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을 함께 걷지 않겠는가!
그 길을 함께 걷지 않겠는가!
  • 최태선 목사
  • 승인 2018.10.09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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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기독교 이전 믿음으로 돌아가자
지난 1월 명성교회 세습반대 피켓 시위 현장에 교인들이 나와서 방해하는 장면(사진: CBS뉴스 캡처)

나는 어제 일인 피켓시위를 하고 있는 분을 찾아갔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그런 피켓시위를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피켓시위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분의 마음을 귀하게 여긴다. 시위가 끝나갈 시점 즈음에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앞을 지나가던 노인 한 사람이 다가와 주의를 주었다. 이런 일을 하면 기독교가 욕을 먹는다면서 하나님께만 기도하라고 하였다. 나는 그 사람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그 사람은 오늘날 한국 교인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분의 말하는 태도가 나를 슬프게 한다. 분노에 찬 그의 모습은 복음이 말하는 사랑의 특성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의 분노에 찬 모습이 오늘날 한국 교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그것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열매라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는 밥을 사러 갔지만 반대로 얻어먹고 돌아오고 말았다.

한 마디로 오늘날 기독교는 자중지란에 빠졌다. 가만 놔두어도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몇 대형교회들이 주변의 거의 모든 교회들을 고사시키고 스스로 자신들의 왕국이 되는 사이에 경쟁이 없어야 할 교회들은 세상보다 더 경쟁하는 곳이 되었고, 소외와 혐오를 불식시켜야 할 교회는 오히려 소외와 혐오를 부추기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본업으로 삼았다. 어제 만난 사람의 표정에 나타난 분노와 폭력적인 태도가 그래서 한국교회의 열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의 표정이 너무도 익숙하다. 너무도 많이 보아온 표정이고 익숙해지다 못해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스도인들의 표정이 되었다. 오늘 저녁에도 우리는 그런 표정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MBC PD 수첩에서 명성교회의 800억 비자금 사건에 대한 보도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명성교회에서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기각되었다. 글쎄 명성교회 교인들도 방송국에 몰려가 항의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현상에 대처하는 그들의 표정은 내가 지금 말하는 그 표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고 원수가 주리면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한다. 오늘날 소외와 혐오를 사명으로 아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기이하고 낯선 일임에 틀림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대형교회에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들이 종교적 기독교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는 종교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는 종교적 기독교는 복음이 말하는 기독교가 아니다.

박해를 받던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무신론자로 불렸다. 그들은 신실하지 않고 신을 존중하지 않는 자들로 여겨졌다. 로마인들이 보기에 그들은 종교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신에 대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 역시 없었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을 신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걸 체험한 이들은 다시 로마의 종교로 되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의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반종교적이라서 위험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신에 대한 숭배예식도 없고, 절대 신도 없고 오히려 신이 인간이 된 삶을 살았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 로마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판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로마에게 불편하고 위험한 사람들로 낙인이 찍혔다.

박해를 하면 할수록 그런 기독교는 더욱 강해지고 번창했다. 초기 기독교는 어떠한 박해에도 소멸되지 않았다. 박해의 상황이 심화될수록 복음이 가진 힘과 영향력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서의 말씀대로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고,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자신들에게 닥친 어려운 상황들을 서로 사랑하며 이겨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죽음조차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진리였다.

그러나 그런 기독교의 위기는 종교의 자유와 함께 찾아왔다. 종교의 자유와 함께 재산을 가질 수 있게 된 교회는 박해 때와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생존에 연연하게 된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가 갖는 가면을 쓰게 되었다. 마침내 제국에 흡수된 종교적 기독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기독교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와 같이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 종교적 기독교를 면면히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가 인간의 욕망을 선으로 추앙하며 공멸의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된 시점에서 오래 전 종교적 기독교가 아니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종교적 기독교 이전에 존재했던 환대와 관용과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애초에 약속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인류의 오직 유일한 빛이며 희망임을 자각하도록 자극하기에 이른 것이다. 복음은 빛으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바로 해법이며 대안임을 오늘 이 어두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명확하지 않은가. 오늘날 교회에 실망한 그리스도인들이여, 그 길을 함께 걷지 않겠는가.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길을 알고 당신의 길을 따르려는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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