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4주기, 남겨진 유산을 되돌아보며
세월호 4주기, 남겨진 유산을 되돌아보며
  • 권영석
  • 승인 2018.04.14 06: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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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석 목사 특별칼럼] "세월호의 비극이 남긴 유산"
십자가와 세월호 진실 <사진출처: 국민일보>

세월호의 비극적인 사건은 아직도 그 실체가 다 드러났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팽목항 앞 바다에 빠졌던 배는 건져 올렸지만, 그 배가 왜 빠지게 되었던 것인지, 그 배는 누구의 배이며 그래서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 건지, 또 어째서 인명 구조 작업은 그렇게도 엉망이었던 건지, 그리고 정부는 왜 자꾸 뭔가를 숨기려 했던 것인지..!! 사고는 순간이지만 그로 인한 슬픔을 추스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진실을 은폐하기란 순간이지만 그 진실을 드러내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걸 새삼 상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골든 타이밍의 실기, 진실의 은폐와 왜곡, 심지어 불쑥 던진 말 한마디가 유가족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고, 불필요한 사회적 에너지를 얼마나 낭비하게 하였던지, 그리하여 급기야는 대통령과 각료들을 포함하여 국가와 정부에 대한 불신이 초래되었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대립과 갈등이 조장되어 서로가 반목하며 나아가서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거대한 사태로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하는 것을 우리는 적나나하게 목격해야 했습니다.

드러난 사고 자체는 노후 선박의 부실 운행에 따른 불행한 사고로 분류되겠지만, 그 이후의 구조와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부정과 비리’, 그리고 언론 플레이를 동원한 공권력의 은폐와 조작은 가히 광주 항쟁에 못지않은 혼란을 불러왔으며, 온 나라가 저항의 노란 물결로 뒤덮였다 하겠습니다. 그에 따른 분노와 슬픔이 지난 수년간 차곡차곡 쌓여오다가, 최순실 게이트를 기점으로 촛불로 점화되었고, 이 촛불이 지금은 저간의 한국현대사 속에 누적되어 왔던 독재정치와 재벌경제의 적폐에 옮겨 붙은 양상이라 하겠습니다. 

사건 자체는 사실 아무 말을 못하기 때문에, 그 사건의 의미와 교훈은 사건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위치한 문맥에 의해 결정되게 마련이며, 그 문맥은 또 그 당시로서는 분명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나 사건 이후의 반응과 결과를 종합하여 추론해 볼 수 있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발생 이후 구조와 수습의 책임이 있는 정부의 대처 실상은 우리가 아는 대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으며, 이런 실망이 세월호를 둘러싼 여러 음모론과 의심의 기폭제가 되었고, 그로 인한 사회-정치적 갈등과 혼란이 결국 박근혜 호를 드디어 침몰시키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하겠습니다. 

당사자들이 살아 있고 진실규명이 여전히 진행형인 동안은 객관성이 불충분하여 역사적 평가나 교훈을 들먹이기엔 아직은 이르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희생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고통이 극에 달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더러는 목숨을 끊는 경우들까지 생겨나더니, 급기야 “이게 나라냐?”는 탄식이 광화문 사거리에서부터 국회의사당으로, 그리고 공권력에 포섭된 언론의 편파보도에도 불구하고 진실 규명에 목숨 걸고 뛰어들었던 기자들과 SNS를 통해 전국민에게로 전해지면서 세월호 참사는 어느새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중요한 획을 긋는 핵심 사건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수학여행 길을 안내하던 한 여객선의 전복 사건과, 제주행 한 선박이 좌초한 조난 사고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역사적’ 사건으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불완전하기에 날마다 사건 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고 그래서 고소고발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세월호 참사는 어째서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 그냥 넘겨서는 결코 안 되는 사건으로 떠오르게 된 것일까요?

