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교회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교회
  • 마이클 오
  • 승인 2018.01.25 0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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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마우교수 칼럼, “How to change hearts on race”
이 기사는 리처드 마우가 여전히 심각한 인종문제 가운데 교회의 역할과 변화의 가능성에 관한 제언을 담은 칼럼으로 Religionnews에 “How to change hearts on race”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이다. 리차드 마우 교수는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최근까지 풀러신학교의 총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미주뉴스앤조이(LA)=마이클 오 기자] 마틴 루터 킹 데이가 일주일전에 지나갔다. 트럼프의 그림자 때문일까? 올해의 마틴루터킹 데이는 왠지 급하게 지나가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굳이 트럼프를 탓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미국의 인종문제는 마틴 루터 킹이 떠난 시대와 별 차이없이 여전히 심각하고도 지난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교회는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더불어 미주 한인 교회와 한국 교회도 이러한 인종차별과 함께, 혐오와 배제, 차별과 구별짓기 등의 동일한 연료로 돌아가는 사회와 교회 내.외부의 갖가지 부조리 앞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앞에 서있다. 

이러한 현실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리차드 마오의 조언을 들어보도록 하자. 

 

시골 목사의 고민과 이야기의

리차드 마우 <출처: 풀러신학교 홈페이지>

한번은 중서부 지방의 한 시골마을의 목사가 나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저는 백인밖에 없는 마을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어요. 가장 가까운 도시를 가려면 한 시간이나 운전해 가야하지요.’ 그는 이렇게 말한 뒤에 이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희 교인들이 진심으로 다른 인종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가지게 할수 있을까요?’

내가 그에게 어떻게 대답을 하였는지 말하기 전에, 우선 내가 어린시절 인종적 정의에 대해 피부에 와닿게 느끼고 생각할수 있게 된 경험에 대해 나누면 좋겠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펜실베니아의 한 교단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곳은 인종차별에 관한 교단의 치리 방침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자리였다. 몇몇 의견 발표에서는 교회가 법적인 문제에 대해 개입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법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합니다.’ 라든지 ‘오직 마음의 변화만이 사회의 변화를 만듭니다’ 와 같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토론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쯤, 한 흑인 대표가 일어나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이곳까지 운전하여 왔다고 운을 떼었다. 그는 여행중에 그들에게 음식을 팔 식당을 찾기위해 하루종일 다녔지만, 한곳도 발견할수 없었다고 이야기 하였다. 한 여종업원은 식당에 자리가 텅텅비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앉을 테이블을 안내해달라는 요청을 무시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그가 남긴 말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그 여종업이 우리를 사랑해주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에요. 하지만 그 상황에서 우리는 사랑을 요청한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치즈버거를 원했을 뿐이에요.’ 

이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으로 제도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 이후 수십년이 지난 후에는 상당한 제도적, 법적 개선을 이루는 성과를 누릴수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그 식당 여종업과 같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 부부와 같은 사람들에게 자리와 함께 따뜻한 치즈버거를 제공해야할 법적인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이야기와 마음의 변화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여종업원들이 식당에서 흑인 부부들에게 좀더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할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더구나 이 여종업원이 설사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들, 그녀의 마음이 더욱 사랑으로 가득차 있을 확률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은 황인종, 흑인, 백인, 누구든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해요’라는 찬양을 벌써부터 배웠을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구절에 대한 설교를 들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찬양과 설교가 우리가 ‘영성 수련’이라고 부르는 영역에 깊이 뿌리 내리지 않는 한, 결코 충분하지 않다. 반세기에 걸친 제도적 개선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문화 가운데 강력하게 작동하는 끔찍한 인종우월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인종우월주의는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저런 교의들이 쉽게 뿌리내리는 인간 영혼의 깊숙한 내면에 대해 끊임없는 주의와 괌심을 가져야 한다. 

<출처:https://tribune.com.pk/story/405951/history-lesson-the-role-of-christianity-in-creating-racism/>

부조리에 대항하는 교육의 장소로서 교회

고인이 된 하버드 대학교 신학과 교수 로날드 티만은 그의 저서를 통해 각 교회들은 공적인 삶에 있어 필요로하는 인격을 기르고 추구하는 공동체로서 ‘공적 덕목의 학교’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그동안 이루었던 법적, 제도적 개선이 너무나도 쉽게 무시되거나 뒤집혀질수 있는 가능성이 실제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각교회가 이러한 ‘학교;의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는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법적인 뒷받침이 없는 사랑은 충분치 않지만, 우리의 법과 제도적 유익이 유지되려면, 사랑의 마음은 필수적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시골마을 목사가 조언을 구하였을 때, 나는 그의 고민에 도움이 될만한 유용한 기술이 제법 있다는 데 착안을 하였다. 그는 교회의 젊은 교인들을 대도시에 있는 교회의 교인들을 만나게 하여, 그들에게 시골교회 교인들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줄수 있는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그 내용을 스마트폰을 통해서 5분짜리 비디오로 만들어 그들의 교회에 보여줄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 대도시 교회의 교인들도 시골 교회 교인들로부터 비슷한 비디오를 만들어 자신의 교회에 보여줄수도 있을 것이다. 

그 흑인 대표가 교단 모임때 나눠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의 청소년기 자아에 미친 영향은 동정심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 흑인 부부와 같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동일한 서비스를 받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후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동정심을 가지기 시작한) 많은 사람들이 남부에 있는 식당에서 이러한 일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치즈버거를 사먹을수 있게 하는 일은 민권운동에 있어 중요한 첫 발걸음이기도 했다.) 정의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영성형성에는 이러한 동정심을 이끌어낼수 있는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이 시대와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실제로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5분짜리 스마트폰 비디오를 만드는 것은 그리 급진적인 계획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려와 고민에 대한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첫걸음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작은 시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마음’의 변화들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 전체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동인이 될수 있다. ‘변화된 마음’ 하나만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에는 충분치 않을수 있다. 하지만 정의는 이러한 ‘변화된 마음’없이는 결코 오래 지속될수 없다. 

(원문출처: http://religionnews.com/2018/01/23/how-to-change-hearts-on-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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