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데 물어볼 수 없었던 '삼위일체 교리'
궁금한데 물어볼 수 없었던 '삼위일체 교리'
  • 송병주
  • 승인 2010.07.23 14:16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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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송병주 목사의 '삶과 신앙의 의문을 찾아서' 1편

목회자 중심의 메시지가 아니라 성도들의 관심에 답하기 위한 '삶과 신앙의 의문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연속 설교(선한청지기교회 송병주 목사)를 연재합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항상 공격의 대상이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머리 셋 달린 괴물로 만들었다', '로마적 이교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악한 교리다'는 등의 공격이 많았고, 그래서 폐기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여호와증인을 2대째 50년간 믿어온 분과 심각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나보고 그런 말을 했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닌데, 로마의 우상숭배에 빠진 기독교가 하나님이 아닌 겸손한 분 예수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거짓 교리를 만들어 겸손한 예수를 더러운 우상으로 변질시켰다. 하나님이 아닌 분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사단이 하는 짓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대답했다. “예수는 하나님이신데, 근대의 이성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인간으로 만드는 거짓 교리를 만들어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인간으로 변질시켰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사단이 하는 짓이다.”

그분의 견해대로 결국 우리 둘 중의 하나는 사단이다는 결론을 맺고 끝을 낼 수밖에 없었다.

▲ 삼위일체 신학을 설명하는 그림이 그려진 방패(Scutum Fidei). (출처 : 위키피디아)
삼위일체에 대한 단순한 결론 = '묻지마 다쳐'

삼위일체 신앙의 문제는 이단의 문제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삼위일체를 전혀 다루지 않는 것 또한 문제다. “이해하기 어렵다. 잘못 건드리면 이단 소리 듣는다. 무조건 믿음을 가져라. 몰라 묻지마!” 분위기로 일관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서운 분, 잘못 건드리면 큰 일 나는 분”이 되어 버렸고 결과 삼위일체 속에 담긴 풍성한 은혜는 모두 사라진 채 교리 속에 봉인된 전설처럼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결론은 단순한 결과를 남겨 두었다. “묻지마 다쳐!”

이단이나 개신교나 모두 삼위일체를 분명코 잘못 접근하고 있다. 삼위가 드러난 이유, 일체를 이룬 이유… 모든 것의 중심에는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구원의 열정이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접근 바로잡기

먼저 삼위일체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를 갖게 한 장벽은 바로 삼위일체를 철저하게 '존재론적 이해'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하나님 세분께서 천국에서 어떻게 존재하시는 열심히 연구한 것이다. 독수리 오형제가 합체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이 땅이 아닌 저 하늘에서 세분이 어떻게 붙어 다니는지 알려고 하는 의미 없는 연구를 한 것이다. 세분이 천국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우리가 안다고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삼위일체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없는 하나님의 관계 연구가 아니다. 기억하라. 삼위일체는 우리 때문에 이 세상에 드러나고 계시된 지식이다.

삼위일체는 절대 철학적, 존재론적 지식이 아니다. 내 삶의 모퉁이마다 나타나는 경험적이며 구원론적 지식이다. 삼위일체는 죄인 된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령의 열정을 체험하고 경험하여 고백하게 되는 지식이다.

나를 불러주신 아버지의 사랑,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들의 사랑, 나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고백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감격과 찬양으로 터트리는 탄성, 감탄사가 바로 삼위일체의 고백인 것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그러므로 이것은 책상 앞에 앉은 신학자들이 펜대 굴려가며 이해하는 신학이 아니라 시장에 좌판 깔아놓고 나물 파는 할머니도 고백할 수 있는 구원의 감격인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현장은 저 하늘 위가 아니라 바로 내가 구원받는 구원의 현장이다. 삼위일체는 천계의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속계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간증에 있다. 삼위일체는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구원받는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천국에는 예수님이 대신 죽어야 구원받을 천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이 땅의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였다. 천국에 방언을 받아야 할 천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이 땅의 구원받은 백성들을 인치시기 위함이었다.

삼위일체는 이 땅의 죄인들을 살리기 위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총력전의 결과이다. 삼위일체를 '신비'라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죄인인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신비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셨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은 숨길 것 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셨다. 밑천 다 드러내셨고 다 보여준 것이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는 계시의 정점이다.

