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적, 기적의 일상, 신순규 YANA 선교회 이사장
일상의 기적, 기적의 일상, 신순규 YANA 선교회 이사장
  • 신기성
  • 승인 2018.01.2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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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공인 재무분석사(CFA) 신순규의 나눔과 섬김의 삶
신순규 이사장

[미주뉴스앤조이(뉴저지)=신기성 기자] 신순규 YANA 선교회 이사장은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공인재무분석사(CFA)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하버드와 MIT 출신이며 JP 모건(JP Morgan & Company)을 거쳐서 현재는, 세계적인 투자은행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Brown Brothers Harriman & Company)에서 근무하고 있다. 2012년 10월부터 2015년 8월까지 시각장애인 점자 컴퓨터로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월가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가 전하는 일상의 기적』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화려한 이력과 수식어보다는 평범한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로 일상을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도 남몰래 선행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9살 때 녹내장과 망막박리로 시력을 잃게 되었다. 어려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열세 살에 떠난 미국 공연 중 오버브룩 맹학교(Overbrook School for the Blind in Philadelphia)의 초청을 받았고, 15 살에 미국에 홀로 유학을 오게 된다. 그는 오버브룩 맹학교를 다니던 중 학업의 진도가 일반 학교보다 뒤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뉴저지 주 뉴튼(Newton)에 있는 키타티니 고등학교(Newton Kittatinny Regional High School)로 전학하여 열심히 공부를 한다. 대학 지원 결과 하버드, MIT, 펜실베니아 등 최고의 IVY 리그 학교들에 동시 합격 통지를 받고, 특히 하버드와 펜실베니아 대학에서는 ‘전국 장학생(National Scholar)’과 ‘벤저민 프랭클린 장학생’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은 MIT에서 조직학을 공부하고 박사과정을 밟던 중 월스트리트에서 인턴 과정을 하게 되고 결국 공인 재무분석사로 활동하기에 이른다.

신순규 이사장의 저서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그는 책 서문에서 자신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불행으로 여겼던 적은 몇 번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평을 수없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비록 백일도 되기 전에 녹내장에 걸려 시력이 좋진 않았지만, 만 일곱 살이 될 때까지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구슬치기, 딱지치기, 전쟁놀이 등을 하며 평범한 유년 생활을 보낸 것을 감사한다. 눈 수술을 받느라 병원에서 자주 생활한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어린아이의 삶이었다고 회상하며 그 평범한 어린 시절을 감사한다. 9살 때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었지만 예민한 10대가 되기 전에 시력을 완전히 잃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기록했다. 그는 시력을 잃었지만 남들이 볼 수 없는 소소한 일상의 의미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루 24시간만 볼 수 있다면 그가 해 보고 싶다는 일은 시력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주 평범한 하루이다. 그의 책 서문만 읽어도, 이 평범한 하루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얼마나 특별한 날이 될 수 있는지 신순규 이사장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는 1995년 뉴욕 밀알선교단에서 아내 한근주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슬하에 아들 데이비스와 한국에서 입양한 딸 예진 등 4 식구가 함께 살고 있다. 뉴저지 페얼론(Fairlawn)에 있는 그의 집에서 신순규 이사장을 만났다.

 

