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만 개혁한 교회"
"약간만 개혁한 교회"
  • 신성남
  • 승인 2017.12.1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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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는 지배자가 아니다

중세 1000년 동안 가톨릭 '사제' 제도의 극심한 폐해를 목도한 종교 개혁자들은 이를 대체하기 위한 목회 제도로 '목사'직을 새로 만들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설교자는 특별한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선 아무나 설교할 수 없었다. 개신교 자체가 이단으로 몰려 생사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누구도 함부로 개혁 교회의 설교자로 나서지 않았고, 또한 아무나 설교자로 세울 수도 없었다.

인간이 고안해낸 것들

신생 개신교는 설교자의 자격을 엄격히 제한할 필요가 있었고 아울러 그 설교자에게 강력한 권한과 지도력을 주게 되었다. 그런 시대적 요구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된 제도가 바로 작금의 목사 제도다. 그리고 적어도 초창기에는 이런 의도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덕분에 후일 더욱 많은 개혁자들이 이 목사 제도를 지지하게 된다. 심지어 칼뱅은 "태양과 음식과 물이 영양을 공급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보다, 목사의 직책이 지상에서 교회를 보존시키는 데 있어 더 필수적이다."고까지 찬양했다.

물론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과 살육의 전투까지 하는 상황에서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인간의 부패한 속성 때문에 발생한다.

모든 권력은 그게 정치 권력이든, 경제 권력이든, 또는 종교 권력이든 스스로 강화하며 커지려는 무서운 속성이 있다. 자신을 절제하는 권력이란 거의 없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볼 때 개신교 또한 이 함정을 크게 피해가진 못 했다.

개혁자들 역시 점차 목사라는 직분의 권한과 책임을 확대 해석하게 된다. 목사는 특별한 신적 권위와 능력을 소유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목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목사직의 설교권 독점은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른바 설교직의 중세적 무당화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칼뱅이 로마 가톨릭에 대해 성경이 아닌 "인간이 고안해낸 것들" 위에 그 관습들을 정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었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중세 가톨릭이 범한 오류를 개신교 역시 또 다시 반복했다.

성직자 중심 개혁의 한계

개혁자들이 처음엔 '만인제사장'을 주장하며 제법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 정신이 흐려졌다. 칼뱅은 '설교'와 '세례'와 '성찬'이 회중이 아닌 목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는데 이게 가장 치명적인 변질의 갈림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역들이 목사에 의해 시행되는 자체는 결코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런 사역들을 오직 '목사만의 독점적 사역'으로 규정한 게 큰 실수였다. 교회의 일상적 사역들이 더욱 목사에게 집중되었다.

그래서 표면적 이름만 '사제'에서 '목사'로 바뀐 것이지 교회의 구조적 악습은 크게 개선되지 못 했다. 다소 심하게 표현하자면 개신교에서도 중세 교회처럼 소수 성직자들에 의한 '교권 찬탈'과 '교권 독점'이 또 다시 반복되었다. 사실상 평신도는 또 다시 예배용 관객으로 밀려났다.

루터 또한 칼뱅처럼 목사를 구별되고 고귀한 직책으로 간주했다. 그는 "천국의 열쇠가 모든 신자에게 속했다"고 제대로 이해했지만, 실제 그 열쇠의 사용은 오로지 교회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목사)에게 국한하는 오류를 범했다. 아마 이런 인식이 16세기 종교 개혁의 태생적 한계였는지 모른다. 그것은 결국 성직자 중심의 종교 개혁이었다.

더구나 한국교회에서 이런 잘못된 인식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한글 번역 성경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에베소서 4:11)." 여기 한글 성경에 단 한 번 나온 이 '목사'라는 단어 때문에 많은 신도들은 목사직이 성경에 명시된 직분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성경 원어의 '포이멘'은 '목사'가 아닌 '목자들'이란 번역이 더 정확하다. 원어에는 우리가 현재 운용하고 있는 의미의 '목사'란 단어나 직분은 없다. 또한 그 '목자들'이란 직분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활과 기능이었는지 추가적 설명조차 없다.

아무튼 현대 교회에 와서 제왕적 담임목사 제도의 문제점은 더욱 크게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목사직이 구약의 제사장을 승계한 걸로 오해하고 무조건 순종을 강요한다. 하지만 개신교의 목사직은 결코 제사장 직분이 아니다.

