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브루그만, "천국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곳"
월터 브루그만, "천국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곳"
  • 신기성
  • 승인 2017.12.21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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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뉴스앤조이=신기성 기자] 하워드 대학교 신학 대학 설교학 교수인 케냐타 길버트(Kenyatta Gilbert)교수와 컬럼비아 신학교 명예교수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대담을 갖고 “현 시대에 있어서 선지자적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길버트 교수가 주로 질문을 하고 간간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으며, 브루그만 교수가 주로 대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길버트 교수는 먼저 “선지자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이에 브루그만 교수는 하나님의 뜻이 어긋나는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라고 답했다. 우리는 심판과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구약 선지서에는 항상 심판과 희망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같이 가지고 있지만 자주 이 희망 부분을 놓친다고 답했다.

이 두 학자는 인간의 삶이 곤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참여할 때만 사랑받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선지자적 목소리란?

오늘날 선지자적 목소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팻말을 들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일까? 강단에 서서 “하늘의 신령한 것과 이 땅의 기름진 것을 넉넉히 받을 비법”을 선포하는 것일까? 사탄이 앗아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령한 언어로 기도하는 방법을 전수하는 것일까? 성경에 금한다고 스스로 믿는 것들을 증오하고 배척하기 위한 열심을 내는 것일까? 죽도록 충성하면 하늘의 상급이 클 것이라는 공공연한 비밀(?)을 가르치는 것일까?

브루그만은 이렇게 정의한다. “선지자란, 예를 들면, 하나님의 목적과 모순되는 정치 경제 체제를 분별하고, 만약 사회 제도가 하나님의 목적과 어긋난다면, 결말이 좋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경제적 부정의나 환경의 남용에 관한 실상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이 길이 재앙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그런 길이 재앙을 불러오는 길이었고 내 생각에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그런 재앙을 불러오는 길이라는 것이죠. 선지자들은 놀랍게도 정의, 평화, 안전, 복지에 관한 대안적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대에 살았지만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고 선지자라고 하면 오늘날에도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회 정치에 관해

길버트는 “다원주의에 관한 생각은 어떤가? 모두가 같은 이해의 범주에 있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이에 브루그만은 우리가 교리에 관해 말한다면, 우리는 같은 범주에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가능성, 상처, 고통, 고난 등을 다룬다면,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보수든 진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명백한 실상은 부정할 수 없고 무엇이 그들의 고난을 초래하는지, 어떻게 그것들을 고칠 수 있는지, 우리의 정치 경제 정책들은 어떻게 고쳐나갈 수 있는지 얘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늘날에 외칠 선지자적 외침은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대통령 하에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경제 정책들이 실시되고 있으며, 부자들을 위한 규제 완화를 탐욕적 권력가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다. 실제로 상하원 통과를 앞두고 있는 공화당 세제 개혁안은 앞으로 1조 5천억 불에 달하는 연방 재정 감소를 예상해야 되며, 이 부분은 미국 내에서 최고 부자 계층의 세금을 감면해 주는 결과에 따른 것이다. 향후 저소득층의 세금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정부 혜택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 부족분을 매울 것이 자명해 보이고, 경제가 트럼프 정부의 장담처럼 좋아지지 않는다면, 부족분은 휠씬 더 늘어날 것이다.

이에 관해 길버트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 여기에서 사람들의 고통에 관해 얘기한다면, 미국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시키고 소외시키는 환경이 더 심화되어가고 있는데, 특권층과 박탈당한 사람들 사이에 고난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개입하심은 어떤 의미가 있죠? 하나님이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분이시라면 그분은 이 일을 어떻게 다루시고 바꾸실까요?”

브루그만은 하나님이 분명히 개입하시지만 그 분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주장한다: “나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이 변화를 만들어 낼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설교의 요점은 하나님의 희망은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적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보는 능력을 의미한다.”

 

선지자는 타고 나는가?

길버트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사람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지정되거나 혹은 특별한 사람이 태어난다고 보는지 아니면 보통 사람들이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서게 되는지를 물었다.

브루그만은 둘 다를 긍정했다. 마틴 루터 킹 같은 경우는 아주 특출하고 하나님이 독특한 방식으로 보내신 사람이다. 그는 현재의 윌리암 바버(William Barber)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들도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성경을 보고, 같은 비전을 꿈꾸며,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지자적인 삶을 일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미뤄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길버트는 희망이 고난으로부터 나온다고 확신한다. 그는 희망은 용기에 뿌리를 둔다고 생각한다. 서로 사랑하고, 개성이 인정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그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얘기한다.

 

'이미'와 '아직 아님'

브루그만은 구원론에 관한 ‘이미’와 ‘아직 아님’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을 밝힌다. 그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하늘나라'의 선상에서 ‘이미’와 ‘아직 아님’에 대해 이해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루그만은 말하기를, ‘아직 아님’이라는 문구에서 이루고자 하는 그것은 현재의 사회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미래의 사회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방향을 뜻한다. 따라서 ‘아직 아님’을 천국으로부터 탈출시켜야 한다. 선지자적 약속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세상"(미 4:3)이지 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새로운 사회 경제 질서를 창조하는 일이며, 고대 선지자들이 세상의 질서를 새롭게 하고자 한 일과 같은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희망이 천국에 가기 위한 현실도피에 너무 치중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물론 그는 내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너무 내세에만 몰두해서, 현세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부정의와 불의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NT Wright)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사회 정의나 경제 정치 체계에 관한 문제는 교회에서 다루지 않아야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관심이 오직 영적인 것과 내세에만 몰려있다는 비판을 했었다.

길버트는 당신은 하나님이 정말 지금 여기에서 피조물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가 물었고 이에 대해 브루그만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비유도 그런류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하늘나라에 관해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천사들이 하프를 연주하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을 묘사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나, 같은 일당을 지급 받는 종들처럼 이 세상의 이미지들을 사용해서 설명하셨다. 특히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장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말씀하셨다고 단언한다.

브루그만은 덧붙여서, 요한의 제자들이 그가 메시아인지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상기시킨다. 뭔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교수는 대화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어긋나 있는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고통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일할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며, 하나님은 그런 선지자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바로 내가 그런 선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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