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공동체에 뿌리 내리는 교회를 꿈꾸며
지역 공동체에 뿌리 내리는 교회를 꿈꾸며
  • 마이클 오
  • 승인 2018.04.09 0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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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다시 상상하기] (2) - 교회의 지역성
미주 뉴스앤조이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뒤돌아보고 그 가운데 새로운 가능성과 대안을 찾고자, 특별 기획 시리즈 [교회 다시 상상하기]를 준비하였다. 칼럼과 인터뷰의 형식을 통하여 다양한 시각을 소개할 예정이다. 신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각각의 전문 영역에서 교회와 그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진단해보고자 한다. 이번 시리즈를 통하여 교회에 숨겨진 풍성한 의미를 다시금 되찾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Cathedral of Our Lady of the Angels surrounded by 101 freeway in L.A. <zimbio>

[미주뉴스앤조이=마이클 오 기자] 일상적인 교회의 경험은 일정한 공간 가운데 일어난다. 교회를 이루는 조건 중에 하나가 지역성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지역성은 단순한 장소 제공 뿐만 아니라, 그 장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맥락과 관계에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나아가 교회가 세상을 향한 소명 혹은 미션을 가지고 있다는 교회론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기억한다면, 교회의 지역성은 교회됨에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라고 이야기 할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경험하는 교회의 현실은 이러한 교회의 지역성을 좀처럼 확인하기 어렵다. 지역 사회 가운데 교회는 고립된 성처럼 상호 교류가 없거나 피상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기적인 이유로 인하여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이러한 교회와 지역사회의 괴리는 어디에서 온것이며, 어떻게 회복할수 있을까? 당장 현실적인 방안을 기대할수 없다 할지라도, 최소한의 질문과 이해는 현재의 상황에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고민없이 급변하는 도시환경 가운데 위치한 교회의 미래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교회와 지역 공동체 사이를 오가며 이러한 고민과 상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역의 도시 계획국에서 Urban Planner로 근무하고 있는 정광필, 최소연 부부다. 이들이 현장에서 겪은 이야기들과, 그 현실을 통해 바라본 교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들어보도록 하자. 

 

닫힌 교회들

몇년 전, 대중교통을 중심으로 한 지역 개발 계획 프로젝트를 시작하느라 엘에이 근교의 한 도심지역을 여러 번 둘러 보았던 적이 있다. 자동차로 모든 골목길들을 여러 번 돌았고, 주요 도로는 걸어다니기도 했다. 장기 개발계획을 준비하는 경우, 준비 초반부터 그 지역을 다양한 방법으로 파악하고 다양한 stakeholder들과 접촉점을 만들어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상 지역이 그리 넓지 않아서 그런지 활발한 지역 단체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서 일단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연락을 시작했다. 카톨릭 성당, 한인 이민교회, 일반 지역교회, 히스패닉 교회 등 꽤 여럿 있었다. 처음에는 전화를 걸어 메세지를 남기고 이메일을 보내보다가,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답이 오질 않아 field visit을 할 때마다 교회들을 방문했었다. 

교회가 종교적 신념이라는 관념뿐 아니라 공간적인 면에서도 지역사회와 명확히 괴리되어 있는... 

외곽도시(suburbs)가 아닌 도심 한가운데, 프리웨이 근접한 지역, 하지만 저소득층이거나 소수인종 밀집지역은 아닌, 평범한(?) 곳이었다. 교회 한두 곳은 지역 초등학교와도 매우 인접해 있었다. 그런데 교회들 대부분은 주차장부터 문이 잠겨있거나, 건물이 잠겨있었다. 한 히스패닉 교회는 좁은 부지 뒤쪽으로 허름한 건물도 제대로 관리가 안된듯 보였고 그나마 뒤쪽에서 나온 한 사람은 교회 관계자는 아니라 그냥 연락처만 주고 나왔다. 성당은 다행히 리셉션 직원에게 안내지를 건네고 이야기를 좀더 나누려 했지만, “정치적인 사안은 성당 안에서 홍보할 수 없다”며 차후 소통 가능성을 일축해 버렸다. 교회가 종교적 신념이라는 관념뿐 아니라 공간적인 면에서도 지역사회와 명확히 괴리되어 있는 현장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지역 공동체와 분리된 교회

시간을 좀 많이 돌려서 약 백 년 전쯤으로 돌아가보면, 엘에이 카운티의 조닝(zoning)이 처음 쓰여진 것이 1920년대에였다. 그 이후로 규정을 수도 없이 새로 덧붙이기는 했지만 전면적, 대대적인 업데이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된 토지용도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그중 하나가 “부흥회 천막 (revival tent)”용지 이다. 참고로, 엘에이 다운타운의 1920년대 사진을 보면 지금과 비교해도 상당히 낯익어 보이는 건물들이 많을 정도로 번화해 있었는데, 제대로 된 건물 없이 야외에서 열리는 임시 부흥회 행사가 단독으로 조닝 코드에 올라갔고 정해진 조닝에서만 가능했다는 점은, 일단 그런 집회의 규모나 빈도가 상당했고 주변 지역에도 여러가지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상상해 보라. 유명한 부흥사가 오기라도 하면 구름같이 허다한 인파가, 그것도 야외 “텐트” 근처로 몰려들어 쩌렁쩌렁한 설교를 몇 시간이고 듣고 있었을것 아닌가. 

