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천국과 지옥은 있을까?
과연 천국과 지옥은 있을까?
  • 최태선
  • 승인 2018.10.19 02: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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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식당에서 백종원씨가 한 피자가게를 하는 사람에게 피자를 계속 이렇게 만들면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지옥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파산, 경매, 압류, 신용불량, 노동사무소 등등의 단어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이제 지옥이라는 말이 참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만큼 세상이 살기가 어려워졌다.

오늘날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믿느냐는 질문을 하면 장소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 교회 안에서는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교회 밖으로 나오면 아직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 이들은 유치원생 취급을 당한다.

그러면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 성서는 사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아브라함의 품이나 주님 곁 정도 그리고 구약에서는 ‘게헨나’ 정도가 천국과 지옥을 가리키는 말들로 사용된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믿는 것은 확인되지 않은 것, 혹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어야 믿는 것이다. 확인된 것이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확인할 수 없기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는다.

신약성서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장 분명하게 묘사하는 성서의 기사는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이다. 어려서 주일학교에서 너무나 많이 들었던 이야기이다. 살아서 부자는 행복하게 산다. 반대로 나사로는 불행하게 살지만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부자가 무엇을 잘못해서 지옥을 가게 되었는지, 나사로가 무엇을 잘해서 천국을 가게 되었는지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다.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 따라 이 이야기를 달리 해석하고 이해한다. 나 역시 내 입장에서 이 기사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이해가 합리적인지, 영적인지를 분별하는 것 역시 각자의 몫이다. 조용기 목사 같은 경우는 나사로가 복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설파한다. 그 위대하신 목사님은 철저하게 축복에 매여 있기 때문에 부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나사로가 못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참 불쌍한 분이다. 그 기사의 주안점은 부자에게 있다. 왜 부자가 지옥엘 가게 되었는지가 그 기사의 포인트다. 부자는 자기 상 밑이라는 가까운 곳에 있는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비참한 처지에 있는 나사로에게 자기 입을 닦은 빵조각을 던져주는 것을 자선으로 착각했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만족했다. 그가 지옥에 간 이유는 현저하다. 그는 나사로를 긍휼하게 여길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이 없었다. 다른 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천국이 지옥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곳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다른 기사가 양과 염소의 비유다. 양과 염소로 구분되는 기준은 분명하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를 환대했느냐의 여부다. 주님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와 당신을 동일시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 환대를 행위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 행위는 존재의 변화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양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염소로 구분된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을 간과한 사람들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이 항상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없이 할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 단순한 말씀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이 인간인 한 불평등은 세상의 일부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단순히 세상에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은 모든 제자들에게 구원의 방편이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제자라면 가난한 자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겨야 한다. 그런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열리고 임한다. 핍절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새로운 사회가 불평등한 세상에 빛이 되고, 그 빛이 바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이 없는 복음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런 나를 유치하다고 말해도 할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주님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의미와 다르지만 나는 천국과 지옥이 복음의 중요한 핵심요소라고 생각한다.

백종원씨의 예에서 보았듯이 세상은 일반적으로 돈이 없는 상태를 지옥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공감할 수 없는 상태를 지옥으로 이해한다. 돈이 많으면 오늘날 과학에서 입증되었듯이 오만증후군(Hubris Syndrome)에 감염되어 공감의 능력 자체가 사라진다. 세상이 아는 천국과 지옥은 성서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의 정 반대이다. 내가 이해하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서 들어가는 곳이며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이루어지는 샬롬을 경험하는 곳이다. 우리의 교회들이 바로 그 천국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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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2018-10-20 19:41:19
목사님 천국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고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사는 천국을
맛보다가 최종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성경적
아닙니까?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먼저
가셔서 우리 있을 곳을 예비한 후 우리를 대리려
오신다고 하셨고 그 곳에서 영생한다고 했는데
왜 어떤 목사님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지 이해가 안됩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가운데
임했으나 아직 완성된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한듯 합니다. 나는 죽어 천국가서 영생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