여호와, 임마누엘, 보혜사

▲ 포스트 르네상스 시대 기독인들의 전형적인 삼위일체의 이해를 보여주는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관점의 전환 속에서 삼위가 어떻게 나타났고, 일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각 위격의 대표적인 이름을 통해서 살펴보자. 후술하겠지만, 삼위의 각 위격이 나타난 이유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였고, 결국 삼위가 하나 되신 것도 우리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총체적 표효이자, 일반적으로 성부로 인식되는 존재는 '여호와'이다. 여호와의 이름 역시 인간의 구원, 우리와 함께 하심을 근거로 한다. 여호와라는 말은 영어로 "I am who I will be"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의미는 “I will show you something. At that time you know who I am”가 된다. "뭔가 보여줄 테니 그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쉽게 말해서 김두환이 종로를 거닐고 있는데, 15살짜리 노상강도 셋이서 김두환에게 통행료를 내라고 했다. 김두환은 “나! 김두환이야”라고 말했는데, 이들은 웃으며 “네가 김두환이면 난 김두환이 할아버지다. 딴 소리 말고 돈 내”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두환이 돌려차기로 셋을 쓰러뜨리고 목을 밟게 되자 그들은 비로소 “형님” 하게 되고, 이때 김두환이 “내가 김두환인 줄 알겠느냐?” 하게 된다. 여호와를 김두환과 비교해서 그렇지만, 이것이 I am who I will be라는 이름 속에 담긴 의미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여호와,구원의 이름

여호와는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이름이다. 여호와의 이름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여호와의 이름이 나타나는 순간은 항상 고통 받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있고, 그들을 살리는 여호와의 구원이 실현되고, 그리고 “내가 여호와인줄 알겠느냐”로 이어진다. 강퍅한 바로가 백성들을 핍박할 때, 앞은 홍해바다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달려올 때, 그때 함께하시며,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말과 적군을 무찌르시며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시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여호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하실 때 경험하게 되는 구원의 이름이 여호와인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되는 곳은 저 하늘이 아니라 바로 구원이 필요한 우리의 삶의 현장 한 가운데인 것이다. 출 3:12을 찾아보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 있으리라” 13절부터 자신의 이름이 여호와인 것을 본격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여호와의 속성은 “반드시 함께하리라”는 약속 위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호와”란 이름의 근본 전제가 무엇인가? “구원받아야 할 백성 그리고 함께하심”이다. 이 약속은 10가지 재앙에서도 홍해 앞에서도 그리고 40년 광야생활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신실하게 성취되었다.

성자의 대표적인 별칭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 한가운데 눈에 보이도록 몸을 입고 하나님이 직접 함께하신 성자의 이름이다. 아예 이름 자체가 “함께하심”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하신 것이 성자 임마누엘이다. 이 이름도 여호와와 동일하다. “구원받아야 할 백성 그리고 함께하심”이다.

보혜사,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한

성령님의 대표적인 별칭은 보혜사이다. 이 보혜사라는 말은 영어로 counselor로 번역된다. 파라클레이토스라는 이 보혜사에 대해서 요한복음(14장 16-17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중략)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한다.

즉 지혜의 영이라 우리에게 진리를 알게 하시겠지만, 역시 기본 전제가 무엇인가? 바로 “함께하심”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방언도 예언도 신유의 능력도 주시는 분이시지만, 근본적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doing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being 때문이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보혜사는 아들이 떠나시는 자리에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결국 무엇인가? 여호와, 임마누엘, 보혜사 모두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들이고 그렇기에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은 결국 또 다른 여호와이며 또 다른 임마누엘인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위격을 가지시면서 한 분이신 것이다.

성자와 성령의 근본적인 전제도 결국 무엇인가? “구원이 필요한 백성과 함께하심”이다. 치명적 장애와 귀신들림, 절망과 포기 속에 살던 인생에게 함께하셨고, 예수님이 떠난 이후 성령께서 오려서 모든 백성들에게 주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하며 모든 핍박을 이기는 능력을 갖게 하셨다. 성자와 성령의 사역 역시 치열한 고통의 현장 속에 온 몸으로 함께하여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이기게 하는 능력으로 역사하셨던 것이다.

