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언제나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 최병인
  • 승인 2018.05.05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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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뉴욕한인교회 음악감독 백혜선 교수

“사람이 가장 높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서울대 교수가 세계 최고라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저의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려면 내 삶이 힘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한국은 교수에게 대우를 엄청 해 주잖아요. 그래서 그 자리가 너무 싫었어요. 직장이 실력을 보여 주는 게 아닌데.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이룬 것은 부모님과 선생님 덕이었다면 이제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어요.”

백혜선 교수는 9월부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대학인 뉴잉글랜드음악원 피아노과 교수로 부임한다. 한국인 최초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입상, 29세 최연소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그는, 명예와 안정이 주어진 한국에서의 삶을 뒤로 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지 17년만에 모교의 교수가 된 것이다.

교회 반주자가 되기 원하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시작은 피아노 반주자였다. 아버지는 백 교수가 교회 반주자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음악이 그를 선택한 걸까. 백혜선 교수는 가정교사로 만난 선생님을 통해 피아노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선생님이 미국 유학을 결정하며 중학생인 그도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아버지는 항공권을 찢어버릴 정도로 극심히 반대했다. 한국에서 다소곳이 있다 24살이 되기 전 결혼하라고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 백혜선 교수는 결국 아버지를 설득했다. 미국에 가서도 교회 반주를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금 백 교수 곁에 계시지 않다. 그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던 아버지는 백 교수가 시집가기 바랐던 24살이 되던 해, 백 교수가 피아노와 결혼했다고 생각하겠다고 하셨다. 윌리암 카펠 콩쿠르에서 입상 기념으로 열린 링컨센터 독주회를 보시곤 백 교수의 실력을 인정한 것이다. 암 선고를 받으셨던 아버지는 독주회를 보시고 6개월이 안 돼 돌아가셨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듯, 교회 반주자는 아니지만 백혜선 교수는 교회에서 성가대 음악감독으로 섬기고 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교회를 찾은 그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교회에는 오지만 마음으로는 ‘오늘 설교는 안 좋아’, ‘저 교인은 이상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는 다른 사람을 보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보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헌신으로 다른 사람이 기쁘면 되는 것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해가 있더라도 진심이 있다면 분명 알게 된다. 본인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음악이기에 주어진 시간만큼 열심히 하며 신앙을 키워가자고 했다. 성가대를 통해 은혜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생각했다.

“자기가 가지려 하지 말고 주려고 하면 행복해요. 스스로 작은 사람이 되어서 섬기면 꽃을 피우게 되지요. 좋은 곳에 다니는 건 너무 쉽잖아요.”

성가대에는 전공자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백혜선 교수가 다니는 뉴욕한인교회는 솔리스트나 반주자에게 처음부터 사례를 주지 않는다. 교회를 섬기는데 중요한 것은 출석하는 교회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다. 하모니를 내기 위해선 겸손한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주회는 예배와 같다

백혜선 교수는 연주회를 할 때도 늘 겸손한 마음을 지니려고 한다. 그렇다고 청중들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더 연마하고 승화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연주회는 예배와 같다. 청중을 위해 하지 않고, 본인에게 주어진 선물에 정성을 쏟으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청중들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회는 연구 발표와 같아요. 연구자가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해 연구한 것을 발표하듯 하는 것이 아니듯 클래식도 주어진 기회에 마음을 쏟아 곡을 해석하고 연마해서 그것을 발표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자기 연마를 통해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그 시간이 행복한 시간이고 축복이라는 것을 느껴야 한다고 백혜선 교수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가는 또 종교인과 같다. 부귀영화를 바라면 안 된다. 성공에 목을 매지 않고 음악을 할 때만이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어진 달란트를 가꾸며 위기의 순간을 넘어갈 수 있다.

“나를 알아달라고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것은 드러나지요. 본인이 작아져야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지요. 저는 그래서 어떤 곳에도 그냥 머물려고 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정점이라고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지요.”

안주하지 않는 연주가 백혜선 교수. 그는 데뷔 30주년을 앞두고 또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한다. 2년 반 동안 ‘베토벤 소나타·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한 곡당 30분~1시간 되니 한 공연 당 4~5개씩 연주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베토벤 음악은 널리 알려진 곡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음악으로 해석하여 연주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백혜선 교수는 우울할 때 베토벤을 듣는다고 했다. 어려움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작곡가, 그의 노력이 백혜선 교수와 닮았다. 
 
최병인 기자 /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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