안개속에 갖힌 세월호 진실 <사진: 다음뉴스>

I.
아마도 이 사건에 불을 지핀 일차적 요인은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명 구조의 실패와 그 책임의 궁극적인 주체인 정부의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대응 방식이었다 하겠습니다. 충분히 구조가 가능했던 황금 같은 시간(골든타임)은 “가만히 있으라” 하는 사이, 구조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상황파악은커녕 보고조차 외면하고 있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흘러가 버렸고 결국 304명이나 되는 승객이 집단으로 차가운 바닷물 속에 수장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있는 그 와중에 선원들은 우선적으로 구조를 해 내었으니, 이건 또 어찌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어처구니없게 생명을 앗긴 기막힌 사실과 누가 보아도 허둥지둥하고 생뚱맞기까지 한 후속 조처들은 유가족은 물론 전국민의 공분을 넘어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던 셈입니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가능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것이 그저 고가의 보석이나 값나가는 장비를 수장시킨 사건이라 해도 참으로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었을 텐데, 304명의 소중한 목숨이 집단으로 수장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참상이 벌어졌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이후로 계속되는 은폐와 데이터의 조작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회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 사고사였다 해도, 수습에 대한 책임은 적어도 책임 있게 감당했어야 합니다. 적어도 사건의 경위는 철저히 밝히고, 합리적인 절차를 따라 유가족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추념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벌어진 사고는 되돌릴 수 없겠지만, 망자들이 남긴 삶의 흔적과 추억, 애틋하고 소중한 정리와 이야기에 대한 기억만큼은 수장되지 않도록 해야 할 터, 국가가 전 국민을 대표하여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곁을 지켜 주었다면 슬픔과 아픔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사건의 정확한 경위를 밝히기보다 오히려 특조위 활동을 어떻게든 방해하려 들었으며, 적절한 위로의 소임을 위한 골든타임도 놓친 채 적반하장으로 진보와 보수 심지어 좌우의 이념 대립을 들먹이며 보상금 음모론 카드까지 꺼내 흔들면서 유가족들을 소위 ‘시체장사’나 하려는 파렴치한 사람들로 몰아 조롱하고 모욕하기까지 했습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한 단식 투쟁의 현장에서 벌어진 일베들의 피자 파티는 그 잔인한 단면을 보여 주었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세월호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자꾸만 사고 현장으로 소환하여 현재진행형의 사건이 되게 하였으며, 그럴수록 우리의 울분은 더욱 증폭하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째서 이런 비인간적이고 몰상식한 일들이 백주 대낮의 광화문 대로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구글이미지>

II.
따라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사건은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던 삐뚤어지고 뒤틀린 가치와 우선순위에 대한 경고의 사건으로 보아야만 통합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고의 일차적인 원인(原因)은 물론 선박의 침몰과 그 후속조처에서 빚어진 무책임과 무능력이었다 하겠지만, 그런 무책임한 태도가 기반하는 뿌리는 과연 무엇이었는지가 바로 긍극적인 원인(遠因)이었다 하겠습니다. 

한 개인이든 사회 전체든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은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의 상황이 닥치면 민낯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평소에는 다들 속내를 숨긴 채 외면수습으로 어느 정도 표정관리를 할 수 있겠지만, 위기가 닥치면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세월호 사건이 만일 세간에서 말하듯이 누군가가 애초부터 기획한 사악한 사건이었다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다 해도 침몰 이후 수습의 과정에서 드러난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대응만 보더라도 당시 박근혜 행정부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던 건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하겠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건지는 일보다 그리고 유가족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일보다 뭔가 다른 ‘중요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론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만한 일련의 사태들이, 대통령의 일곱 시간으로 시작해서 ‘언딘’의 어설픈 구조를 둘러싼 의혹들과 항적도의 은폐 조작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안산이란 도시가 공단 지역인 점을 감안할 때, 경제적인 빈부 차에 따른 소외 내지 힘과 권력의 우열에 따른 차별주의 프레임이 작용했으리라는 추론, 나아가서 이를 정치적인 보수-진보의 프레임으로 몰아가려는 집권층의 삐뚤어진 리더십 - 기회주의적 꼼수와 갑질로 군림하려는 관료주의 - 리더십의 폐해 등이 포개어지면서 그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핵심 가치와 그에 기반한 관행이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여 왔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절호의 계기가 마련된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월호 참사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온 주요 핵심가치가 무엇이었던 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 상징적인 사건이자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규정해도 손색이 없는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부와 권력을 거머쥔 자와 부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차별과 계급의식, 그리고 지역감정이나 보수-진보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가장 본질적인 해악은 소위 “끼리끼리” 의식을 고양함으로써, 매사를 이런 편 가르기 식의 편향적인 시각(tunnel vision)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편견과 아집의 우물에 갇힌 채 객관적인 시각을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생각해 보면 억울하고도 황당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자식의 시신조차 찾지 못하여 넋을 잃고 있는 부모들을 자신들의 집단적인 이익이나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를 위해 불순 집단으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보상금을 한 푼이라도 더 챙기려 별별 “짓”을 다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으로 낙인을 찍는 짓이야말로 도리어 피도 눈물도 없는 만행이자 극악하고도 사특(邪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통은 사람이 죽었다 하면 “오죽하면”의 논리로 참아주고 포용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이런 끔찍한 생이별을 강요당한 상황에서 함께 울어주지는 못할망정, 동정심은 고사하고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고 확장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이보다 더 반인륜적인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때같은 자식들이 집단으로 함께 수장되어 죽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뻔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날벼락은 사건 그 자체만으로도 결코 쉽게 가라앉힐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망연자실한 부모들과 유족들의 울분이 되레 증폭되도록 마구 염장을 질러 댔으니 정상적인 양심을 가졌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사악한 만행이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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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이런 만행을 금지시키고 벌해야 할 공권력에 의해 도리어 철저히 소외되고 외면당하며 나아가서 곡해와 모함을 당했으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국가의 권위로 도리어 폭력을 휘두르게 되면 이는 언제나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위기를 자초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짧은 현대사 속에서 배운 역사적인 교훈이 아니겠습니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를 거세한다면, 이는 국가라고 할 수 없으니, 박근혜 정부의 비참한 몰락은 일면 사필귀정으로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게 나라냐?” 내지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라는 탄식은 세월호 유족들 개개인의 억울한 분노를 담은 표현일 뿐 아니라 과연 그 동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경제성장을 해 왔던 것이며 정치의 발전이란 또 누구를 위한 것이었던가, 나아가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이며, 바람직한 이웃 관계, 부모-자녀 관계, 살기 좋은 세상은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가 등등의 우리 모두를 위한 본질적인 질문들이 넝쿨 째 연결되어 터져 나온 분노와 자성의 구호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우리는 이런 본질적인 질문은 모두 유보시켜 둔 채 그저 “빨리 빨리”의 노하우에 매달려 왔다 하겠습니다. 그 빨리가 무엇을 위한 빨리였으며 어디로 가기 위함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이명박 행정부의 747 공약(空約)에 혹하여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때도 그랬고, 독재자의 딸을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며 추대했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문제의 본질에 천착하지 못한 채 우리의 탐심을 적당히 치장해 줄 수 있는 그럴 싸 해 보이는 포장지 준비로 분주하였던 셈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조차 어떻게든 방해하려 들고 진실을 덮어 가리려 했던 박근혜 정부는 결국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세상에서 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생때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찮게 여기고 그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그들의 목숨을 함부로 취급하는 행악에는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보응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아직도, 비록 선체는 인양했지만, 진실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팽목항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으리라는 의심은 여전히 다 걷히지 않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일곱 시간의 비밀조차 아직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 “일곱 시간”이 대변하는 바, 숨겨진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이기에 그리도 꽁꽁 싸매고 숨기고자 하는 것일까요? 