삼위일체, '에라, 모르겠다'는 지식 아닌 감격의 찬양

이상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삼위가 드러난 것도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향한 구원 때문이었고, 일체가 일어난 곳도 천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심의 결과였던 것이다. 야훼, 임마누엘, 보혜사가 모두 드러난 이유도 바로 여러분 때문이며, 삼위 하나님이 하나 되신 이유도 바로 여러분 때문이다. 야훼, 임마누엘, 보혜사가 모두 계시되신 곳도 바로 여러분 자신이며, 삼위하나님이 하나 되신 곳도 바로 여러분 자신이다. 하나님이 다르게 보인 것도 여러분 때문이며, 하나님이 한분으로 보인 것도 여러분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처절하게 최선을 다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어려운 지식이 아니라 감격의 지식인 것이다. 삼위일체는 갸우뚱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끄덕여야 할 지식이다. 삼위일체는 '에라, 모르겠다' 할 지식이 아니라 감격의 찬양으로 터트리는 고백이 되어야 할 지식인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이 있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삼위일체가 깨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완벽한 관계,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조합인 삼위일체가 붕괴되어진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순간이었다.

40일간의 금식을 도왔던 성령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음성도 없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던 아들의 절규 앞에서 단 한마디의 반응도 응답도 없다.

십자가의 그 순간, 오직 아들 혼자만의 절대 고독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삼위일체가 붕괴되는 것은 누구 때문인가? 바로 우리의 구원 때문이었다. 아들의 십자가 사건 때에, 아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까지 붕괴 되었던 것을 잊지 말라. 삼위가 나타난 것도 우리의 구원 때문이고, 일체가 나타난 것도 우리의 구원 때문이며, 삼위일체가 붕괴되는 천지가 개벽할 사건도 우리의 구원 때문이었다.

'목숨을 건 사랑을 논리로 이해하려 들지마라'

▲ 삼위일체 신학은 앞뒤 생각 가릴 것 없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던지신 하나님의 가슴에서 나온 행동의 결과이다.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 목숨을 주기까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목숨을 건 사랑을 머리와 논리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해서 가슴으로 쓰신 하나님의 논리가, 그리고 우리를 사랑해서 총력전을 다 쓰신 하나님의 구령의 열정이 삼위일체에 녹아있다. 삼위일체는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앞뒤 생각 가릴 것 없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던지신 하나님의 가슴에서 나온 행동의 결과이다. 그래서 사랑의 가슴이 없는 사람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것이 무엇인줄 안다면 가슴 아프고 시리게 와 닿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학교 다니면서 삼위일체를 소위 이해해보려고 조직신학 책들을 꺼내어 놓고 열심히 연구했다.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삼위일체 연구였다. 책상위에 온갖 서적 올려놓고 읽어도 내 가슴과 영혼을 움직이는 감격이 없었다.

그러다가 요한복음 14장을 폈다. 보혜사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곳이니 한번 살펴본 것이다. 그러다가 14장 16절을 읽었고 성령님의 오심이 “영원히 너희와 함께하게 하심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여호와의 이름이 처음 나타난 출애굽기 3장을 봐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다시 폈더니 출애굽기 3장 12절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니”였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이미 말할 것도 없었고… 전율이 밀려왔고, 깨달음의 감격보다 큰 감사의 눈물이 흘렀던 기억이다.

삼위가 드러난 것도 나의 구원 때문이었고, 삼위가 하나 되신 것도 나와 함께하신 결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감사했다. 이런 죄악된 나를 당신의 보좌로, 당신의 좌소로, 당신의 집으로, 당신의 성전으로, 당신의 나라로 삼으셨다는 것이었다. 삼위일체의 신비한 연합에 이 죄인을 동참시켜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은 죄인인 우리의 가치를 하늘 가치로 바꾸어 버리신다. 삼위하나님이 하나 되셔서 이 낮고 천하고 더러운 우리를 당신의 좌소로 삼으셨다. 하늘에 있을 천국을 이 천한 우리에게까지 끌어 당기셨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 아니라, 우리를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로 만드는 은혜의 통로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미국 백인 목사에게 입양된 한국 전쟁고아가 있었다. 그는 부모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다른 피부색으로 받는 놀림과 스트레스로 인해 많은 방황을 했다. 어린 시절 스스로 “버림받은 존재”라는 상처를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전쟁 중에 많은 아이들이 버려졌다는 말을 들으며 사랑받지 못한 존재, 버림받은 존재라는 상처를 이기지 못했다. 버림받은 자라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많은 방황 속에 살아가는 아들에게 백인 목사인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한국으로 여행을 갔다. 찾아간 곳은 실개천이 흐르는 작은 다리 밑이었다.

