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리 개척, 욕망에 짓밟힌 교회의 비극
근거리 개척, 욕망에 짓밟힌 교회의 비극
  • 마이클 오
  • 승인 2018.01.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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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기획] 미주한인교회를 진단한다 - 3
<미주뉴스앤조이>는 신년 기획으로 ‘미주 한인교회 진단’ 기사를 기획했다. '설교표절', '청빙문화', '근거리 개척' 등 총 3부분에 걸쳐 시리즈 진행되는 기사 중 세번째로 '근거리 개척'과 관련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src: http://vietbao.vn/vi/Xa-hoi/Chap-nhan-su-khac-biet/75287169/124/>

[미주뉴스앤조이(LA)=마이클 오 기자] 목회자가 비위로 인하여 사임을 하게 되면, 항상 공식처럼 따라붙는 수순이 하나있다. 바로 개척이다. 비위 사실에 대한 뉘우침이나 책임을 지려는 자세와 성찰의 시간보다는, 재빠르게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여 자신의 영향력과 특권을 회복하려는 행보를 바라보고 있으면 씁쓸함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사임 후 개척이라는 유쾌하지 못한 행보를 더욱 지저분하게 만드는 수식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근거리’ 개척이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어쩔수 없는 선택인지 알수는 없지만, 사임후 개척을 하는 목회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이전에 시무하였던 교회의 지척 거리에서 보란듯이 새로운 교회의 문을 열곤 한다. 

이러한 몰지각한 목회자들의 행보는 기존의 교회 교인들에게 실망과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지켜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도 교회 전체를 향한 비판과 폄하를 부추기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미주 뉴스앤조이>는 신년 특별기획으로 목회자들의 근거리 개척 사례와 폐해을 살펴보고, 그 원인과 해법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

 

최근 근거리 개척 사례

지난 한해 미주 교계에 충격을 주었던 두 건의 표절 사건은 보란듯이 근거리 개척으로 이어졌다. 뉴욕 퀸즈한인교회에서 시무하였던 이규섭 목사는 설교표절이 불거지자, 7월 9일 재빨리 사임을 발표하고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동안 잠잠하던 그는 10월 8일 날짜로 제자삼는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을 하였다. 불과 10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임 후 개척까지 90일간의 기간동안, 참회나 자숙의 시간을 가지는 대신, 본교회의 교인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회유를 하며 부지런히 개척을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이규섭 목사는 100여명의 개척 멤버를 모으고, 나름대로 안정적인 개척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댓가로 본교회의 교인들은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의 고통스러운 갈등과 내분을 겪어야 했다.  

아틀란타 쟌스크릭 한인교회에 시무하였던 이승훈 목사의 표절사건도 앞서 있었던 이규섭 목사 표절사건과 판박이처럼 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초부터 표절시비에 시달리던 이승훈 목사는 10월 19일 돌연 사퇴선언을 하였다. 이에 당회는 5일만에 사표 수리를 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 되는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승훈 목사는 사퇴 바로 다음주부터 본교회 인근의 기도원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주후 장소를 옮겨 본교회에서 불과 6마일 떨어진 곳에서 교회 개척을 감행하였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이규섭 목사의 90일, 10마일 이내 개척이라는 기록을 넘어 더욱 신속하고도, 밀착된 개척을 한 것이다. 이를 지켜보았던 쟌스크릭 한인교회의 교인들은 이승훈 목사의 주도면밀하고도 치밀한 행보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분위기였다. 

귀책 사유로 사임하면 지역을 떠나는 통례와 달리 인근에 교회를 설립한 이규섭 목사 Copyright ⓒ 2017 M 뉴스앤조이

근거리 개척이 남기는 것들

목회자의 비위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은 교회가, 근거리에 이전 목회자와 분리되어 나온 교인들로 구성된 또 다른 교회와 마주하게 되었을때 경험하게 되는 폐해들은 무시할수 없을만큼 심각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우선 근거리 개척으로 인해 목사의 비위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와 갈등이 마무리되지 않고 지속될 여지가 있다. 근거리 생활권 내에서 함께 살아가는 한인 커뮤니티의 특성상, 지척에 이전에 상처와 갈등을 함께 겪었던 사람들이 또 다른 교회로 공존하게 될때, 교인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상처를 기억하게 되고, 그에 따른 갈등과 불란을 다시 경험하게 될 여지가 항상 따라다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의 갈등으로 인해 분리된 교회 가운데, 또 다른 분리와 잦은 교인들의 이동을 겪는 사례들은 흔히 발견된다. 

