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개인 탓만 할 것인가!
언제까지 개인 탓만 할 것인가!
  • 신기성
  • 승인 2018.07.22 1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목회자 성문제, 대책 마련 시급

[미주뉴스앤조이=신기성 기자] 가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성직자의 성적 이탈과 범죄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신학적,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온 미국교회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공개돼 사임했던 윌로우 크릭의 빌 하이벨스 목사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한인교계에도 드러난 범죄가 있고, 소문이 무성해 취재 중인 사건도 있다.

교회 내 목회자 성적 비행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허핑턴포스트는 전문직 성범죄 1위가 목회자라는 통계 자료를 발표한 적도 있다. 전병욱, 이동현, 김해성 등 많은 목회자들이 성범죄를 일으켰지만 이를 방지할 제도적 장치나 교회 내 의식 수준의 변화는 미미해 보인다.

성직자에 의한 성폭행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개인의 신앙 양심이나 인격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범죄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목회자가... 성직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는 자괴감 섞인 비난이 주를 이루고 혹은 조롱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런 비난은 익명성에 그치거나 실제 영향력 혹은 구속력 없는 인터넷 상의 조롱에 그치는게 대부분이다. 따라서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그리고 더 심각한 범죄가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언제까지 개인 탓만 하고 있을 것인가? 개인의 신앙적 양심에 맡겨서 개선될 여지나 가망이 없다면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신앙적 양심에 따라 성실하게 목회 사명을 감당하는 수많은 선량한 목회자들을 일부 타락한 성범죄자들로부터 구별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장치는 필요하다.

여성 차별 의식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평등에 관한 인식 전환이다. 페미니즘을 이념으로 둔갑시켜 불건전한 진보 사상으로 공공연하게 매도하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신에 관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신앙 고백 형태를 절대 진리에 대한 완벽한 묘사라고 믿는 교인들이 많고 여전히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도 많다. 가부장적 신의 이미지는 목회자에게 투영되고,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순종의 주체가 된다. 여성의 안수를 허락하지 않거나 교회 리더십 위치에서 배제되는 일도 마찬가지 이유다. 남성은 장로가 되지만 여성은 권사가 된다. 주일에 남성들은 기도 모임을 하고 여성들은 부엌으로 모여드는 관습도 아주 자연스럽다. 이게 왜 자연스러울까? 교회 구성원 중 여성의 비율은 60%가 넘는다. 하지만 리더십 위치에는 대부분은 남성이 자리하고 있다.

신학교 및 교회 내의 부실한 성교육도 여전하다. 신학교와 교회 지도자들이 대부분 남성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성평등에 관한 인식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아예 문제의식도 없는 경우가 많다. 교회와 상급 기관의 의결기구에 남성 구성원들만 모여서 제도를 만들고 사건을 치리하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신학과 제도가 모두 부실하다. 성차별이 있는 곳에 반드시 성폭력이 존재한다.

교회 내 위계 구조 문제

둘째, 목회자 중심의 교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 장로교에는 당회가 있고 감리교에는 임원회 등 의결기관이 있지만 당회장(담임목사)이 모임의 장을 맡고 있고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목회자의 권위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들은 ‘목회자는 주의 종이니까 순종해야 한다’는 최면에 가까운 의식교육도 한몫한다. 심지어 목회자에게 대들면 망한다거나 암걸린다는 망발을 십계명처럼 받드는 교인들도 있다. 교회의 의사결정 과정과 절차가 교인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제도로 바뀌어야 한다. 특히 대형교회에서는 목회자 중심의 절대 권력을 해체하는 것만이 그들의 일탈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는 길이다.

교회 내 의결 절차를 민주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면 ‘예수님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성경은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등의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맞다. 예수님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어느 무슨 주의자도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시므로 인간의 어떤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이념으로 삼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다. 하지만 인간은 예수님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목회자 한 사람에게만 그 고민을 전부 떠넘기고 독단과 오류를 부추기는 짓을 그만 하자는 말이다. 교회 공동체의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들이 모여서 함께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에 더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독단이나 전횡은 막을 수 있다.

신고 및 상담 기관 부재

셋째,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신고를 하거나 상담 신청을 할 기관을 두어야 한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성폭력 피해의 예방과 치유에 관한 대책과 관심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미국의 경우 미국장로교(PCUSA)나 연합감리교(UMC) 등은 교단에 성범죄 피해 신고나 접수를 할 수 있는 기관이 운영되고 있고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실제 주변에서 일어난 UMC 아동 성폭행의 경우에, 피해자의 신고가 접수되자 교단 관계자는 철저히 피해자의 신변을 보호하고 국가 수사기관과 공조로 몇 개월에 걸쳐 비밀리에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 경우를 봤다. 가해 목회자는 법에 따라 엄중한 처벌을 받았고 교단에서 퇴출되었으며 피해자는 전문가의 상담과 치료를 받고 모든 비용과 보상금은 교단에서 지불했다. 교단은 이런 경우를 대비해 별도의 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런 부분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

마지막으로, 성폭력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성차별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 가해자인 남성, 즉 목회자는 순간적 실수나 일탈로 여겨진다. 가장 흔한 반응이 ‘그도 사람인데...’라는 말이다. 피해를 당한 여성에게는 성폭행을 유발할만한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았는지 증명해야하는 책임이 지워진다. 피해자는 늘 실명이 공개되고 신상이 털리며 2차 피해에 노출된다. 상급기관에 고발을 하더라도 교회의 사법위원회는 대부분 남성들로 구성되어 교단 법정에 피해자의 출석과 증언을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목회자의 성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사회법에 따라서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 김기동, 이재록, 전병욱, 김동현 등에서 보듯이 성범죄는 한 차례로 끝나는 법이 없다.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이런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범죄를 저지른 일부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가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매도될 것이다. 또한 교회 및 신학교 리더십에 여성의 비율을 늘려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양성평등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