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예수와 다른 복음을 가르쳤나?
바울은 예수와 다른 복음을 가르쳤나?
  • 신기성
  • 승인 2018.11.0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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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뉴스앤조이=신기성 기자] ‘복음이 무엇인가’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지난 11일 키스 가일즈(Keith Geils)는 페토스에 “바울은 어떤 복음을 전했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그는 형벌적 대속론이 복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 현재 십자가에 관한 교리로는 거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형벌적 대속론이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교리는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묘사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폭력성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 하에 인간과 교회가 저지를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형벌적 대속론의 절대화는 예수의 삶과 사역, 예수께서 누구를 만나시고, 어떻게 사셨고, 무슨 대화를 나누셨고, 어떤 종류의 사역을 하셨는지는 지워지고 오직 십자가와 고난만 남는 단점이 있다. 다른 말로하면 예수를 믿는 신앙(Faith in Jesus)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예수의 신앙(Faith of Jesus)은 전혀 생각지 않는다는 의미다.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영과 육에 대한 지나친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는 구원론도 돌아봐야 한다. 천국은 죽은 후에 가는 ‘어느 곳’이라는 공간적 개념만 강조되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예수의 가르침은 무시된다. 천국의 현세적 개념이 경시된다.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시고 엄격하신 분, 인간의 죄에 진노하셔서 반드시 처벌하셔야 속이 후련하신 그런 분으로 묘사된다. 물론 교권을 가진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인양 그런 엄격한 법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

인간의 죄와 속죄에 대한 성찰없이 구원을 얘기하는 것이 너무 순진하고 낭만적인 신학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공식화되고 폭력적이면서도 오히려 값싼 은혜를 낳게되는 형벌적 대속론의 모순과 함께 고려하면 각자의 구원론을 다시금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런 고민을 배경으로 가일즈의 칼럼을 소개한다. 다음은 그의 칼럼 번역 기사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 다르다. 만약 당신이 개혁 교단에 속한 현대 개신교인들에게 묻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될 것이다. 소위 형벌적 대속론 혹은 만족설이라고도 불린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최소한 신약성경 혹은 예수에 따르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 이후 천년 정도나 지나서 등장한 매우 새로운 가르침이다. 형벌적 대속론은 유일한 속죄론도 아니고 가장 오래된 이론도 아니다. 다양한 이론 중의 하나일 분이다. 어쨌든 복음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뭐냐면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 되신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복종시키고 일상 속에서 예수 따르는 법을 배우기 원하는 누구나 그분의 다스림과 통치를 경험하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기간 내내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셨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사실 예수께서는 거의 배타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의 비유는 언제나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으니 ...” 그리고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은 이, 귀한 진주를 구한 이,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 혹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에 관한 이야기 등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거의 모든 것들이 천국 복음에 관해 뭔가를 강조하시려는 것이었다.

 

바울도 같은 복음을 가르쳤다

믿든 안 믿든, 바울 또한 천국 복음을 가르쳤다. 신약 성경은 이를 계속해서 확증한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행 20:25)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하나님의 나라는 ...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행 19:8)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행 28:23)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

예수께서 전파하신 복음과 바울이 전한 복음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른 사도들도 역시 같은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르칠만한 다른 복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8:12은 이렇게 증언한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히 1:8; 1:33; 12:28; 약 2:5; 베후 1:11; 계 1:6; 1:9; 5:10; 11:15; 12:10 등도 마찬가지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리가 읽는 예수의 말씀이나 혹은 사복음서에서 계속 반복해서 얘기하는 증언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 원한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복음서가 아니라) 바울이 말한(예수의 말이 아니라) 단 하나의 구절을 우리가 믿기 원한다. 그들에게 복음은 이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8)

이 한 구절을 이용해서 이것이 복음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예수는 (바울이 아니라) 천국의 복음(좋은 소식)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둘째, 복음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가 아니라 복음서에 들어있다.

셋째, 어떤 신학자도 전체 교리를 성경 속의 단 한 구절을 근거로 주장할 수는 없다.

넷째, 바울과 예수는 위 8절에 나오는 것 같이 같은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한 다음에 “내가 너희에게 전해준 가장 중요한”이라는 말을 언급한다. 이 두 언급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천국에 관해 철저히 설명하려는 의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바울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설명 없이 사용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을 중요한 것으로 설명하지만 예수께서 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다는 구체적 설명은 생략한다.

 

형벌적 대속론이 아니다

나는 바울이 전한 복음도 예수께서 선포하신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와 바울이 전한 복음은 형벌적 대속론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매우 분명하게 예수께서 전파하신 것과 정학하게 일치하는 복음 즉 천국의 복음이다.

심지어 바울이 그의 편지에 종종 사용한 “예수는 주”라고 하는 문구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에서는 왕 혹은 “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누구나 “예수는 주”라고 시인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는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의 전 사역을 통해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이 성서에 대한 “예수-중심” 해석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혼란이 왔다. 바울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갈 1:6에서의 바울의 말도 쉽게 혼동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어떤 기독교인들은 마치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전한 복음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 등 두 가지 복음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한다.

여기서 바울이 얘기하는 바는 그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위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고 끝부분에 집중해 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 1:6-7)

사람들이 은혜의 복음을 떠났다고 바울이 말할 때 그 은혜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

즉 바울의 복음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바울은 자신이 성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지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분투하는 동료 기독교인들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여러 번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바울보다도 먼저 이 복음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바울은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바울이 이 천국 복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바울은 그의 모든 사역을 통해서 이 복음을 전파했다.

2. 이 복음은 기독교 역사상 선포되었던 유일무이한 메시지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평화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엡 6:15). 이것은 세 번째 복음인가? 평화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 혹은 천국 복음과 대조되는 혹은 경쟁하는 개념인가?

 

예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은 하나

그럴 수 없다. 복음은 오직 하나이다. 바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것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그것은 은혜에 관한 복음인가? 그렇다.

그것은 평화에 관한 복음인가? 그렇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 고난, 장사, 부활과 관련된 복음인가? 그렇다. 이 복음을 속죄의 이론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예수께서 특별히 선포하려고 내려오신 그 복음을 완전히 곡해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눅 4:43)

오직 하나의 복음만 있다. 이 복음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이다. 그리고 이 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와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하셨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키쓰 가일즈는 개신교 목사이며 11년 전에 섬기던 곳을 떠나 교회를 개척했고 이 교회는 헌금을 100%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에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Jesus Unbound: Liberating the Word of God from the Bible』 『Jesus Untangled: Crucifying Our Politics To Pledge Allegiance To The Lamb』의 저자이며 iTunes와 Podbean의 Heretic Happy Hour Podcast 공동 진행자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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