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한해의 특별한 축복
평범한 한해의 특별한 축복
  • 정주성 목사
  • 승인 2018.01.04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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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2018년 새해를 맞이해 창세기 26장 1-9절을 본문으로 ‘평범한 삶 속에서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주제로 전한 뉴욕 나무교회 정주성 목사의 설교를 소개한다-<편집자 주>
정주성 목사 @ <미주뉴스앤조이>

지난 주간 방송사마다 올해의 연기대상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올해를 빛낸 사람들, 올해의 사건들을 거론하며 한해를 돌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올 한 해를 가장 멋지게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경에도 빛나는 삶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늘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 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드라마틱한 영화가 몇 편 나올 수 있고, 야곱이나 요셉도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의 생애를 영화로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아버지보다도, 자신의 아들보다도 훨씬 더 장수하며 18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살았지만 이삭의 생애는 사실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삶을 살았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을 통해 주도적인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삭은 결코 주도적인 인물이 못되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은 자기 앞에 문제가 놓여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면으로 부딪히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기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기보다는 ‘회피’하는 것으로 긴장상황이나 갈등상황을 피해갔습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이 그랄 골짜기에서 장막을 치고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는데 그랄의 목자들이 와서 자기들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러자 이삭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그들과 다투지 않고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딴 곳에 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또 그들이 찾아와 또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이삭이 어떻게 해요? 또 내주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뭐라고 부릅니까? ‘바보’라고 부릅니다.

이삭의 이러한 태도는 자식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서가 나이 들어 부모의 의사에 반하여 이방인인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에도 이삭은 마음에 근심만 했을 뿐 권위 있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꾸짖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안 된다!”라고 강하게 말해야 할 때에 자식에게조차도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한 소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면을 많이 갖고 있을 것입니다. 남을 의식하느라고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늘 묻어두고 살아갑니다. 다투는 것도 일단 피하고 그러다가 상황이 지나가고 일이 다 끝나고 나면 후회와 아쉬움을 피력하곤 합니다

 

‘이삭은  늘 실수하고 넘어지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대개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면보다는 나쁜 면을 쉽게 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삭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보다는 아버지의 실수를 배웠던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도 똑 같이 넘어졌습니다.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창26:7).

더욱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창26:3-4)을 들은 직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보다는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던 참으로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의 실패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작년에 실수한 것을 또 반복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삭은 영적으로도 예민한 감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더딘 사람이었습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하였을 때 그들이 태안에서 요동하는 것을 느낀 리브가와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이삭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여 장자인 에서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더 사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처럼 갈등을 회피하고 타인에게 늘 자신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갈등을 최소화하며 수시로 포기하곤 하는데 이로 인해 본질적인 필요들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때로는 그리 중요치 않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그것을 대체한다고 합니다. 이삭이 음식을 탐하는 미식가였고 그래서 에서를 더욱 사랑하였는데 결국 그 먹는 것으로 인해 야곱에게 속고 말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알콜 중독증, 인터넷 중독증, 성 중독증 같은 중독증이 도전적인 사람보다 의외로 착하고 순응적인 사람에게서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예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늘 자기 생각에 갇혀 있었고, 세상의 관습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탐식을 좇는 속물적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늘 내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말씀 위에 두려고 합니다. 말씀에 따라 결단하고 순종하기보다는 관습과 세상의 흐름을 따르는 것으로 안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삭은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삭에게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여행하는 어린 이삭은 신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단을 쌓은 뒤 이삭은 알았습니다. 자기가 바로 제물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자기를 결박하여 제물로 드리고자 했을 때 이삭은 자신을 들어 올리는 아버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가 행하고 있는 일이 정신이 잠시 나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자신의 가슴을 열고 아버지의 칼을 받아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높이 쳐들었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칼을 거두어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도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어린양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진짜 어린양은 그때 발견된 어린양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시되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그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했듯이 이삭도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무런 저항 없이 번제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믿음의 족장들 가운데 이삭이 가장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평범했던 사람은 아마 안드레였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먼저 제자가 되었지만 그가 인도한 베드로나 요한에 비해 눈에 띄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에 관해 인상적인 유일한 사건은 그가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로 인도(요6:8-9)해 준 일 뿐입니다.