목사는 "약간만 개혁한 가톨릭의 사제"

물론 가르치는 장로의 역활로서 목사직을 이해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누구 마음대로 현재처럼 다른 장로나 교사 이상의 과도한 특권과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 주었는지 그 근거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담임목사들은 교회의 사업, 운영, 인사, 행정, 그리고 재정 등 거의 모든 일에 직간접으로 간여하며 왕처럼 월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터무니없이 부당한 관행은 반드시 고쳐야 마땅하다.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직자' 신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별도로 성직자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사도들조차 형제로 대했다. 모든 성도들이 이미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인데 무슨 중간자 역활의 성직자가 따로 더 필요했을까.

그럼에도 불과 500년 전에 신설된 목사직은 현재 개신교에서 가장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직분 제도다. 하지만 성경엔 이 제도의 필연성과 절대성을 보장해주는 결정적 단서나 증거는 별로 없다.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교리적으로는 만인제사장 실현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교권적으로는 신자가 제사장임을 회복하는 일에 크게 실패했다. 과거 한때 초기 개신교는 가톨릭과 동조하여 이단 처형의 칼을 함께 들고 무고한 아나뱁티스트(Anabaptist)들을 무수히 많이 학살했다. 그 가장 큰 내면적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평신도의 제사장적 교권 회복'을 저지하기 위한 폭력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심히 부끄러운 비극이다.

오죽하면 프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는 "개신교 목사는 약간만 개혁한 가톨릭의 사제일 뿐이다."고 혹평했을까. 심지어 저명한 시인 존 밀턴도 "새 장로는 옛 사제를 크게 썼을 뿐이다."고 하며 개신교 목사 제도를 냉소적으로 비웃었다.

여하튼 이제 어떤 교회는 목사의 포로가 되었다. 어린 아이부터 장로까지 그저 담임목사의 설교와 지침대로 따라가는 기이한 교회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교회의 설교직을 너무 교권화하고 우상화한 게 아닌지 진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평신도 설교 시대를 열자

혹자는 탄식한다. 목사 하나 먹고 사는데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필요하다. 신학교 몇 년 공부한 걸로 평생 귀족처럼 먹고 살려 한다. 설교는 무성한데 말씀이 없다.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다. 예배당은 화려한데 정의가 없다. 교제는 많은데 사랑이 없다. 교인은 많은데 제자가 없다. 도처에 맹신도 투성이다.

그래서 목사가 바치라면 마냥 바치고, 목사가 세습하자면 그냥 세습한다. 유독 한국교회에만 빈발하고 있는 망국적 교회 세습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우린 지금 심은 대로 거두고 있다. 어떤 목사는 교회의 지고무상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목사직 자체가 성경 정신에 어긋나는 직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본래는 교회가 매우 유익한 목적으로 만든 중요한 직분이다. 신실하고 헌신적인 목사도 아주 많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그걸 운용하는 과정에서 일부 교권주의자들이 반기독교적인 직분으로 꾸준히 변질시켰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설교자들이 교회를 지배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 강단을 장악한 사람들이 교권을 지배했다. 설교는 권력이다. 설교자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항상 옳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 독점을 방지하지 못 한 교회는 순식간에 변절할 수 있다. 요즘 강남의 상당수 대형 교회들이 그 생생한 증거다.

그러나 설교는 전도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 된다. 설교는 단지 특정 직분의 틀 속에만 가둘 수 있는 기능적 사역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직업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다. 앞으로 교회는 평신도 설교자를 더욱 활용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다.  

세기의 전도자 무디나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운 스펄전은 평신도 설교자였다. 스펄전은 16세가 되던 1850년 프리미팁 메소디스트 교회에서 한 평신도의 설교를 통하여 회심을 체험했고, 불과 18세의 나이에 워터비치 침례교회의 설교자로 부임했다. 그리고 22세에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소속된 공동체가 인정하는 경우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원하는 성도는 원칙적으로 누구나 설교할 수 있어야 옳다. 물론 일정 수준의 심사는 꼭 필요하겠지만 누구도 이를 함부로 제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교회에 '성도'라는 이름보다 더 높고 고귀한 직분은 결단코 없다. 모든 성도는 주님께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신 성령이 있기 때문에 아무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요일 2:27, 현대인의 성경)."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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