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에 대한 과민 증세
인종차별에 대한 과민 증세
  • 강희정
  • 승인 2007.05.29 21: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미국 엿보기 4 - 과도한 피해의식 때문에 생긴 오해일 수도

▲ 집 앞의 나무들에 TP(Toilet Paper)장식을 한 모습.
작년 여름에 남편 혼자 미국에 남겨 두고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 갔을 때 일입니다. 어느 날 미국에 있는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려고 나와 보니 우리 집 앞뜰 나무마다 온통 하얀 휴지들이 덮여 있다는 것이었지요. 이전에 우리 동네의 몇몇 집에서 두어 번 본 기억이 있어서, 우리의 대화는 누가 그것을 우리 집에 하였을까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졌지요. 그때만 해도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가 화장실용으로 쓰는 두루마리 휴지를 가지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용도로 쓰더라고요. 그들은 그것을 통틀어서 T.P(Toilet Paper)라고 부르더군요. 한번은 큰아이 학교에서 학부모들이 수업을 참관할 수 있도록 교실을 개방했던 날에 보았습니다.

그날 마지막 시간에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자유롭게 즐기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중 어떤 학부모 한 사람이 가운데 서 있고, 아이들은 화장지로 그 사람을 둘둘 말기 시작하더라고요. 나중에 보니 온통 휴지로 돌돌 말린 모습이 마치 미라처럼 보였습니다.

또 다른 한번은 초대받아 간 집에서 보았는데, 집안 곳곳에 화장지를 너울너울 풀어 놓아 장식 효과를 냈더라고요. 제 눈에는 오히려 지저분하게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즐기더군요. 그리고 졸업 시즌이면 주변의 몇몇 집들에서 나무마다 화장지들이 너울거리는 것을 가끔씩 볼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우리 집에 T.P를 한 사람들이 누구일까 추측하면서 전화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그러니까 한국 시각으로는 밤 10시 즈음에 미국에 있는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다시 왔습니다. 아침에 또 출근하려고 문을 열어 보니 현관 앞에 갈색 종이로 무엇인가 싸여 있는 것이 있었는데,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그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것은 개똥도 아니고 사람 똥이었대요. 개똥이라면, 개들이 주로 사료를 먹고 커서, 무르지도 않고 적당히 말라 있으며 냄새가 지독하지 않은데, 우리 집 앞에 있던 그것은 그렇지가 않았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그것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군가 의도적인 계획 하에 벌인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그 전날 우리 집 앞뜰에 걸쳐 있던 화장지와 그 날 집 앞에 놓인 인분의 관련성을 추론하면서, 걱정을 하기 시작했지요. 우리는 누군가 우리를 대상으로 하여 의도적인 테러를 벌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시아인이 몇 사람 살고 있지 않은 우리 동네에서 인종차별주의 의식을 가진 누군가가 벌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나는 바로 경찰서에 신고를 하라고 남편을 채근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10년 넘게 살다가 귀국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밤 10시 30분이 넘었는데도 말이지요. 이야기를 들은 그 친구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많이 살던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일이지만, 보수적인 중부 지역에서는 일어날 법한 인종차별적인 증오 범죄(Hate crime)라는 해석을 내리더군요.

그때부터 나는 우리에게 그러한 짓을 할 만한 사람들이 누구일까 하고 생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런 일을 벌일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나 우리가 정원 관리를 잘 못 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누구인가 이런 짓을 꾸민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지요.

우리 같은 아시아인들은 외모의 차이 때문에 무엇인가 실수하거나 잘못된 일을 하게 되면 금방 사람들에게 그 사건이 각인되어 사람들 눈 밖에 나게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던 터라 각별히 행동에 신경을 써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피해자인 셈인 우리 스스로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고 있었지요. 일종의 '피해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늘 '눈치 보기'를 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같은 이방인들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경찰에 이런 이야기를 전화로 알렸더니, 경찰에서는 순찰을 보다 강화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답니다. 나는 남편에게 우리 가족이 한국에 나와 있고 일하느라 밤늦게 들어와 잠만 자고 가고 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하면서 일찍 귀가해서 불을 환하게 켜놓고 지내라는 당부를 하였지요.

다음 날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맘 속으로 졸이며 하룻밤을 지냈는데, 아침 출근길에 전화를 한 남편은 현관 앞에 아무것도 없고 집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보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 나는 우리와 아주 각별하게 지내는 뒷집의 린다라는 아주머니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가끔씩 낮 동안에라도 우리 집을 주의해서 봐 줄 것을 부탁하라고 덧붙였습니다. 남편은 퇴근 후에 그 집에 들러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틀 동안 벌어진 일 때문에 한국에 있던 나는 온갖 좋지 않은 상상을 하였습니다.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인종 테러를 앞으로 우리가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까지 하면서, 한국에 나와 있는 이 참에 차라리 미국 생활을 정리해 버리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요.

우리가 이웃들과 참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지요. KKK라고 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생겨난 인디애나주와 달리, 오하이오주는 같은 중부 지역이라 하더라도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인종차별을 심하게 하지 않는 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가 우리 이웃에 있다고 생각하니 계속 불안한 마음에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요.

그러나 다음 날, 남편에게서 받은 전화 한 통화로 그동안 해오던 걱정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뒷집의 린다 아주머니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네는 몇 년 전에 누군가가 돼지 머리를 현관 앞에 놓아두었던 일도 있었다며, 청소년들이 가끔씩 자기 친구들 집에 그런 일들을 한다고 했답니다.

저녁 때는 옆집에 사는 제프라는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아마도 자기 아들 친구들이 주소를 착각하여 우리 집에 화장지 장식을 해 놓아 지저분하게 한 것 같다며, 자기 아들들이 낮에 대충 청소를 했다고 하더랍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제프의 아들을 축하해주는 의미로 친구들이 벌인 일이었는데, 주소를 잘못 알고 우리 집에 사건을 벌였던 것이지요.

인종에 따른 차별이 구조적으로 문화적으로 존재하는 미국에 살면서, 그것에 너무 예민한 나머지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일도 그것과 연관지어 생각해 오해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민자로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만날 때 그것을 인종차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 자신의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더라구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