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 인터뷰, “정의의 외침은 교회의 소명”
톰 라이트 인터뷰, “정의의 외침은 교회의 소명”
  • 신기성
  • 승인 2017.12.06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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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 정의, 세속 권위, 대형교회, 재난 등에 관한 톰 라이트의 생각

[미주뉴스앤조이=신기성 기자] 지난 11월 18일부터 21일 사이에 열린 미국 종교 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 및 성서학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기간 동안 영국 성공회 주교이자 신약성서 학자인 톰 라이트를 만났다. 그는 현재 스코틀랜드에 있는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University St. Andrews)에서 신약학과 초기 기독교 역사(New Testament and Early Christianity)를 가르치고 있다. 왕성한 저작 활동을 언급하며 책을 빨리 쓰는 비결이 있느냐는 농담 반 진담 반 질문에 라이트 교수는 뭐든 생각나는 대로 다 써 놓는다고 답했다. 20대 때부터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일단 무겁지 않은 주제들이나 내용들을 적어놓은 다음에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읽고 고치는 작업을 반복한다고 한다. 읽고 고치기를 수십 번 반복하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현재 하고 계신 연구나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네 보통 한학기에 한 두 과목 강의를 하고 책 읽고 집필도 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내년 봄(2월 12일)에 스코틀랜드 애버딘(Aberdeen) 대학에서 열리는 기포드 렉처(The Gifford Lecture)에서 강의를 맡았습니다. 기포드 렉처는 스코틀랜드의 4개 대학에서 돌아가며 개최합니다. 이번에 자연신학을 주제로 강연하게 됩니다. 역사, 종말론, 그리고 새 창조에 관한 것입니다. 내겐 익숙지 않은 주제죠.

이 강연에서는 역사의 본질을 다룹니다. 사실 교회가 역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우리가 역사적 상황에서 예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던 자연신학이 아닌 "어떻게 새롭고 신선한 방법으로 할 수 접근할 수 있을까"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관해 논하는 방식과 하나님에 관하여 논하는 방식 사이의 접점(Interface)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것이 내년 2-3월까지 내가 주로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그래서 1월까지는 자료 연구 및 정리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강의 내용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자연신학의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악이 세상에 창궐하는가'의 물음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것과 같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이 그런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가’하는 것이죠. 우리의 문화적 철학적 전제들이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을 제한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전제들이 우리의 인식론의 지평에 한계를 지워주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역사 연구 자체의 진보가 고대 유대와 기독교의 우주론과 종말론에 관해 새로운 설명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묻고 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저는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총 8번의 강의 시리즈를 통해 “사랑의 인식론(epistemology of love)'에 기초한 자연신학에 대한 접근 방법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이는 성서시대의 ‘새 창조’의 개념에 관한 고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실체와 세계의 실체에 관한 이해를 상호관계의 측면에서 기술할 계획입니다.

역사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이야기하고 이해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성서적 그리고 종말론적 신앙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설명할 겁니다. 성전에서의 예수 그리고 부활의 예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그것들을 역사적으로 받아들일까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복음서에 비추어 “정의(justice), 영성(spirituality), 관계(relationships), 미(beauty), 자유(freedom), 진리(truth), 권능(power)” 등의 의미를 바로 잡아 보려고 합니다. 복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주제들입니다.

이것이 2월과 3월에 할 것들입니다. 굉장히 광범위한 영역입니다. 오랫동안 연구해 왔던 것을 다 고려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갈라디아서 주석을 마무리해야 하고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에 관한 질문(Christian Origins and the Question of God)>도 계속 쓰고 있는데 다음은 복음서에 관해 쓸 예정입니다. 이것은 다음 4-5년에 걸쳐 할 일입니다.

