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깨어있는 사람들
불의에 깨어있는 사람들
  • 최태선
  • 승인 2018.01.26 0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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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이니 꽤 오래 전 이야기이다. 학기 초마다 학교에서 뗘오라는 서류가 있었다. 대부분은 아버지가 뗘다 주셨지만 가끔은 아버지를 따라 동사무소를 같이 가는 경우가 있었다. 동사무소에 들어가면 창구가 아니라 동장실로 들어갔다. 동장실에 앉아 있으면 동장이 동직원을 불러 필요한 서류를 알려주고 준비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 아버지와 동장 그리고 나는 다방에서 시킨 커피를 마셨다. 물론 나는 커피가 아니라 밀크를 마셨다. 그걸 우유라고 하면 무식한 것이다. 설탕을 듬뿍 넣고 데워 우유 껍질이 생긴 그 밀크의 맛이란 세상의 어느 맛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동직원이 서류를 뗘오면 그것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동사무소에 가는 일이 정말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릴 적 그 즐거웠던 추억이 추악한 특권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내게 부각되었다. 그것은 특권일 뿐만 아니라 새치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우리는 동장실로 들어가 새치기를 한 것이다. 그것도 동장의 환대를 받아 커피를 마시며 기다림의 지루함까지 잊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릴 적에 나는 이미 권력의 맛을 알았고 무의식중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특권이며 새치기이며 불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그다지 많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역시 내게는 큰 은총의 시간이었다.

나는 공군 장교로 병역의 의무를 마쳤다. 서울이 근거지였던 나는 주말에 서울에 올라왔다가 월요일 아침에 대전에 있는 부대로 직접 출근하는 경우가 잦았다. 첫 고속버스를 타면 여유가 있었지만 두 번째 차를 타면 내려서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에는 직접 대전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군인인 우리들은 이른 차표를 구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크게 늦지만 않으면 앞줄에 언제나 공군들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할인권을 건네주기만 하면 줄을 서지 않고도 표를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앞에 서 있는 공군에게 내 표를 부탁한 적이 없다. 새치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새치기로 생각하는 공군은 한 사람도 없었고 또 그것을 항의하는 민간인들도 없었다. 곤란한 것은 내가 앞쪽에 서 있을 때 다른 공군들이 다가와 할인권을 주며 표를 부탁하는 경우였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뒤에 가서 줄을 서라고 했다. 그런 나를 쳐다보는 공군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것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계급이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겁이 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상한 공군이 되었다.

이제는 그런 특권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은행이나 백화점의 VVIP 회원은 어렸을 적 동장실에 앉아서 볼일을 보았던 나처럼 직접 다니며 볼일을 보지 않는다. 그 어려운 주차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이클 센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특권들이 어떻게 돈에 팔리고 있는지를 자세히 묘사한다. 특히 미시건 대학 경기장의 스카이 박스를 미국 민주주의의 붕괴의 예로 들고 있다. 그의 책은 돈이 어떻게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불의를 정상으로 만드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세상의 불의를 보고 거기에 저항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특권과 새치기를 얼마나 즐기고 생활화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습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세습은 특권이며 새치기이다. 작은 교회의 세습도 다르지 않다. 그 교회에 오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세습은 특권이며 새치기이다. 그렇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모든 특권과 새치기를 거부하는, 다시말해 세상의 불의에 깨어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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