빌립도 안드레나 마찬가지로 탁월한 재능이나 조건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진리에 목말라하는 마음과 헌신하려는 자세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나를 좇으라”(요1:43)라고 하신 두 마디 말을 듣고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안드레가 곧장 베드로를 찾아갔듯이 곧장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평범한 두 사람 안드레와 빌립이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드레와 빌립은 후에 요한복음 12:20-22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 중에 유대교를 믿는 헬라인 몇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빌립에게 예수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안드레와 빌립을 지목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드레나 빌립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친화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에게 그들은 인도했고 이로써 그들은 헬라인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즉 그들로 인하여 이방세계로 향한 전도의 물꼬가 열린 것입니다. 안드레와 빌립이 행한 이런 사역을 우리는 ‘링크 사역’이라고 합니다. 그들 스스로는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는 못 했을지라도 그들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교회 내에서 이런 링크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시작부터 많은 약점을 안고 출발하고 있습니다. 한 해 한 해 경험과 반성이 쌓여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끌려 다니는 인생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인 분별력도 약합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설사 안다 해도 순종하지 못할 때도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삭은 180년의 기나긴 세월을 살았지만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의 그 웅장한 이야기에 비해 성경의 한두 장을 겨우 채우는 아주 평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비록 그가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같이 산악처럼 장엄하고 파도처럼 요동치는 생애는 살지 못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을 물려주셨고, 자신을 일컬어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며 이삭의 이름을 당당히 밝혀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근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하여도 하나님 앞에 그 인생이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밖의 크고 놀라운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나처럼 소극적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척 유능하고 전도양양한 사람이었는데 성공의 절정에서 돌연 사임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임한 이유는 바로 자기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자폐아로 자라고 있는 아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는 세상에서 어떤 성공을 하더라도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공을 향해 달리던 그 자리를 버리고 자기 아들을 돌보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 아이의 삶의 의미를 함께 찾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자기의 모든 것을 그 아이에게 쏟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 같은 결정일지 몰라도 이게 바로 진정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이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있을 때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자폐아일지라도,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장애아일지라도 그 존재 자체로 인해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저는 마음 깊이 좌절을 느낄 때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스바냐 3:17에 곡을 붙인 찬양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나를 향한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지만 하나님은 이보다 훨씬 더 우리를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쁜 행동을 한다고 해서 사랑하시고, 미운 행동을 한다고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거지 나사로를 기억하십시다. 거지 나사로가 일생동안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했습니까?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았습니까? 그는 그저 거지로서 부잣집 문밖에서 빌어먹었을 뿐입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영광을 보지 못하고 저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하루하루 믿음으로 견뎠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환영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올라갔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가 되었습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는 어떻습니까? 그녀가 이 세상에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고, 그녀가 성전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여한 바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보잘것없는 두 렙돈을 드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돈은 자기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돈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못되고, 탁월한 사람도 못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하나님’되심을 기뻐하셨듯이, 우리 주님께서 누구보다 먼저 안드레와 빌립을 부르셨듯이, 평범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기쁨으로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자신의 생애가 평범하다고 절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평범해서 지친 분이 계십니까? “나는 내가 싫어요”, “나는 재 자신에 대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라고 외치며 절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영광의 눈을 들어서 우리의 아버지를 보십시오. 지금도 잠잠히 너를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랑 앞에 나오십시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인 이 순간, 삶의 열매가 없어 초라함으로 채워진 현실로 인해 자책의 눈물을 흘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무대 위에서 작은 배역을 부여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별것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작은 배우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께서 부르신 삶에 충성하십시오. 아브라함처럼 부르셨다면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삭처럼 부르셨다면 이삭처럼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삭처럼, 안드레와 빌립처럼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올 한해도 우리를 기뻐하셨음을 믿고 늘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주성 목사 / 나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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