1960년대 전후로 지금과 같은 외곽도시 (suburbs)가 발달하면서, 프리웨이가 건설될 때마다 교회는 “마을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을 잃어버렸다. 

이후 교회 건물은 마을마다, 작은 도시마다 그 중심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고정된 장소성과 함께, 위치의 상징성이 교회 활동을 만들어가기도, 그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교회의 중요한 행사는 곧 마을의 중요한 행사이기도 했으며, 마을단위 봉사활동이나 구조활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전후로 지금과 같은 외곽도시 (suburbs)가 발달하면서, 프리웨이가 건설될 때마다 교회는 “마을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을 잃어버렸다.  사는 지역은 옮겨도 교회는 옮기지 않거나, 반대로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교회는 먼 곳으로 옮기는 사례들이 점점 빈번해진 것이다. 새로 지어지는 교회들의 위치도 프리웨이 접근성 혹은 교회 규모에 적합한 부지가 우선적 조건이 되어갔다. 새로운 공간이 들어서긴 하나 그 공간은 “지역성과 상관없는 멤버쉽”위주로 그 사용이 제한되었다. 서로 상관없는 타인이 되어버린 지역 주민들은 그러한 공간을 “nuisance”로 규정하며 대치하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다시 지역 공동체가 될것인가? 

공간과 지역이 괴리되는 문제는 비단 교회 문제만도 아니고 한두 해 되는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교회라는 특수한 공동체 전체의 윤리를 고려한다면, 이런 괴리가 점점 더 심해지는 현대사회에서 교회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지역과 공존할 것인지 조금 더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교회에서 하는 갖가지 행사들은 주요 대상은 교회 내 멤버들인가, 주변 지역 주민들도 염두에 둔 것인가?  주중에 텅 비어 있는 주차장과 크고 작은 방들이 지역의 다양한 필요에 따라 어떻게 공유될 수 있을까? 근처 지역에 사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삶의 패턴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실제적인 필요를 가지고 있는가? 그들 중 '가장 작은 자', 겹겹의 억압에 가장 많이 착취당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구성원들과 목회자들로 이루어진 내부질서의 수직구조(hierarchy)를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 해야할지를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질문은 공간과 지역성의 물리적 괴리를 참여(engagement)로 해소해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하지만 이 괴리를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도 가능하다. '교회 건물'이 위치한 그 지역 주민들은 과연 교회 구성원들의 직접적인 이웃인가? 예를 들어, 교회에서 20마일 떨어져 있는 구성원이 있다면 그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이웃은 누구일까? 봉사활동이나 종교활동은 꼭 교회라는 물리적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교회에서 열리는 행사나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그 장소까지 정해진 시간에 갈수 있는 구성원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인가? 퇴근길에 혹은 저녁시간에 극심한 트래픽을 뚫고 정기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교회 모임'의 궁극적인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모임들에 정기적으로 참석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커뮤니티와는 어떻게 이웃하고있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커뮤니티에 참여(engage)하며 이웃으로 살아갈수 있을까? 구성원들의 일상 패턴을 “교회”라는 공동체는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적응하며 그 상황을 embody할수 있을까? 한 세대 전과도 판이하게 달라진 구성원들의 생활 패턴, 생활 반경을 고려할때, 그리고 이 모든 영역에서 개인에게 그다지 큰 선택의 폭이 주어지지 않음을 (예를 들면 통근거리나 사는 지역) 고려할때, 교회가 '지역성'을 살리는 방법은 전통적이거나 우리에게 익숙하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라는 공간의 중심성을 (구성원 중심이자, 교회가 위치한 지역 중심), 구성원들과 목회자들로 이루어진 내부질서의 수직구조(hierarchy)를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 해야할지를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중심의 외곽에서 부터 

새로운 접근을 시도할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중심의 바깥에 어떤 이들이 있는지 알아보는 일일 것이다. 인구 분석을 통해 인종별, 연령별, 성별 구성뿐 아니라 교육수준, 주 사용언어, 지역의 환경 오염도, 시대별 인구특성의 변화 등을 알아보는 것도 가능하다. 데이타와 숫자로 파악했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느껴보는 것일테다. 동네를 걸어다니면서 어느 골목에 노숙자가 많은지, 어느 가게가 낮에 북적이는지, 기차역에서 걸어가는 길목에는 어떤 사람들과 가게가 있는지, 또 구성원들이 피부로 접하는 이웃의 얼굴과 그들의 목소리는 어떤지를 경험해보며, 데이타와 숫자 속에 있는 가장 여리고 차별받는 이웃들을 찾아보고 만나보는 일 말이다. 입구부터 굳게 잠긴 게이트를 만날지, 아니면 같이 손 내미는 땀젖은 이웃을 만날지는 경계의 밖으로 걸어나가 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다. 그렇게 교회 밖, 집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일을 통해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 안의 수많은 차별의식을 거두어내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 정광필, 최소연 부부는 Urban Planning 전문가이자 신앙인으로서의 두 정체성 가운데 진동하며 살아가는 부부다. 다양한 도시정책 이슈와 그에 엮여 살아가는 현실적인 신앙, 그리고 공동체로서 그 둘을 담아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축구, 페미니즘, 건강한 먹거리 등에도 관심이 있으며, 두 자녀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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