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 잡자고 사람 태우는 이민법'
'빈대 잡자고 사람 태우는 이민법'
  • 김성회
  • 승인 2010.06.02 02: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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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이민법 반대 시위 참관기] 애리조나에서는 피부색이 곧 법

▲ 행진에 참여한 3만 여 군중들.

"인종차별이냐 개혁이냐(Racism or Reform)."

멕시코로부터의 불법 이민자와 마약 거래상들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라는 찬성론부터 결국은 유색인종을 표적으로 한 인종차별이라는 반대 의견까지 애리조나 주 SB1070법안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높아지는 가운데, 지난 5월 마지막 주 금요일과 토요일 애리조나 도심 한복판에서 애리조나 주의 이민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애리조나 주 의회가 불법이민자 단속권을 주 경찰에게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주지사가 서명한 것을 반대하는 시위였다.

▲ 기발한 구호와 피켓들.
3만 명이 행진하며 함께 외쳤다. 평화 행진이 있었던 5월 29일 아침, 시위대는 스틸인디언스쿨 공원에 속속 모여들었다. 동부, 서부, 북부, 남부 할 것 없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3만 여명(경찰 추산 2만)의 군중은 오전 10시를 기해 애리조나 주 청사로 향하는 5마일의 행진을 시작했다.

미국 시민이지만 유색인종이라 불법?

구성원의 대부분은 라티노였으나 노조, 교회 교단 등의 참여도 활발했으며 가족과 함께 나온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내가 외계인(Alien)입니까?", "내가 불법으로 보이나?", "나는 미국시민이지만 피부색이 어두우니 애리조나에서는 불법이다", "이민자도 투표를 한다" 등 의 피켓을 든 군중들은 100도에 가까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로 1마일이 넘게 늘어선 대열을 따라 행진했다.

교회에서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다는 에린 타마요 전도사는 미국장로교 교단 소속 노회원들과 함께 주황색 티셔츠를 맞추어 입고 행진에 참여했다. 그는 "나는 애리조나에서 자랐다. 나와 같은 백인 친구들이 며칠 전부터 '시위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 참여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담은 이메일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이민자는 아니지만, 인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수님이라면 시위 현장에 계셨을 것이다"라고 했다.

모두가 어우러진 한마당

민족학교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이하 NAKASEC)는 풍물을 동원해 현장 분위기를 달궜다.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도 북채를 잡고 5마일에 걸친 행진에 동참했다. 행사를 준비한 윤희주 디렉터는 두 아들과 남편과 함께 행진에 참여했다. 그는 "이것은 체류 신분에 관한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민자를 가르는 기준에 피부색과 억양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의 아이들도 범죄용의자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SB1070이다. 이것은 비단 라티노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 "우리의 믿음은 2,000년 된 것이지만, 우리의 생각은 구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는 펼침막을 걸고 시위에 참석한 교회 성도들.
행진을 하는 동안 참가자들은 "Que queremos? Justicia! Reforma Migratoria!(무엇을 원하나? 정의! 이민 개혁!)", "Education, not deportation(우리는 추방이 아닌 교육을 원한다)", "The people united will never be defeated(단결하면 이길 수 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드럼, 브라스 밴드, 아즈카 전통 무용단 등이 더위에 지친 대열에 힘을 불어넣어줬다.

5마일이 넘는 행진이었지만 시민들의 호응은 별로 높지 않았다. 거리는 한산했고, 행진 대열이 주택가를 지나갈 때도 나와서 구경하는 사람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용감한 백인 노인 한 사람이 SB1070을 지지한다는 피켓을 들고 시위대와 언쟁을 벌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 애리조나 주 청사로 행진하는 참가자들.
목적지인 애리조나 주 청사 앞 공원에 도착한 시간은 행진을 시작한지 4시간이 지난 오후 2시경이었다. 이미 연사들은 연단에 올라와 한 목소리로 이민법 개악에 대해 성토하고 있었다.

"SB1070은 잘못된 법이다. 우리의 망가진 이민 제도도 틀렸다. 우리는 이것을 고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1,200만 명의 서류미비 노동자들을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아직도 7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시간당 기본임금과 초과 노동 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애리조나 주가 만든 이민 법안이 망가진 이민 제도를 고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며 노동자를 범죄자 취급하는 제도라는 점에 주목하며 이를 반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미국 최대 규모 노조 AFL-CIO 리처드 트럼카 위원장)

▲ AFL-CIO의 리처드 트럼카 위원장이 연설을 하고 있다.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다시 LA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이런 시위에 참여해본다는 임 할머니는 시위 참여 소감을 전하며 투표를 다짐했다.

"나야 시민권자로 혜택을 보고 있지만, 이번에 와서 애리조나에서 시작된 이 법이 결국 우리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배웠다. 가서 같은 노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야겠다. 새삼 투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번 선거에서는 꼭 투표를 해야겠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NAKASEC의 활동가인 홍정연 씨는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고 검문하겠다는 발상은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비판했다.

"애리조나에서 들은 이야기다. 푸에르토리코(미국령)인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경찰의 불심검문을 당했다. 푸에르토리코인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경찰은 멕시코인이 아니냐고 다그치더니 신분증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구치소로 잡아가 버렸다. 독신이던 그는 일주일이 지난 후 관련 서류(출생증명서)를 제출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애리조나의 뒤를 따라 유사한 법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이것은 유색인종의 경우 시민권자나 아닌 사람이나 상관없이 차별을 당하는 인종차별 법이 될 것이다."

