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단순한 사회개혁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한 사회개혁가들이 아니다
  • 최태선
  • 승인 2017.11.11 0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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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삼중직]-3, 선지자

제가 예수의 삼중직을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선지자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왕과 제사장 직임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그 글을 먼저 썼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선지자를 당연한 직임으로 생각하며 사용하면서도 막상 선지자가 어떤 존재이며 왜 이스라엘에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의 삼중직과 관련하여 선지자적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클라렌스 조던(Clarence Jordan)

이스라엘과 선지자(예언자)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인간 왕이 없던 시절에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통치하셨습니다. 광야에서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직접적인 방법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보의 역할을 하는 선지자를 통해서였고,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왕의 등장과 함께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괴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에 전하는 것은 곧 왕과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이 되었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이 인간 왕의 등장과 함께 달라진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과거와 현재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에 근원을 두고 하나님과 백성이 맺은 계약을 거부하는 당대의 가치관과 사회구조를 철저히 비난했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상당부분 인간 왕에게 있었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을 통치하는데 실패하거나 고의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하나님의 지적인 셈입니다. 하나님과 백성이 맺은 계약의 준수 여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난한 이들과 압제받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는 태도, 올바르지 않은 상거래에서 드러나는 올바른 가치의 거부, 공동선이 사라지도록 만드는 상황 속에서 선지자들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타락한 부의 표징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결코 단순한 사회개혁가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선지자들의 임무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계획을 세상에 펼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에게 사회를 바로 세우는 일은 곧 올바른 계약의 이행과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선지자는 심판을 선포했고 구원을 향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예언에 대한 이해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은 결코 개인적인 길흉화복에 대한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애원이었고, 다가오는 심판을 피하라는 자비의 발로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와 이스라엘은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실존에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서로 제기하면서 마주쳤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여 이기적이 된 이스라엘 공동체에 자비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또한 선지자는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떠올리게 하여 현재를 보게 하였던 선지자는 미래를 현재와 연결시켜주는 예언자로서 기능하였던 것입니다.

 

슬픈 역사

사람에게 있어 가장 받아드리기 어려운 일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받아드리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인간도 하기 어려운 영적인 과제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허물과 죄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받았던 멸시와 천대는 그 생생한 증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 전했지만 그가 받은 대접은 멸시와 폭력이었습니다. 그는 목에 칼을 차고 갇히기도 했고, 밤새도록 묶여 있기도 했고, 이상하고도 불편한 삶을 감수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삶이 너무도 어려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설득하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설득당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20:7-9)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사칭하여 개인적인 명예를 구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하였습니다. 권력에 아부하고 영합하여 개인의 영달을 누리려는 가짜 선지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우리는 미가야의 기사를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을 찾아 힘을 모아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몬을 되찾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옳은가를 하나님께 묻기 위해 무려 사백 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을 불러 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서 싸우면 이길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미심쩍어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왕에게 물을만한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은 미가야를 천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천거한 미가야는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 때문에 자신은 그를 미워한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미가야를 불러왔지만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나가 싸우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재차 진실을 말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묻자 미가야는 거짓말을 하는 영을 왕의 선지자들의 입에 넣었고 왕에 대하여 화를 말했다고 진실을 말하자 왕의 선지자들의 우두머리인 시드기야가 미가야에게 다가와 뺨을 때리기까지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무려 사백 명의 거짓 선지자가 왕 주변에 있었고 유력 자제인 시드기야가 그 무리들의 우두머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왕상 22장 참조) 

미가야가 왜 왕에게 처음에는 거짓을 고했을까요? 그 이유는 기사 내용에서 보듯이 뺨을 맞게 되고, 대부분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는 옳고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아드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서 보듯이 진리란 꺼리는 것이며 그래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구박하거나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죄 속에 거하며 불의를 행하며 세상의 열락을 즐기며 쾌락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대로 그들이 행한 대로 받은 보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

