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성범죄, 용서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성범죄, 용서의 문제가 아니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18.08.17 0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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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성범죄투성이다. 장소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공직사회도, 법조계도, 문화계도, 예술계도, 영화계도, 경제계는 물론이고 가장 웃기는 건 종교계까지도 그렇다. 기독교도 기독교지만 독신을 기본으로 하는 수행종교인 불교와 가톨릭까지 그렇다. 그러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남녀상렬지사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성관계란 둘이 좋아서 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성관계를 한 남녀는 똑같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다. 더 웃기는 건 자신이 하는 성관계는 당연하고 좋은 것이고 남들이 하는 성관계는 더럽고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성관계보다 더 인간적이고 강렬한 욕구는 없다. 그래서 그 성관계를 어떻게 하느냐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한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서가 말하는 성관계는 분명하고 현저하다. 음행은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기독교는 몸의 종교다. 그리스도인은 몸을 잘 건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몸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고,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인간이 몸을 벗어나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유독 인간에게 엄중한 책임을 지게 하신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의 관심사이고 특별한 존재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투기까지 하신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간음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간음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간음이야말로 가장 현저한 범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정당한 성관계까지 금하지는 않으신다. 오히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성관계는 아내와 남편에게 주어지는 선물임과 동시에 의무와 사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헷갈린다. 하지만 헷갈리는 건 인간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입장은 단호하고 분명하다. 주어진 관계, 다시 말해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만 자유롭게 그리고 얼마든지 즐기고 또 낳을 수 있는 대로 아이를 낳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다. 무엇이든 더 가지려는 인간의 탐심은 특히 성문제 있어 가장 두드러진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 왕까지 그 문제를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 중 밧세바 이야기는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는 밧세바와의 성관계 때문에 성범죄는 물론 살인교사범이라는 또 다른 치명적인 죄를 범하게 된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 범죄 한 다윗을 책망하신다. 그 책망의 내용을 잘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나단은 다윗의 범죄를 양과 소가 많은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암양 새끼 하나 뿐인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은 것에 비유하였다. 손님 대접은 잘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생존 문제와 같이 절대적인 필요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위해 가난한 자의 식구와 같은 암양 새끼를 빼앗은 것이다. 부자에게는 손님 대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양과 소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것이 부자다. 다윗이 범죄 한 것은 무엇보다 다윗 자신이 부자였기 때문이다.

성범죄가 일어나는 자리는 분야를 불문하고 부자들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왕궁을 버린 싯다르타의 길을 따른다는 불자들, 그들 가운데서도 지위가 높은 승려, 그리고 모든 것을 비우신(케노시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지도자이며 그 가운데서도 성공한 목사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따르고자 하는 석가모니와 예수를 발가락의 때만큼이라도 의식했다면 그들은 부자가 될 수가 없다. 우리는 근본적인 일탈이 바로 부자가 된 것임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분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모든 성범죄자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부자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성범죄가 강탈이라는 사실이다. 힘으로 빼앗는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은 대가를 지불했다거나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나단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새끼 암양은 가난한 자의 자식과 마찬가지이다. 자식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더구나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잔인한 유린이다.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노하여 여호와께 맹세까지 해가며 그런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선언한 후에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않은 죄를 지적하며 그 양 새끼의 4배를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윗 스스로 자신에게 마땅히 죽을 자라고 선언한 것이며 불쌍히 여기지 않은 부자의 죄를 고백한 것이며 그 후속조치로 4배를 갚아야 한다고 배상책임의 범위를 정한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의 죄 용서에 관한 질문의 답과 마찬가지로 무한대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리스도인에게 성범죄는 단순한 용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마땅히 죽을 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가장 잔인한 유린을 당한 피해자들은 똑같이 범죄 한 자들이 아니라 보호받고 보상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자들이다. 특히 부자들은 자신이 하시라도 그런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성범죄용의자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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