이 뿐만 아니라 근거리 개척으로 생겨난 교회와 본교회의 관계 또한 문제가 될수 있다. 표절 사건으로 분리를 겪은 위의 두교회의 사례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갈등 후 분리된 교회가 근거리에 위치해 있을 때, 양쪽의 교회는 불편한 관계 가운데 놓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갈등으로 인한 상처와 마무리되지 않은 감정들로 인하여, 양쪽 교회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경쟁적 관계를 형성하고, 심지어는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조롱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긍정적이지 않은 관계 가운데 놓인 교회들은 건강한 성장을 이루기가 어렵다. 자신들의 신앙과 삶에 집중하기 보다는, 상대방을 의식하고 반응하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근거리 개척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폐해는 교회 전체의 사회적 인식의 저하이다. 실제로 쟌스크릭 한인교회의 표절사건과 근거리 개척을 지켜보았던 아틀란타 한인들의 반응은 매우 냉소적이었으며, 교회에 대한 신뢰가 더욱 떨어진것을 느낄수 있었다는 지역 목회자들의 전언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원인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비위 목회자 개인의 윤리적 해이와 신앙의 타락만으로 이 모든 현상을 설명할수 있을까? 문제의 심각성과 함께, 이러한 일들이 지속적으로 되풀이 된다는 것을 염두해 둔다면, 사태의 원인을 좀더 면밀하게 그리고 구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1) 목회자의 욕망

근거리 개척의 이면에는 무엇보다도 목회자의 욕망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확인하기를 원하는 인정욕망을 가진 존재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인정욕망의 충족 수단으로 권력과 지위, 돈과 명예등을 추구한다. 목회자 역시 이러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고 인정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위험에 빠지기가 쉽다. 수많은 성도들에게 관심과 존경을 받고, 교회의 리더로써 상당한 수준의 권력과 지위를 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위치를 상실함으로써 인정욕구를 채울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을 때이다. 올바른 목회자라면 이러한 사태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서 채움받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수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인정욕망을 충족시키기위해, 상실된 위치와 권력을 회복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더욱 많다.  일단 이러한 유혹에 무릎을 꿇고 나면, 이들은 더이상 신앙이나 윤리적인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맹목적으로 이루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근거리 개척은 자신이 시무하던 곳에서 더이상 자신의 상실된 지위와 권력을 회복할수 없다는 판단이 섰을때 선택하게 되는 차선책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때문에 수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사임후 신속하게 개척을 감행하는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인정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인것이다. 

이러한 목회자들에게 신앙과 교회론, 윤리와 정의 같은 이념들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합리화시키기위한 수사(修辭, rethoric)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가질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설교나 이야기들을 잘 들어보면 논지의 일관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수시로 주장이나 논거가 바뀌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목회자가 더이상 교회나 신앙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교회나 신앙을 이용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2) 교인들의 욕망

근거리 개척은 결코 목사의 독단적인 결정만으로 이루어질수는 없다. 이러한 목회자에 동조하고 그와 함께 교회 개척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룰수 있다는 판단을 하는 교인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목회자를 향한 연민과 순수한 동기로 인하여 개척에 참여하는 교인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교인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와 욕망으로 개척에 참여하기도 한다. 

