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왕국과 맹신 집단
종교 왕국과 맹신 집단
  • 신성남
  • 승인 2018.05.0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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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신앙'에서 '성경 신앙'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 신정 통치는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았습니다. 인간에 의한 반복적인 불순종과 배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은 견고한 종교 왕국의 건설에는 비교적 성공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이루지는 못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숱한 선지자들을 보내어 수도 없이 경고하셨지만 목이 곧고 어리석은 인생들은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거짓선지자들과 부패한 지도자들은 집요하게 악했으며 백성들은 여전히 무지했습니다(렘5:31).

구약 마지막 책의 말라기 선지자 또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7)." 이처럼 종교 지도자들마저 양심이 마비되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조차 무감각해졌습니다.

새로운 시작

그러나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찼습니다. 선지자 요한은 새시대를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많은 사람들은 죽어서 가는 내세가 하나님나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요한은 거꾸로 '하나님나라가 왔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나라는 하늘로만 임하는 게 아니고 땅에도 임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이땅에서도 누릴 수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고 그 복음의 실체가 하나님나라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에서 전도한 빌립은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8:12)."

신구약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나라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친 것도 하나님나라였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한 것도 하나님나라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전했습니다. 단순히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게 영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도 영원히 죽지는 않지만 우린 그걸 영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단순히 죽음 후에 가는 극락이나 열반이나 어떤 피안의 세계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누리려면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게 중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롬11: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본분입니다.

'사랑'과 '정의'는 동전의 양면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계명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만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또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12:6)." 이 구절을 보면 사랑과 정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요소마다 정의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도 정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창18:19)."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대부분 큰 복을 주기 위해서 그를 택했다고 가르치며 주로 복을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니 복만 찾고 정의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교회들이 적지 않습니다.

더구나 과거 '개역한글' 성경에는 이 '정의'라는 용어를 가급적 많이 삭제해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공평, 공의, 공법, 또는 심판 등으로 다소 그 의미를 바꾸거나 완화해서 표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번역 시기가 일제강점기나 군사 독재 시절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얼마나 세상 권력의 눈치를 보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설교에서도 자연히 정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민 정부가 들어선 후에 '개역개정' 번역에서는 이 정의라는 단어가 대폭 복원되어 무려 100여 곳이나 제대로 추가되었습니다. 이는 요즘 교회들이 열심히 강조하고 있는 한글 성경의 '예배'라는 단어보다도 거의 3배나 많은 숫자입니다. 즉 성경은 예배보다도 정의를 훨씬 더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독재자들이나 교권주의자들은 이 정의라는 단어를 매우 싫어하고 두려워 합니다. 자신들이 수시로 정의를 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더 특이한 점은 놀랍게도 본래 개역한글 구약에는 '예배'라는 단어가 아예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신약에서만 단지 10번 정도 나왔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이를 증가시켜 적어도 36번이나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어색한 번역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욥기1:20절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입니다. 본래는 경배였는데 이를 굳이 예배로 바꾸어 번역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자의적 번역에는 어찌하던 공예배 행위를 강조하려는 일부 직업 종교인들의 인위적 의도가 다분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철저한 종교 왕국을 세우고 절기마다 제사에 열심이었으나, 정작 하나님께서 그보다 더 기뻐하시는 바는 정의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잠21:3). 그래서 정의가 없는 교회는 바른 교회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와 종교 왕국

오늘날 우리는 반쪽짜리 사랑에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성경 속의 진정한 하나님 백성은 정의를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핑계로 정의를 외면하거나 억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며 죄악의 낙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보화를 받기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의를 위해 고난을 감수했던 하나님 백성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히11:24).

사도들이 진정 세우시고자 한 하나님나라는 건물이나 제사나 예배나 헌금채나 프로그램으로 가득찬 종교 왕국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이나 사원을 많이 세우고 구름같이 허다한 세력을 모아 강력한 기독교 제국을 세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실 거라면 애초부터 메시야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아예 황제의 아들로 오셨을 겁니다.  

우린 인간이 만든 종교 왕국의 허상을 이미 구약 유대교와 중세 로마교에서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제사와 절기에 몰두했지만 실상 그 마음과 삶은 수시로 하나님의 계명을 배신하며 사욕을 추구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오늘날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일 성수와 공예배와 교회당 건축에 몰두하는 것이 마치 믿음 생활의 척도라도 되는 양 오해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고작 그런 외형적 껍데기에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구약은 성전 중심과 제사 중심의 신앙 생활이었지만 신약 성경에는 단 한 채의 교회당 건축도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실체는 종교적 예식이나 세속적 복지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입니다. 우리는 늘 복을 구하지만 성경은 그 복을 받는 비결이 어떤 종교적 열심이나 충성에 있는 게 아니라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 따라서 진정으로 복을 받기 원한다면 복채를 사거나 치성을 바치려 하지 말고 정의를 행하며 살면 될 것입니다.

거룩한 혁명    

구약이 율법에 열심인 시대였다면 신약은 하나님나라 복음의 시대입니다(눅16:16). 구약 유대교와 중세 로마교는 모두 종교 왕국을 세우는 일에는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나님나라를 이루지는 못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도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조차 당시의 성전을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성전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새로운 성전을 3번이나 열심히 건축했지만 결국 그 화려한 건물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는 못 했습니다. 그들의 종교 왕국은 제사장들의 배를 부르게 하는데는 다소 성공했지만 결코 백성의 삶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일부 지도자들 역시 교인들에게 하나님 백성이 되라고 늘 강변했지만, 정작 그 백성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치열하고 심각한 일인지를 제대로 전하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신앙과 삶이 외면화하여 자신도 모르게 이중적 위선자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가 예배당 속에서조차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이 이루지 못했던 하나님나라를 꿈꾸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종교 왕국의 바리새인들처럼 직업적 '종교 브로커'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헛된 부귀나 안락을 탐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이 땅에서 땀흘려 노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아름다운 성전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의 수가 부족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실체인 사랑과 정의를 지키지 못해 망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무슨 취미 생활이나 보험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움직이는 불덩어리였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를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건 혁명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는 단순히 종교 생활이나 봉사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골고다 십자가 언덕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명왕성 너머 먼 우주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의 진리 속에 있고, 우리 공동체 속에 있고, 또한 지금 우리 삶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지금 숨쉬는 이 순간 이 순간이 언제나 주의 나라를 누리는 진리의 순간이라는 깊은 자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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