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금요일 묵상: 십자가 밑에 깔린 인간의 기적
성금요일 묵상: 십자가 밑에 깔린 인간의 기적
  • 마이클 오
  • 승인 2018.03.3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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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가디언지 성금요일 특별 칼럼
Crucified Jesus <Fuller Theological Seminary>
부활절은 성금요일을 통과해야 맞이할수 있는 현실이다. 영광스럽고 감동적인 생명의 부활은 고통과 죽음을 통과하여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도 지구 곳곳에서 이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가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천년전 예수가 당했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천년전이 아닌 오늘, 여기에서 예수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디언지가 바라보는 이천년전의 금요일, 그 시선을 따라가보자. 

“부활 사건은 역사적 연구보다는 억압당하고 실패한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활절이 시작된 순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을 역사적으로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부활 사건을 부정할수도 없으며, 반대로 성경적 근거만으로 그렇게 불가능하게 보이는 사건을 믿으라고 주장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부활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다는 것과, 이 이야기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류 역사를 변화시켜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사건

부정적인 측면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부활의 이야기가 오늘날 반유대주의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부활 이야기 이전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웃에게 특별할것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 가운데 유대인들은 명확하고도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최악의 범죄행위로 여겨져왔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전통적으로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고 여겨져왔던 인물이지만, 그에게는 이 저작의 결과로 일어난 수백만명의 학살에 대한 일정의 책임이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분명 쉽게 떨쳐버릴수 없는 유산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이 이야기의 유일하거나, 심지어 주요한 유산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 이야기는 온갖 종류의 억압과 부조리를 겪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을 주어왔고, 악한 현실 앞에서도 오직 선을 추구할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는 신앙의 의심을 품은 사람들, 영웅적이지 못하고 순교자가 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서구의 진보에 대한 이상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 사이로 끊임없이 침투해 들어갔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절 이야기를 통하여 힘없고 소외된 자들과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 조차 -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는 예수처럼-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명목으로 하는 폭력들

이러한 인식은 로마나 그리스인들, 그리고 심지어는 구약의 이야기들에서 나타난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에게는 웃기는 이야기 일 것이다. 앗시리아인이나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박해할 이유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 아무런 꺼리낌없이 이들을 학살할수 있었다. 전통적인 제국들이 사용하는 잔학한 폭력은 결코 얕잡아볼수 없다. 로마제국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던지 간에, 십자가의 잔인한 공포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림으로서, 그들이 좀더 빨리 질식할수 있게 하는 것이 친절한 행위로 인식되는 공개 처형이 어떠하리라 상상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잔학한 행위가 로마인들에게는 그저 상식적인 수준의 노예관리 방법이라는 것이다. 

소름끼치는 잔학함이 효과적이라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한다. 로마제국은 수백년동안 번성하였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그의 백성을 위해 고난을 받야야 한다는 대제사장의 주장은 특별히 사악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에 관한 것이다.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공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권력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언제나 이러한 결정을 내린다. 어떠한 결정이든 무정부상태에 이르는 것보다는 낫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이들이 비록 성자는 아닐지라도, 오늘날 아프리카 이주민을 지중해 바다에 익사시키는 것이 - (혹은 난민들을 바다로 되돌려보내는 일이 - 편집자 주) - 유럽 사회의 안정을 방해하는 것보다 낫다는 결정을 하는 정치인들보다 더 악하다고 이야기 할수 없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결정을 반기며 고마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다시 선거에서 승리하며,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복음서를 쓰고 또 읽었던 사람들은, 이런 하나 이상할것 없으며 필수적으로 보이는 권력의 실천이 잘못되었다는, 이러한 세상의 방식이 너무나도 부당하다는, 완전히 황당하고도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함으로서 반란을 막고 예루살렘에서 적어도 삼 사십년간의 평화를 만들지 않았냐고 반박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수난과 부활의 이야기는 이러한 논리에 치명적인 의심의 가시를 박아넣었다. 

헬라인들은 “필요는 법을 모른다”는 속담을 이야기 하곤 한다. 어느 정도 우리 모두도 이것을 믿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는 - 비록 희미하게나마 - 이러한 이야기가 거짓이며, 이런식으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상상해볼수도 있다.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도달할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결국 기적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 말이다. 

 

<원문>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8/mar/30/the-guardian-view-on-easter-it-would-take-a-mira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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