모두가 신분증 없이 묵비권

▲ 크리스 윌리엄 변호사(오른편)와 그의 동료 변호사. LA부터 시위 전 과정에 동참하며 법률 조언을 했다.
이번 시위는 NAKASEC과 민족학교가 주도하여 시위 참가자들을 모집한 후 함께 1박 2일을 보내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금요일 새벽 6시 30분의 민족학교 주차장은 매우 분주했다. 민족학교의 활동가들과 시위참여자들이 마실 물과 도시락을 비롯하여 징, 꽹과리, 만장 등을 차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70대 노인들부터 이제 중학교를 들어갔을 법한 아이들까지 버스 안은 시끌벅적했다. 시카고에서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고, 만약 있을 법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변호사도 동행했다.

애리조나까지는 400마일 거리, 캘리포니아 주 경계선을 넘기 전에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NAKASEC의 활동가인 올리비아 박 씨는 SB1070이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 설명했다.

"새로 만들어진 애리조나 주 법에 따르면 경찰관이 이유 있는 의심이 생길 경우 체류 신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이론적으로는 시민권자라고 하더라도 출생증명서를 소지하고 다녀야한다는 것이다. 법안에는 이유 있는 의심에 대해 구체적으로 적은 바는 없지만, 인종에 따라 차별할 것은 불문가지다."

경찰이 차에 올라타는 경우에 대한 실전 훈련이 이어졌다. 민족학교의 스태프가 경찰 역할을 맡아 버스에 탄 승객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라", "영어를 알아듣는가?", "옆에 탄 사람은 가족인가" 등의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이미 교육을 받은 참가자들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애리조나 주 내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묵비권을 행사하라는 설명 때문이었다.

▲ 신분증 대신 소지하고 있었던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내용의 쪽지.
이어서 실무진들이 버스에 탑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신분증을 수거했다. 버스에는 서류미비자들도 함께 탑승해 있었는데 모두가 공동 운명체로 행동하자는 것이었다. 신분증 대신 건네진 쪽지에는 영어와 한국말로 "나에게는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변호사의 조언을 받기 전까지, 어떠한 질문에도 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버스에 동승했던 크리스 윌리엄 변호사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만약에 불심검문을 당하게 되면 묵비권을 행사하며 이 쪽지를 내밀라는 것이었다.

애리조나 국경선?

▲ 존 매케인 상원 의원 사무실 안에서 항의하고 있는 시위대.
애리조나 주 경계선을 넘는 일은 마치 국경선을 넘는 듯한 긴장감이 있었다. 별도의 검문 없이 버스가 도착한 곳은 존 매케인 상원 의원 사무실. 몬태나, LA, 시카고, 워싱턴 등지에서 속속 사람들이 도착했다. 100여 명의 시위대는 곧바로 건물 1층에 위치한 의원 사무실로 직행했다. 관계자들이 상원 의원과의 면담을 신청한 상태로 건물 로비에서는 시위대가 "인종차별이냐 개혁이냐(Racism or Reform)", "이민개혁을 주장하다 배신한 매케인"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의원 사무실 측의 신고를 받고 십여 대의 경찰 차량이 출동해, 사유지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윌리엄 변호사가 항의를 하자 경찰은 "전부 다 잡혀가고 싶나"며 당장 빌딩에서 나갈 것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건물 앞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민족학교의 풍물패가 사물놀이로 행진을 주도했다.

▲ 면담 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민족학교 활동가.
관계자들이 매케인 의원실의 보좌관들과 면담을 하고 나와 "매케인 의원은 면담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결과를 전해왔다. 매케인 의원이 주말 내내 애리조나 주에 머물 예정이기 때문에 매케인 의원을 따라다니며 시위를 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해산을 했다.

창고에서 하룻밤

▲ 숙소로 사용했던 창고.
이번 시위를 주도한 알토애리조나 측에서 준비한 축제에 참가한 시위대가 숙소로 돌아온 것은 해지고 나서였다. 피닉스 시와 가까운 곳에 있는 창고 건물을 주최 측에서 마련해 주었다. 애리조나 주에 대한 불매운동의 일환으로 숙소도 무료로 쓸 수 있는 곳을 찾은 곳이었다.

상당 기간 방치되어 있었던 듯한 창고는 먼지가 심하게 날리고 있었고, 애리조나의 폭염으로 달궈진 지붕은 식을 기미가 없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50여 명의 참가자들은 군말 없이 각자 준비해온 침낭을 꺼내고 잠을 청했다.

▲ 시카고 마당집의 이은영 씨.
시카고에 있는 마당집이라는 단체에서 청소년 담당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는 이은영 씨는 주일 오후 1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수소문 중이었다.

"전에는 한인 교회를 다녔었는데, 드림 법안 운동 등을 하면서 교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섬기던 교회가 두 동강이 나는 아픔을 겪고 난 후 지금은 윌로우크릭교회를 다니고 있다."

할아버지가 목사라는 그는 "지난 3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시위와 이번 시위에 대해 시카고 지역의 많은 교회들에 전화하고 편지를 보내봤지만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민자의 문제를 이민 교회가 신경을 써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냐는 것이었다.

 

 

▲ 대열과 함께 행진하고 있는 민족학교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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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ybear 2010-06-03 14:17:06
직접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생생한 기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