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자유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자유
  • 최태선 목사
  • 승인 2018.07.01 09: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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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교인이 목사에게 2만 달러를 찔러준다면?' 기사에 관한 최태선 목사의 의견입니다. -편집자 주-

 

한 기사에서 목사 개인이 받은 헌금을 목사가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에는 어떤 목사들은 다른 교회에서 받은 강사료나 설교를 하고 받은 사례비를 교회 재정에 포함시키는데 그런 훌륭한 목사들이 적지 않다는 내용이 있었다. 과연 그런지를 생각해 보자.

우선 거의 모든 교회는 자신의 교회 목사가 아닌 다른 교회의 목사가 와서 설교를 하건 집회를 하건 강의를 하건 사례비를 주는 것이 당연한 관례가 되어 있다. 관례라는 것은 이유 없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어떤 경우에도 단 한 가지 정답만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이 그 답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모든 외부에서 받은 사례비를 교회 재정에 포함시키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단순한 머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자유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우리 교회의 이야기를 좀 해보겠다.

목사가 되고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이 다른 교회를 방문하고 받은 사례비를 개인적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몇 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마음에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가급적 그러한 돈들을 헌금으로 교회 재정에 포함시켰다. 여기서 가급적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는 말이다.

우선 친한 목사님들의 경우는 일종의 협정을 맺었다. 서로의 교회를 방문하는 경우에는 사례비를 주고받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교회로부터 충분한 생활비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분들이 오히려 과도하게 사례비를 챙겨주시는 경우도 있었다. 아주 매우 드문 경우이지만 어려운 나의 사정을 알고 일부러 강사로 초빙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강사료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주었다. 그런 경우 상대방의 의도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경우 나는 그런 행동이 고린도후서 8장에서 말하는 평균케 하려는 연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에는 상대방의 호의를 받아드리는 것이 오히려 성서적이라는 말이다.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매주 방문하여 설교를 하던 복지법인의 이사장이신 권사님이 가끔씩 우리 교회에 헌금봉투를 주시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를 도우시려는 그분의 의도를 잘 알았지만 아내와 나는 헌금으로 누군가 우리에게 주는 돈은 전액 우리 교회와는 상관없는 어려운 이들을 위한 구제비로 사용하였다. 물론 교회 재정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지출하는 것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헌금을 주셨던 권사님에게 우리가 그 헌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반드시 말씀드렸다. 그런 말씀을 들으면 권사님은 오히려 속상해 하셨다. 그 헌금은 우리를 위해 개인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돈이었기 때문이다. 헌금이라는 말은 그 돈을 편하게 받을 수 있게 해주시려는 일종의 배려였을 뿐이다. 어쨌든 그런 일이 늘 일상처럼 반복되자 권사님이 방법을 바꾸셨다. 아내를 불러 돈을 주시며 이건 사모님 쓰라고 드리는 돈이라고 못을 박았고 아내와 동행하지 않은 경우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며 사모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권사님의 뜻을 따랐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헌금이라고 하시며 주시는 봉투는 반드시 외부인들을 위한 구제비 내지는 선교비로 사용했다.

그 외에도 교인들 가운데 교회 헌금으로 돕기가 어려운 분들이 있었다. 그런 분들에게 내가 받은 사례비나 헌금을 드리는 경우는 아주 많았다. 생활비, 아이들의 학원비, 병원비 등등 그런 필요는 교회에 언제나 아주 많다. 그런 경우는 굳이 교회 재정에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분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헌금의 사용 역시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서의 권면을 따르는 것이 대의라고 생각한다.

목사들이 개인적으로 받게 되는 돈은 사례비나 강사료 외에 심방이나 교인들의 특별한 날 예배를 인도하는 경우에 받게 되는 봉투가 있다. 일단 우리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목사 개인에게 봉투를 주지 않도록 교육을 시켰고 일절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막무가내로 찔러주는 봉투는 교회 재정에 헌금으로 산입했다.

결론적으로 목사가 외부로부터 받게 되는 돈을 모두 교회 재정에 포함시키는 것만이 정답이고 그렇게 하는 목사만이 훌륭한 목사라고 할 수 없다. 특히 개혁을 외치는 분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늘 사용하는 투명한 교회재정이 교회 개혁의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것이 바로 미성숙의 소치일 수도 있고, 교회가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세속화의 한 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세상의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어리석음의 대상으로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 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인 상과 일치한다고 할 수도 있다. 상식으로 복음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성숙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자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목사라면 모름지기 그 자유와 양심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 역시 그런 목사의 모습을 따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음에는 정답이 없다. 복음은 우리에게 불가능을 제시하고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불가능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사람이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그 실험의 기회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하는 창의적인 삶을 살아내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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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일 2018-07-02 00:48:57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세상의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경우가 어떤 것인지요?
'세상만도 못한 모습' 때문에 어쩔수 없이 상식만이라도 지켜보자는 권유를 "상식으로 복음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의 미성숙"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에 교회가 지금 이모양 이꼴이 아닌지요.
"어려운 나의 사정을 알고 일부러 강사로 초빙"을 해서 "일반적인 강사료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주고 받는 것이 나누어 평균케 하려는 연보의 사용으로 인식하고 계시는 분들이 극수수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 생각이 조금 더 발전하다보면, 성관련 기사로 도배를 하던 국민일보를 운영하던 아들을 교회 돈으로 도와주며 자식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던 조용기 목사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막힐 것을 두려워해 마땅히 요구할 권리도 포기한 바울의 행위는 언제쯤에나 대화의 중심에 놓일 수 있을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