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 목사의 한국행, 금의환향인가?
미주 한인 목사의 한국행, 금의환향인가?
  • 김기대
  • 승인 2010.06.24 1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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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큰 것' = '출세한 것' = '잘된 것'?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금의환향은 초나라의 항우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다. 자신의 고향 팽성에 도읍을 정하고 싶었던 항우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 사람들에게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결국 직언을 하는 한생을 죽이면서까지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다가 영원한 라이벌 유방에게 패하고 만다. 항우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사실로만 보면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출세를 의미하는 고사성어로 보기에는 좀 슬픈 구석이 있다.

이민자인 우리들에게 고향은 늘 그리운 곳이다. 이민 올 때 가졌던 새로운 땅을 향한 두려움은 옛이야기로 남겨 두고 성공한 모습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이민자들의 소박한 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경제위기 속에서 역이민을 결정한 주변 사람들을 보면 금의환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업에 실패해서, 또는 신분문제 때문에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쓸쓸한 모습과는 달리 최근에 금의환향에 어울리는 귀향의 소식이 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에서 이른바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들이 한국의 대형 교회에 청빙 받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선교', '비전' 등등의 용어로 귀향의 변을 내세우며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금의환향의 욕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목회하는 곳보다 작은 교회로 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없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항우가 무리하게 팽성 도읍 이전을 재촉하게 된 것은 당시 거리에서 떠돌던 노래 때문이었다. "부귀해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면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과 다르리"라는 노래에 자극받은 항우에게는 어떤 간언도 들리지 않았다. 고작 비단 옷을 입고 으스대고 싶었던 항우에게 역사는 냉정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비단 옷을 입어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것이 세상에서 노래하는 출세의 기준 때문이라면 기독교인들은 그 옷을 과감하게 벗어야 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세상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에릭 프롬은 명저 <소유냐 존재냐>에서 아브라함을 존재형 모델로 보았다. 모든 것을 가졌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아무 보장도 없는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으로 떠났던 아브라함이야 말로 기독교인들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여행 때 두 벌 옷을 가지고 떠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지금 상태도 조그만 교회 목사들과 비교가 안 되는 완벽한 조건인데 그보다 더 보장된 곳으로 가는 분들을 보며 금의환향의 고사를 떠올리는 것은 나만의 왜곡된 시각일까.

더욱 슬픈 것은 가는 이나 보내는 이나 모두가 '잘 되어서' 가는 이에게 축하를 보낸다는 사실이다. 보내고 싶지 않은 이들도 헤어짐의 아쉬움 때문이지 잘 되어서 간다는 데는 이견을 달지 않는다. 어느 샌가 우리 사이에 '큰 것', '출세한 것'이 '잘된 것'이라는 등식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도 기독교인들에게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소유형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질과 능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의 출세 기준에 자신을 맞추고 싶어 한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 그럴듯한 존재형 용어들을 거론하며 자신을 감추어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알고 계신다는 생각에 갑자기 두려워진다.

김기대 / 평화의교회 목사

* LA 기윤실 호루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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