 

직접 지휘도 하실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떨리지 않으신가요?

예. 솔직히 많이 긴장됩니다. 작년 6월부터 커티스 출신 김경훈 전문 지휘자에게 개인 레슨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고 금년에 유럽에 두 차례 지휘 마스터 클래스도 다녀왔지만 아직은 아마추어입니다. 김경훈 지휘자께서 리허설 포함 전 기간에 걸쳐 밀착해서 지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부족한 것도 많고 실수도 많이 했음에도 제 인생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주님이 인도하심을 굳게 믿습니다. 최선을 다할 따름입니다.

 

일종의 음악 선교를 준비 하시는 셈이군요. 연주회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앞으로 한 5-10년 후 어떤 모습을 그리고 계십니까?

저도 어느덧 60이 되었는데요. 5-10년 후를 지금 말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요. 얼마 전 지금 97세의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기고한 글을 보았는데, 그분이 지나간 날을 회고해 보니 자기 인생의 황금기는 65-75세 사이였다고 말씀 하시더군요. 그 기사를 보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주변 교인들 앞에서 이야기하니 다들 좋아하더군요. 아직도 우리에게 기회가 남아 있는 거지요. 저는 주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그때에 주로 아프리카나 선교지에 있고 싶습니다. 사실 지금이라도 탄자니아로 다시 돌아가 이전처럼 수술도 하고 음악도 하고 싶은 생각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주님께서 그쪽 보다는 이곳에서 더 일을 하게 하시는 것 같군요. 솔직히 미국이 세계 제일의 피 선교국이 되어가고 있지요. 아무튼 지금은 마음을 겸손히 하고 비우며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시 아프리카로 가게 된다면 어떤 거창한 일을 이루기보다는 그저 저들을 조용히 섬기며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사로서 독자들에게 무슨 건강의 비결 등을 말씀 하실 수 있나요?

글쎄요. 건강에 왕도란 것은 있을 수 없구요, 다들 상식적인 것인데 지키기가 힘든 거죠. 이를테면 건강에 도움 되도록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 보다는 건강에 해가 되는 나쁜 습관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담배를 끊는 것이 매일 아침 조깅을 새로 시작하는 거 보다 더 건강에 좋으며, 근육 키우기보다 지방을 빼는 게 더 좋지요.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적게 먹는 게 무조건 좋습니다.

그리고 중독과 싸우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합니다. 매일 셀폰을 한 시간 이상씩 들여다보며 오지도 않을 문자를 기다리는 것도 중독입니다. 어떤 형태든 중독은 몸과 마음, 관계 그리고 재산, 생명까지 앗아갈 잠재력이 있습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범람으로 포르노 중독과 각종 섹스 중독이 너무 만연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것과 싸워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성결하게 보존하도록 인생 최우선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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