특히 설교 표절을 옹호하고 그런 목회자를 따라나서는 교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신앙을 통해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엿볼수가 있다. 설교 표절을 옹호하는 주장중에 흔히 발견되는 논리는 설교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좋은 설교란 소위 은혜받는 설교, 혹은 감동이 있는 설교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고방식은 성경적이거나 신앙적이기 보다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에 물든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 조차 철저하게 소비주체로서 자신의 만족과 감동을 위한 것으로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비주체로서 교인과 그들의 신앙은, 자신이 원하는 만족과 감동을 위해서라면 설교자의 과오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설교자는 단지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기술자, 혹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관계 가운데 최상의 미덕은 효율성이지 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교인들이 목회자의 비위사실을 인지하고도 그를 따라 나서며, 근거리 개척으로 인한 각종 폐해와 난관을 감수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러한 목회자를 통해 충족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개인주의적 신앙 때문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3) 개교회 이기주의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물든 목회자와 교인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근거리 개척 뒤에는 개교회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것처럼 근거리 개척을 감행하는 목회자와 교인들 대다수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동기와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가만해 본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교회 이기주의가 없다면 근거리 개척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척으로 인해 겪을 본교회의 어려움과 교회의 위상의 추락 같은 문제를 무시할 능력이 없다면 개척으로 다가오는 신앙적, 윤리적 빗장을 넘을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기주의를 가진 교회는 결국 스스로 자신이 교회가 아님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몸이자 신앙고백 가운데 간직된 공교회로서의 교회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Copyright ⓒ M 뉴스앤조이>

대책

욕망에 눈이 먼 목회자와 교인들의 근거리 개척을 단번에 막을 묘약은 없다. 오늘날의 사회는 종교와 결사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시민 사회이기 때문이다. 근거리 개척이 비윤리적이고 비성경적이라 할지라도, 윤리적, 신앙적 당위성이 법적 효력을 발생시킬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분별한 근거리 개척에 대한 문제점들을 공유하고, 교단과 각 교회에서 미연에 그 대책을 마련하려고 노력을 한다면 어느 정도는 통제와 견제가 가능할수 있을 것이다. 

1) 교단 차원의 법적 근거 마련 

일련의 근거리 개척 사태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놀란 사실중에 하나는 각 교단에 이러한 사태에 대비할수 있는 내규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다. 비록 사회의 공적인 법으로는 개교회의 개척을 막을수는 없지만, 각 교회가 속해있는 교단 차원에서 이러한 폐해를 인식하고, 서로 근거리 개척을 규제하는 내규나 조약을 마련한다면 이렇게 무분별한 개척은 막을수 있을 것이다. 

2) 교회의 깨어있는 의식

근거리 개척이 삐뚤어진 목회자 개인의 일탈로만 가능하지 않고, 다수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그 다수의 의식의 변화와 깨우침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방지할 가능성으로 작용할수도 있다. 이를 위해 보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교회론과 신앙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교육과 소통이 필요할 것이다. 

수많은 교회의 문제들이 소수의 목회자와 리더들에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문제를 막고 해결할수 있는 근본적인 열쇠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교인들에게 있다. 교인들이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보다 건강한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충분하다면, 설사 권력을 가진 리더라 할지라도 그들의 일탈과 비위를 견제하고 제제할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인들 스스로 건강한 교회론과 신앙을 가질수 있도록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 구성원들의 깨어있는 의식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일선에 있는 목회자들의 역할과 목회 방향에 대해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목회자가 나서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방지하는 방식의 목회자는 더이상 이시대에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진정한 목회자라면 교인 각자가 자신들의 신앙과 교회의 주체로 거듭날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러한 섬기고 돕는 목회만이 교회도 살고 목회자들도 함께 사는 길이 될 것이다. 

 

근거리 개척, 욕망에 짓밟힌 교회의 비극

근거리 개척은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위기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제다. 주님의 교회가 더이상 세상의 물결과 어두움을 물리치고 빛을 내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맘몬의 논리와 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근거리 개척이기 때문이다. 

대책으로 목회자의 양심을 끼워넣으려다가 포기를 하였다. 이런 사태를 만들어내는 목회자의 양심에 기대를 걸어본다는 것이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순진한 발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개인의 양심을 논의하기에는 시대의 어두움과 욕망의 광기가 너무 거세다. 

하지만 소망은 여전히 교회에 있다. 목회자와 소수의 리더가 이끄는 교회가 아니라, 성도 각자가 이루고 있는 교회, 그들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죽고 사는 교회 말이다. 그 교회를 이러한 잿더미속에서 다시한번 일으켜야 할것이다. 그것은 결국 모두의 손에 달린 문제이다. 뒤틀린 목회자와 리더가 내어버린 양심과 신앙을,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책임감과 투철한 의식으로 모두가 교회의 주인이 될때, 이러한 비극은 안개가 걷히듯 사라질수 있을 것이다. 

올 한해가 그러한 성도들의 교회, 성도들의 회복이 일어나는 카이로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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