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활을 오해했다'
'우리는 부활을 오해했다'
  • 노종문
  • 승인 2010.04.01 20:0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부활의 소망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학자 스콧 맥나이트는 한 강의에서 “우리가 전한 복음이 오늘 우리의 교회를 형성했다. 교회의 위기는 곧 우리가 전한 복음의 위기”라고 말했다. 한국 교회의 위기도 그 근원이 열심의 부족이나 사회 참여 의식의 부족이 아니라 복음의 위기에 있지 않은가 돌아보게 된다.

▲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양가감정을 느낀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가 전한 복음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라는 메시지였다. 나는 길을 가다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이런 말로 전도하는 사람을 만나면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불편한 양가감정을 느낀다.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실망하지 않고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어 고맙다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는 방법이나 내용이 오히려 복음을 오해하게 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이 메시지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성경이 선포하는 복음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개인 구원에만 치중하다

첫째로, 이런 복음은 개인의 구원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간주하게 한다. 이 복음이 제시하는 가장 긴급하고도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표지는 무엇인가?’ 자연스럽게 이 복음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그 순간에 내 영혼은 영생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이 복음에 따라 생각하면 성경은 개인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고, 그 방법을 요약해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구는 중요 구절이 된다. 내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정말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문제는 성경이 제시하는 더 큰 그림의 한 부분이다. 그 중요성의 부피를 과장한 나머지 더 큰 그림 자체를 가리면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종말까지를 아우르는 원대한 이야기로 제시한다. 이것은 개인 구원이라는 주제를 훨씬 초월한다. 개인 구원에만 초점을 맞춘 안경을 쓰고 성경을 통독하면 이런 전체 그림이 흐릿해지고 읽는 이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개인 구원의 복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를 ‘죽어서 천국 가려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만들었다. 그런 목적으로 모였으니 모인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미래의 안전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과도한 희생을 요구하면 안 된다. 한편으로 이들은 적당한 수준의 희생은 기꺼이 감당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작은 희생이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교회가 고민하는 개인주의적 신앙 행태, 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소비자적 신앙 행태는 그 뿌리를 우리가 전해 온 복음의 특성인 개인 구원의 패러다임에 내리고 있다.

▲ 우리에게 천국은 무엇인가.
천국의 의미를 모르다

둘째로 이런 복음은 천국을 죽어서 가는 ‘저승 세계’로 제시한다. ‘천국은 믿는 자들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천국은 사후 세계고 영생은 사후 세계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찬송가나 복음성가 가사를 통해 반복 학습되고 강화된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니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이런 천국 개념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하나님나라)과 상당히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래 고대하던 하나님의 통치가 드디어 우리에게 도래해 있다고 선언하셨다(막 1:15). 기도할 때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옵시고(=나라이 임하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마 6:10).

이상하게도,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로 '내려온다'(계 21:2). 만일 우리가 '천국=신자들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는 통속적인 선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이런 구절들을 이해할 수 없다.

천국을 사후 세계로 이해할 때 생기는 문제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이 세상을 불타 없어질 죄 많은 세상으로 규정하고, 우리는 이 세상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통속 신학에 사로잡힌다.

20세기 초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이런 신학(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자연과 문화에 대해 무관심하였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받은 소명을,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구명선(救命船)을 제공하는 소명으로 대치하였다. 세상은 어차피 점점 악해질 것인데, 벼랑으로 떨어지는 버스에 기름칠하지 말고, 차라리 승객 구출에 전력을 기울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이 너무 익숙해져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런 시각을 성경에 덧입히면서 본문을 읽어 내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결과이며, 비록 타락의 영향 아래 신음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날 때 그들도 결국 부활할 것이라고 말한다. 피조물들도 그 사실을 알고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롬 8:19~22). 하나님은 마지막에 이 세상과 그 안의 피조물들을 불태워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완성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사 65:17)은 분명히 옛 하늘과 옛 땅과는 다르다. 마치 지금의 썩는 몸과 썩지 않는 부활의 몸이 전혀 다른 것처럼.

그러나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와 피조물의 부활을 통해 놀라운 방식으로 완성된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이요, 마지막에 완전히 갱신되어 회복될 세상으로 본다면 아주 많은 부분이 바뀐다. 우리는 마지막에 이 땅에서 비상 탈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날 것이며, 이 땅이 온전히 회복된 후에 이곳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 것이다.

