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선 박에스더 부부 기념비 제막식 열려
박여선 박에스더 부부 기념비 제막식 열려
  • 신기성
  • 승인 2018.04.25 1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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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박여선 사망 후 118년 만에 메릴랜드에서 재회

[미주뉴스앤조이(메릴랜드)=신기성 기자] 메릴랜드주 엘리콧시티에 위치한 베다니 한인연합감리교회(담임 박대성 목사)와 한인 교계 일원이 지난 21일(토) 한국인 최초 여의사였던 박에스더와 그녀의 남편 박여선의 묘지에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박여선은 1868년 조선에서 출생했다. 1893년 아내 박에스더를 만나 결혼했고 다음해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뛰어난 학업 성적을 거두고 볼티모어의 여자 의과대학에 입학한 아내를 돕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시작한다. 박에스더가 의과대학에 다니던 4년 동안을 뒷바라지 했지만, 1900년 그녀가 졸업하기 바로 전에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메릴랜드주 로레인파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은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제막식은 그 후 118년 만에 두 부부가 함께 이름을 올린 격이다.

최초의 한인 여의사 박에스더

박에스더(본명 김정동)는 감리교 여성 의료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 가족과 함께 미국에 도착했고, 고등학교 과정부터 두각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볼티모어 여자 의과 대학에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해, 서양 의학을 공부한 조선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의사 시험을 앞 둔 시점에 이국땅에서 남편을 잃고 절망에 빠질 법도 했지만 시험에 당당히 합격한다.

그녀는 1900년 11월 미 감리회 여성 해외 선교부 파송을 받고 귀국한다. 조선에 돌아온 후 의료선교와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삶을 살다가 1910년 그녀도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녀는 의사로서 조선 백성들의 아픔과 병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기회가 될 때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도 충실한 삶을 살았다. 의사가 되고 고국에 돌아온 후 유명을 달리 할 때까지 불꽃같은 10년을 살았던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묘비 뒷면에는 감신대 이덕주 교수와 박대성 목사가 함께 아래와 같은 비문을 적어 넣었다. “한국인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는 한국 백성들의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며 영혼까지 치유했던 위대한 감리교인으로서 암흑기 조국과 여성사회를 위해 헌신한 빛난 별로 기억되고 있다. 그녀의 남편 박여선은 아내 박에스더의 의과 대학 공부를 위해 미국까지 동행해서 자신을 희생했던 든든한 후원자였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의학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기 직전 별세하여 이곳 볼티모어에 묻혔다. 2017년 7월 이곳을 방문했던 한국의 감리교 순례자들이 이들의 위대하고 희생적이었던 삶을 기억하고자 정성과 뜻을 모아 이 묘비를 세운다. 2018년 4월”

한편 제막식은 베다니한인연합감리교회 박대성 목사의 사회로 진행됐고, 최초의 한국계 주지사 부인 유미 호건 여사, 워싱턴 총영사관의 김하늬 영사, 그리고 묘지 소유자인 키츠 스미스(Keats Smith)씨 등의 축사가 있었다. 한인여선교회 전국연합회 김명래 총무는 “전도부인 양육자 박에스더”라는 제목으로 그녀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명래 총무가 소개한 내용의 전문을 아래에 옮겨왔다. 한인여선교회 전국연합회의 축가와 워싱톤감리교회 이승우 목사의 축도로 제막식을 마쳤다.

축가하는 연합감리교회 한인여선교회 전국연합회 회원들

이번 제막식은 베다니한인연합감리교회와 박대성 목사의 10년이 넘는 노력과 기도로 시작되었고, 감신대 이덕주 교수 등 돕는 손길로 결실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행사는 볼티모어와 뉴욕 한인여선교회 회원들, 베다니한인연합감리교회 박대성 목사와 교인들, 에덴한인연합감리교회 교인들, 볼티모어 한인회와 교민들, 워싱턴 감리교회 이승우 목사, 볼티모어 영사, 볼티모어 주지사 부인(한국여성), 언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다음은 연합감리교회 한인여선교회 전국연합회 김명래 총무가 낭독한 "박에스더를 기억하며"의 전문이다.

오늘 박에스더를 기억하며 이 글을 나누게 되어 너무도 감격스럽습니다.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정동 이었습니다. 어릴적에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밥만 먹던 그녀가 이화학당에 들어가 로제터 홀 의료선교사를 만나서 진료소에서 통역과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인생에 새로운 도전과 계획을 갖게 되었습니다. 1891년 올링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녀는 에스더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성경의 나라와 민족을 구한 에스더 처럼 훗날 조선의 여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의료와 복음사역에 헌신하게 됩니다.

박에스더를 기억하는데는 많은 명칭이 있습니다. 그 명칭들은 그녀가 어떤 사역을 하였는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1893년 박여선과 결혼하여 이름이 박에스더가 되었고, 1895년 로제타 홀 가족을 따라 뉴욕으로 와서 남편 박여산의 공부 뒷바라지를 받으며 공립학교를 다녔고, 뉴욕 어린이병원에서 보조간호사로 일을 하면서 의과대학 준비를 하였습니다. 1896년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꿈에 그리던 의과대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개체 감리교회에서 열리는 여성해외선교부 모임에 가서 신앙간증과 조선을 알리며,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알리는 일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5년간의 미국의 학업과정에서 아이를 두번이나 유산하였고, 남편 박여산이 에스더의 의과대학 마지막 졸업시험을 앞두고 1900년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큰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졸업시험을 잘 마치고 1900년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조선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됩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의사로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조선 여성들에게 복음과 치유 사역을 통해서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여 미감리교회 여성해외선교부 파송을 받은 의료 선교사로 그해 11월에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귀국후 박에스더는 스승인 로제타 홀 선교사와 함께 서울의 보구여관과 평양의 광혜여원에서 매년 수천명 이상의 여성과 어린이 환자들을 진료했고, 환자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의료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녀는 환자들에게 육신의 질병을 치료해 주면서 복음을 전하여 전인적인 보살핌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에스더는 조선여성들의 의료교육에도 기여를 했는데 여성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미신적이고 잘못된 건강 상식에 대해서 계몽과 교육을 했습니다. 또한 조선여성들을 위한 의료 발전을 위해서 보구여관 내에 간호사 양성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로제타 홀이 세운 평양 맹아학교 운영과 교육에도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에스더는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실시했는데 황해도, 평안도 지역의 산간벽지를 다니면서 여성과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1903년-1909년까지 전도부인 양성교육기관이었던 “여자 성경학교”를 통해서 말씀과 위생학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많은 전도부인들을 양성했습니다. 전도부인들은 에스더의 강의를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인후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조선에 귀국후 10년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며 조선의 여성들을 섬기며 의사, 감리교 선교사, 복음전도자, 교사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비록 34년의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녀의 신앙과 삶의 발자취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오늘날 한국의 여성들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자리에 서있는 우리들에게 다시 도전과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에스더 처럼 주님을 위해 이 시대의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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