한국에 있는 보육원과 연결되어 아이들을 돕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역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2010년 1월이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로 받고 살아서 이제는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40살에 결심을 했었는데 그로부터 3년이 지나 43 살이 갓 넘은 때였죠. 그 때 섬기던 찬양교회 허봉기 목사님의 설교 “누군가의 생명과 풍성한 삶을 위하여”를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허목사님은 그 설교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양들에게, 즉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더 풍성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10:10). 그날 이후로 저는 제가 어떤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에 아내 그레이스와 저는 한국 보육원 아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보자고 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찬양교회 청소년부를 담당하던 황주 목사님은 특히 아이들 목회에 비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2008년 여름에, 황주 목사님이 찬양교회 고등부 아이들과 한국에 단기 선교를 떠났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명 아동 복지센터를 방문해서 그곳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도움을 주고받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보육원 아이들의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한 번 왔다가 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오래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적기 때문입니다. 다음해인 2009년에 다시 찾아온 찬양교회 목사님과 아이들을 보고 마음을 열기 시작했죠. 그 동명 아이들과 찬양교회 학생들이 시골 마을에 가서 여름 성경학교를 개최하고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과정에서 서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황주 목사님을 집에 초대해서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보육원의 많은 아이들이 적어도 부모님 중 한 분은 있지만 경제적인 문제나, 출가, 이혼, 장애 등의 문제로 같이 살지 못하고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2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작 문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육원을 떠나야 되는 상황입니다. 교육과 직업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처럼 사회에 정착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시각장애인과 비슷한 차별을 겪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황주 목사님께 아내와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렇게 시작이 된 거죠.

플라잉 해피니스 2017 사진 (사진출처: YANA Facebook)

 

플라잉 해피니스(Flying Happiness)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동명 보육원 아이들 중 일부와 교사들을 미국에 초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찬양교회 교인 집에서 숙식하며 여행도하고 행복하게 사는 가족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한번 와서 보고 꿈을 갖게 되면 장차 유학을 오고 직장도 구하는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죠.

그래서 2011년에 처음으로 4명의 아이와 2명의 선생님을 초청해서, 그들이 관광도 하고 많은 사람들도 만나고 미국 사람들도 잘 갈 수 없는 뉴욕 연방준비은행 같은 곳도 구경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허봉기 목사님을 비롯한 교인들이 아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집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가진 아이들이기 때문에 가정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YANA 선교회의 시작도 이와 관계가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계속 하기로 결정했지만 한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2012년에는 본격적으로 비영리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 선교단체 이름이 ‘야나 선교회(YANA Ministry)'라고 합니다. YANA는 ’너는 혼자가 아니야(You Are Not Alone)'의 약자입니다.

2016년부터 플라잉 해피니스를 일 년에 두 번씩 실시합니다. 이 YANA라는 단체는 사역이 3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Going', 둘째는, ‘Coming', 셋째는, 'Connecting'입니다. Going은 단기 선교의 경우처럼 우리가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Coming은 Flying Happiness와 같이 그 아이들이 오는 걸 말하죠. 프로젝트 조이(Project Joy)라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이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일하는 걸 보여주고 인턴을 통해 체험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Connecting은 위의 계기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유학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서 12-13살 어린 나이에 유학은 온 학생들이 3명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육원을 떠난 학생 중 3명에게 유학 기회를 줘서 커뮤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4년제 대학교로 편입하는 절차를 진행합니다. 이걸 YSAP(YANA Study Abroad Program)이라고 부릅니다. 처음 온 애가 저희 딸이 된 예진이입니다. 예진이는 온 지 4년이고 10학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온 학생이 이번 봄 학기에 커뮤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편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YANA Family라고, 아이들과 후원자를 연결해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후원자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한 달에 30불씩 저축을 합니다. 한 아이에게 한 후원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 한 명당 여러 명의 후원자가 연결이 돼서 돈을 꾸준히 모아서 십대가 되거나 고등하교 졸업 후 아이가 미래를 준비하는 데 쓸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해 주는 거죠. 하지만 돈 보다 더 중요한 효과를 기대합니다. 그것은 아이에게 관심 갖기입니다. 자기가 후원하는 아이의 사진도 보고, 소식도 듣고, 방문도 하고,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도 하는 거죠. 나중에 아이가 십대가 되고 YSAP등을 통해서 미국에 오게 되면 Host Family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는 과정입니다. 지금 이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곳을 떠나면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일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진학이나 직장을 위해서 집을 떠나도 기댈 부모님이 계시잖아요. 그게 제일 큰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보육원을 떠난 후에도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는 거죠.