인간이 역사를 통해 형성해 놓은 이 세상의 문화는 불로 정화된 후에 아름답게 회복될 것이며, 우리는 그 문화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이곳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작곡한 음악이 천사들에 의해 연주될 것이고, 우리가 쓴 소설이 자랑스럽게도 천국의 도서관에 꽂혀 있을 것이며, 우리가 밤을 새워 가며 만든 소프트웨어가 천국의 PC방에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을 갱신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이다. 지금 행하는 우리의 노동과 창조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나 주의할 것! 우리가 우리 손으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아니다. 톰 라이트의 비유로 설명하면, 우리는 건축장이 각자에게 맡긴 도면을 받았고, 그 도면에 따라 각자 자기의 돌을 깎고 있다. 이 돌이 어느 자리에 가서 어떻게 놓여 건물 일부가 될지 지금은 모른다. 그러나 건축장이 오시면, 그가 직접 집을 세울 것이다.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며 일한다. 이처럼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한’ 건설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사후 세계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에도 사후 세계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 세계는 천국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으로 천국이 완성되기까지 잠시 존재하는 중간 상태다. 그곳은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이고(눅 16:22), 예수님이 십자가 한쪽 편에 매달렸던 강도에게 약속하셨던 ‘낙원’이다(눅 23:43).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죽으면 ‘낙원’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즉시 ‘주님의 품’에 안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고 육신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빌 1:23).

나는 ‘주님 품에 있음’을 좀 더 깊이 묵상해 보곤 한다. 먼저, 죽음은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긴밀하게 연결된 분이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긴밀히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은 낙원에서,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품에 안길 때, 우리는 주님의 품 안에서, 주님을 통해 하나처럼 친밀하게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죽음은 육체적으로는 이별이지만, 실제로는 더 크고 신비하고 친밀한 만남으로 들어가는 경험일 수도 있다. 이런 묵상을 해 보면, 죽음을 통해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은 죽음이라는 야수의 이빨과 발톱을 뽑아 버리는 강력한 소망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머무르지 말자. 부활의 소망은 이보다 100배쯤 더 큰 소망이다.

▲ 오늘날 교회는 부활이 빠진 복음을 전하고 있다. (출처 : 위키피디아)
부활이 빠진 복음을 전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전한 복음은 부활의 소망이 탈락된 복음이다. 개인 구원의 복음, 사후 천국행의 복음에는 부활의 소망이 들어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 그래서 부활의 소망을 사후 영생의 소망으로 오해한다. 그러면 부활의 소망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먼저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한다(고전 11:23). 그리고 부활의 둘째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부활이며(고전 11:24), 부활의 셋째 열매는 온 피조물의 부활과 만유의 회복이다(고전 11:28; 엡 1:10).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이라는 것이 그저 어떤 이들의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실재함을 보여준 신호탄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부활은 많은 이들이 혼동하듯이 그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는 다시 죽었다.

부활은 이런 것이 아니라 한 몸이 새로운 종류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고전 15:35 이하). 예수님이 새로운 종류의 신비한 몸을 입으신 것을 제자들은 보았고 만졌다(요 20~21).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사역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마지막 때에 일어날 새로운 창조가 역사 속으로 뛰어 들어와 자리를 잡고 깃발을 세운 사건이다.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서 잠시 후에 다시 죽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새 창조에 속한, 미래에 속한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이다(고전 15장).

예수님의 부활은 미래의 새 창조를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처음 창조가 폐기되지 않고 구속된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언이다. 처음 창조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은혜로 보존되었다가 마지막 때에 놀랍게 회복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처음 계획이 온전히 성취된다. 이렇게 성취되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을 것이다. 상처는 치유될 것이고 관계는 회복될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지혜가 증거된 세계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톰 라이트가 지적하듯이 우리의 과거와 기억은 어떻게 될 것인가. 처음 창조 대부분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불타 없어진다면, 우리는 그 고통의 기억을 안고 다음 세계를 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슬픔을 완전한 기쁨으로 바꾸어 놓을 계획을 세우고 계시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온 창조 세계, 곧 만유의 부활이라는 계획이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실 것임을 미리 확증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부활도 모든 인류의 상상을 뛰어넘어 성취될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시키실 때, 새롭게 된 창조 세계 전체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증거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에서 놀람과 기쁨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만들 것이다.

노종문 / 한국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편집장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글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kim 2016-03-24 02:21:07
성경구절이 틀렸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부활이 빠진 복음을 전하고 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에서
나오는 성경구절들 고전 11장이 아니라 15장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