“이곳은 네가 발견된 곳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많은 한국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 모두 피난을 떠났다. 그때 네 생모와 생부는 젊은 부부였다. 갓 낳은 너를 데리고 그 추운 겨울에 제대로 회복도 안 된 몸으로 피난을 떠났던 것 같다. 그렇게 피난을 오다 결국 추운 겨울 날씨를 피할 길이 없었고, 이 다리 밑으로 내려왔다. 너를 살리기 위해 그 두 사람은 옷을 모두 벗어 너를 감싸 안았고 두 사람은 벌거벗은 몸으로 너를 가운데 두고 꼭 껴안았다. 그 다음날 지나가던 미군들이 네 울음소리를 들었고, 알몸으로 죽은 젊은 부부 사이게 있는 너를 발견했다. 죽은 두 부모의 마음을 알았기에 군목이었던 내가 너를 입양하게 되었던 것이다. 네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느냐? 단지 네가 몰랐을 뿐 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란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벌거벗음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벌거벗음이다. 우리를 살리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신 계시의 정점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벌거벗겨지는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셨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에 대한 신비감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아니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에게 파악당하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철옹성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우리를 살리려고 몸부림치신 사랑의 하나님의 벌거벗음이다. 애미와 애비의 심정을 갖고 우리를 살리려 몸부림치신 가슴의 논리의 결과이기에 그 심정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눈물과 감격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눈을 감아본다. 나를 부르신 아버지, 범죄하고 떠났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금도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본다. 나의 병든 마음과 육신을 치유하신 아들, 여전히 완악한 나를 위해 벌거벗겨져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리신 아들을 본다.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 하는 성령님의 오열에 가득한 기도의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역사하시는 삼위하나님은 이런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한 마음으로 한 열정으로 한 눈물로 역사하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상하다. 삼위일체라는 이 교리적 표현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눈물이 흐른다.

송병주 목사 / 선한청지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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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 2015-05-22 14:29:08
결론은 '나도 몰라. 묻지마'네요. '묻지마 다쳐'랑 무슨 차이가 있는 거죠?

바두기 2010-07-25 19:59:06
마태복음 28:19의 말씀입니다. 삼위일체를 의심하시는 분들은 왜 마태복음에서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레를 베풀고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했는지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고후 13:13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셋이 하나라는 말은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그러나 십분 양보해서 "삼위일체"란 단어 자체를 부정한다 해도 성경의 전체적 내용으로 보아 예수님과 성령님 또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되며 이것을 부인하는 인간이나 종교는 이단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동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삼위일체라고 말한거라 믿습니다. 우물속 올챙이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려다보니 참 고생들이 많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잘 이해는 안가도 충분히 믿어집니다.

바두기 2010-07-25 19:52:13
마태복음 28:19의 말씀입니다. 삼위일체를 의심하시는 분들은 왜 마태복음에서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레를 베풀고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했는지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고후 13:13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셋이 하나라는 말은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그러나 십분 양보해서 "삼위일체"란 말 자체를 부정한다 해도 성경의 전체적 내용으로 보아 예수님과 성령님 또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되며 이것을 부인하는 인간이나 종교는 이단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동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삼위일체라고 말한거라 믿습니다. 우물속 올챙이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려다보니 참 고생들이 많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신은 한 분 뿐입니다. 잘 이해는 안가도 충분히 믿어집니다.

kjw7007 2010-07-24 07:34:47
실존적인 면에서 눈물이 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만 존재론적으로는 그래도 여전히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sam 2010-07-24 13:05:57
t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