결코, 박근혜 대통령 개인의 사생활을 문제 삼자는 것이 아닙니다. 박근혜로 대표되는 기득권자들, 나아가서 747의 꿈을 잠시나마 함께 꾸려 했던 우리 자신들이 그동안 소중하게 여겨 온 것, 우선순위로 꼽고 있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기에 나라 전체가 세월호에 부딪쳐서 곤두박질치게 된 것일까요? 혹여 그것이 탐욕이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심령에서 동정심 내지 자비심을 말라붙게 만들고, 반인륜적인 무자비함을 서슴없이 자행하게 할 만큼 우리의 눈을 멀게 하여 심지어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탐심이 아니겠습니까? 이 탐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또 가방끈의 길이나 은행 잔고의 차이를 막론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기중심-주의의 사슬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너는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고, 너를 죽여서라도 나를 살려야겠다!는 이 탐심이 어느새 전염병처럼 창궐하여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눈을 멀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였던 것이 아닐까요? 오죽하면 세월호 재판에 참석하였던 유가족들이 재판이 끝날 때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구역질을 억누르느라 애를 써야 했겠습니까? 

하여 이참에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성공”이나 “출세”, 혹은 “일확천금” 또는 “한탕”이나 “대박”, 나아가서 “고지” 등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 그것이 그런 탐욕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포장하기 위한 것인 이상 세월호 참사는 다시 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일에 종사하든, 어떤 지위와 책임을 맡았든, 보수를 얼마나 받든, 그저 우리의 욕심이 이끄는 대로 ‘생각 없이’ 움직여서는 안되겠습니다. 성공 또는 성장이란 잣대로 이웃을 재단하고, 계층을 나누고, 또 내편-네편을 기준으로 지역을 가르고, 학벌을 따지고, 보수와 진보를 나누고, 남과 북을 가르고, 내가 가진 신념과 가치를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로 고착시키게 되면, 어느 새 우리는 자비를 알지 못하고 동정심이 말라붙은 무자비한 괴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꽃다운 어린 나이에 먼저 이 세상을 하직한 세월호의 영령들이 우리에게 마지막 혼신을 다하여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었겠습니까? 

<http://report.dbpia.co.kr/prayforsewol01/>

불행 중 다행으로 위기에는 기회의 모멘텀이 포함되어 있다고들 합니다. 세월호의 비극이 전화위복의 촛불이 되어 타오를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세월호의 교훈은 장차 이 민족의 정기를 새롭게 하는 보이지 않는 횃불이 되어 오래 오래 타오르기를 희망해 봅니다. 세월호 참사의 기억은 세월이 가면 또 잊히겠지만, 세월호 희생자들의 타들어가던 절규와 남은 유족들의 울분어린 탄식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자원하여 슬픔을 함께 나누던 무명씨 이웃들의 따뜻한 온정은 오래 오래도록 우리 역사에 메아리 되어 울려 퍼지기를 기원해 봅니다. 그리하여 세월호의 침몰을 알리던 그 사이렌 소리가, 비록 무고한 목숨들을 구출해 내지는 못했지만, 우리 온 겨레가 김구 선생님이 꿈꾸던 ‘문화 민족’ 곧 긍휼과 자비를 알고 인자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끊임없이 발돋움하도록 채근하는 경종이 되기를 앙원해 봅니다.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는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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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뉴스앤조이 2018-04-18 0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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