 

가난한 나라나 사람들을 지원해 주는 다른 단체도 많이 있죠? World Vision 이나 Compassion 같은 단체들요. 기존의 이 단체들과 차이점이 있다면요?

네. World Vision 같은 단체들은 아주 많은 아이들에게 작지만 공평하고 효과적으로 혜택이 가도록 일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소수지만 선택된 아이들에게 가족처럼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싫어서 스스로 관계를 끊지만 않는다면, 아이들과 평생 함께 가는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아이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저희 가족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현재 YSAP은 6명이 혜택을 받고 있고 YANA Family는 50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이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는 홍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이사들이 기부금을 내서 운영을 해 왔고 모금 활동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 더 알려지고 홍보가 되면 더 많은 아이들이 혜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목적이 가족을 만들어 주는 것이니까 돈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호스트 페밀리(Host Family)가 필요합니다. YSAP은 보통 중학생이 오니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책임을 지고 돌본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YANA에서 학교에 들어가는 돈은 전부 책임을 집니다. 학비, 교통비, 무슨 비용이든 공부에 관계된 것은 YANA에서 다 지불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호스트 페밀리가 감당을 해야 되죠. 칼리지에 오면 한 학기 혹은 두 학기를 하숙생처럼 돌봐야 합니다. 미국에 적응하는 기간에 도움이 되어주는 거죠. 지금 현재 호스트 페밀리가 절대 부족한 형편입니다. 아마 한국 사람들의 문화가 이 부분에서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예진이를 저희 집에 데리고 올 때는, 다른 분들도 많이들 하시겠다고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대 지금 거의 없습니다. 돈보다 이게 더 급한 문제입니다. 이 부분도 홍보가 필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자원자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학교 다닐 때 시각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이 제공이 되나요?

고등학교 때는 주 정부에서 해주는 지원이 있었습니다. 점자 교과서가 제공이 되고 특별한 기계들도 제공이 됩니다. 문제는 대학인데, 대학에서는 꼭 필요한 부분만 해결이 됩니다. 예를 들면 리더들이 책을 읽어 준다거나 녹음을 해서 들려주거나 혹은 스캔을 해서 컴퓨터로 읽어주는 프로그램 등이 제공이 됩니다. 고등학교 때는 제가 안 해도 선생님들이 다음 학기에 공부할 교과서를 미리 점자를 찍는 등 준비를 다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본인이 이걸 다 해결해야 되죠. 그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이 다 알아서 챙겨주는 방식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꾸 의존도가 높아집니다. 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의지나 능력이 점점 떨어지게 되는 거죠.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할 때 그런 면에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선 제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부터가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리더를 고용하고 어느 부분을 읽어야 되는지 알려줘야 했죠. 교과서를 녹음해 주는 단체가 있어서 그 곳에 있는지 알아보고 만약 없으면 책을 보내서 녹음을 부탁해야 하는 일들을 다 해야 되는 거죠. 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잘라서 스캔을 하거나 복사해서 보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르죠. 거의 모든 책이 전자책 버전이 있으니까 그 때 보다는 쉽게 공부할 방법이 생겼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제 시각장애인은 공부에 어려움이 크지 않다고 볼 수도 있죠. 오히려 사람들의 편견이 더 어려운 부분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그리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앞으로의 비전에 관해서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초등학교 때 종교생활 시간이 있었어요. 카톨릭 원불교 개신교 이렇게 3개가 있었는데 그 전에는 종교에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친구들 따라서 교회를 가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15살 대 유학을 결정한 후 절박하게 하나님만 붙잡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새벽기도도 나가고 하나님께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죠.

저는 앞으로 글을 좀 더 쓰려고 합니다. 계획대로라면 이번 연말에 책이 한 권 나옵니다. 매일경제에 한 달에 한편씩 칼럼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릇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에게 하는 거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도구가 되고 싶습니다. 옛날부터 제 삶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거죠. 글을 통해서 그리고 강연을 통해서 이런 비전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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