예수님은 선지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신 그분이 직접 세상에 오심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의 편에서 예언을 전하던 선지자 직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지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에도 선지자로 분류될만큼 선지자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실존에 문제들을 제기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누가복음 4장 18-19절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관심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에게 있었습니다. 옛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의 삼중직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 직분을 담당하심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여시고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건설을 일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왕이며 제사장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직접 구현하셨습니다. 핵심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직접 선지자 직을 수행하셨고, 제사장으로서 선지자 직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각각 나뉘어 있던 삼중직을 하나로 모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희년을 알리는 '주빌리'의 나팔소리가 오십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일상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 불러주시고 제자들이 당신이 하셨던 일보다 더 위대한 일들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큰 자도 작은 자도 없는 평등한 나라입니다. 누구나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가 되어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구현되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지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이 없는 희년의 진정한 의미가 완성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구원이며 복음의 완성임을 그분의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제자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아 당신처럼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모든 삶을 바쳐야 하는 제자들의 각오를 날마다 다질 수 있도록 주기도문을 날마다 외우게 하신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단순히 선지자로 활동해야 하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한 단어 한 문장 모두에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제자들의 삶의 실천사항이 알알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들은 글 하나로 다 살펴볼 수가 없습니다. 제 경우는 주기도문을 본문으로 50주 동안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주기도문에 담겨 있는 주님의 염원을 다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날마다 기회가 날 때마다 진지하게 외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정황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와 삶의 지침을 수시로 제공해 줄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라는 고백은 그것이 후대의 첨언일지라도 주기도문을 수시로 외우는 제자의 당연한 고백이기에 오히려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염원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은 선지자직을 통해 삼중직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수시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예수님처럼 선지자의 일을 행하는 왕과 선지자의 일을 행하는 제사장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

기독교와 관련하여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복음을 '영혼 구원'이나 '사후 천국'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구원관입니다. 김세윤 교수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그것은 구원파의 구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구원관을 가진 기독교는 장례식장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새로운 면죄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선지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복음이 복음 되고, 교회가 '산 위의 동네'가 되어 온 세상을 구원하는 빛과 소망이 되는 길이며, 무엇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우리의 고백이 진리이며 참임을 입증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팜'은 그런 삶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입니다.

 

미국의 조지아주 숨터 카운티에는 '코이노니아 팜'(Koinonia Farm)이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침례교 목사인 클라렌스 조던(Clarence Jordan)이 1942년에 세운 일종의 농업공동체입니다. 인종 차별이 극심하던 미국 남부에서 교회학교에 열심히 다니던 클라렌스는 어느 날 한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어린이 찬송가에 "붉은 색이든 노란 색이든, 검은 색이든 흰색이든 하나님의 눈에는 모두 존귀하다네. 예수는 세상의 모든 어린이를 사랑하신다네"라는 가사가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보기에 흑인 아이들은 늘 넝마를 걸치고 있었고, 씻지 못해 더럽고, 늘 배가 고파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그런 아이들도 사랑하실까?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어렴풋한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잘못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흑인들을 교회에서 돌려세우지 않았고, 그들을 마을의 변두리에 있는 헛간 같은 곳에 살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소년들이 썩은 오렌지를 줍거나 쓰레기 통을 뒤져 과일 조각을 입에 가져가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모두 사람들이 만든 그릇된 현실이었습니다(Dallas Lee, <The Cotton Patch Evidence>, Wipf & Stock, Eugene, Oregon, 1971, p.7-8 참고) -김기석 목사님 글에서 재인용

클라렌스 조던 목사님은 고통 받는 흑인들의 삶을 보고 '코이노니아 팜'을 세웠습니다. 물론 백인들의 저항이 심각했습니다. 하지만 '코이노니아 팜'과 같은 공동체가 바로 '산 위의 동네'인 교회입니다. 조던 목사님 한 일이 바로 예수님처럼 선지자의 일을 행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해비타트 운동을 시작한 밀러드 풀러가 그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도 이 '코이노니아 팜'에서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에버하르트 아놀드 장로 역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고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피에르 신부님 역시 노숙자들의 비참한 삶을 구원하기 위해 엠마우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엠마누엘 수녀님, 테레사 수녀님, 발터 벤야민, 마르틴 부버, 알베르 까뮈, 도로시 데이, 마하트마 간디, 시몬느 베이유와 같은 이들이 세운 공동체들이 한 일들 역시 모두가 각각의 시대의 선지자로서의 삶을 산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사회개혁가가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계획을 세상에 펼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왕과 제사장으로서 선지자의 일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영광에 참여하는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지자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그때도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하고 손가락질 할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아마 그럴 것입니다. 세상은 끝까지 저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현저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고백을 아버지께 드리게 될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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