 

 

여전히 정의에 관한 이슈는 전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 같습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한국의 상황을 보면 교회가 정의에 관한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개혁이후로 카톨리과 개신교 공히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는 두 나라가 상황은 다르지만 공히 국교회(Established Church)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교회를 모델로 얘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믿는 자들이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지에 관한 것 외에, 하나님이 교회를 실제로 어떤 식으로 돌보시는지에 대한 성서적 재발견이 이루어져 왔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미(美)와 정의 등을 진실로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이 교회의 일부분이며 교회의 소명(vocation)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종식시킨다는 의미 보다는,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법을 알리기 위해서 새로운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신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첫 3세기를 보면 기독교인들은 권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는 평범한(Ordinary) 기독교인들에 의해서였습니다.

가난한자를 돌보고 병원을 만들어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교육시키는 일들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초대 교회가 전형적으로 행하던 것들입니다. 그 당시는 이런 일들이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지?”라고 물으면 “예수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로 기독교인들이 이런 문제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안됐다’는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이고, 이것은 사회복지사 들이나 정치가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야 라고 떠넘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항상 이런 일을 소홀히 해 왔습니다. 때문에 교회가 권력자들을 향해 진리를 선포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8:19에서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하나님 나라와 진리와 능력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해하지 못했죠. 그래서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역설적으로 진정한 왕국, 진정한 진리, 진정한 능력의 승리라는 것을 압니다. 부활이 궁극적인 진리와 새로운 세계를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현실에서는 이것이 매우 복잡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국가에서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불법입니다. 미국에서는 목사들이 정치에 관해 설교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죠. 교회가 사람들을 동시대의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한 목소리로 정의를 외쳐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매우 분열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 잘못된 정책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의에 관한 문제를 논할 때, 권위에 순종하라는 답을 듣곤 합니다.

흔히 듣는 말이 하나님은 질서를 원하고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이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로마서 13장에 근거해서 이런 말들을 하곤 합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라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권한을 주었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물으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권력자들에게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권위를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권위에 따르는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당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한에서 당신들의 권위를 존중합니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1940년대에 본 훼퍼가 고뇌했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21세기 이 곳 보스턴 컨퍼런스에서 학자들을 향해 외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웃음) 하지만 지구 곳곳에서 삶과 죽음의 선택을 놓고 이 문제로 씨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나는 종말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책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d by Hope)>에서도 얘기 했듯이, 성서는 이 삶 후에 가게 될 천국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합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 신학이,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크게 다를 거라고 생각지 않는데, 근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에 집중되어 왔습니다. 나는 이게 서양 교회의 DNA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정치가들이나 언론도 교회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얘기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치에 관한 얘기를 하면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왜 교회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가?”하고 반문합니다. 우리는 성서가 얘기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주기도문에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지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말을 주의 깊게 실천하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대형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과 미국의 대형교회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에 거대 교회가 있다는 건 압니다. 한국은 한 번도 방문해 본적이 없어서 구체적인 상황은 잘 모릅니다. 이제 나이가 있어서 외국 여행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사는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는 10,000-12,000명이 250개회에 나눠 다닙니다. 평균 출석수를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마을에 교회가 있어서 교회에 가기 위해 다른 도시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십만 명이 다니는 교회는 상상해본 적이 없습니다. 십만 명을 양육하려면 교역자는 몇 명이 있어야 하나요? 한 200명?

어려운 점은 교회가 어떻게 인식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공헌하며,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책임이 있다고 인식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 왔습니다. 특히 초대교회는 교육의 기회가 없는 사람들에게 배울 수 있는 장을 제공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말씀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교회가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그런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정의와 관련해서 교회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는 것인데, 하나님 나라는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화평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늘 이 부분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5장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만약에 하나님이 완벽히 다스리신다면, 예수께서 주님이시라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함께 계시면 사람들이 다르게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나는 교회가 바로 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마태복음 5장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마태복음 5장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1세기는 가난한 사람들, 소수 민족, 힘없는 이들에게 매우 위험한 시대였습니다. 로마 식민지였고 로마 정부는 아주 잔인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1세기에도 부유한 사람들은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고, 유대인들도 남자 아이들은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나는 이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것이 그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지켜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진이나 재앙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경고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마가복음 13장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지금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고 실제로 무엇을 하시는지 내가 말할 자격은 없습니다. 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런 식으로 너무 쉽게 그리고 단호히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런 자연현상을 이용합니다. 항상 그게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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