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화해와 평화의 사도
우리는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화해와 평화의 사도
  • 김종희
  • 승인 2007.06.11 2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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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Pentecost 2007과 성서한국대회를 보면서

6월 3일부터 6일까지 워싱턴DC에서 열린 Pentecost 2007이 막을 내렸다. <미주뉴스앤조이>는 박지호 기자가 나흘간 참석해서 취재했다. 독자들은 이런 기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예상했던 바다. 이 행사를 보고 난 다음 한국에서 곧 열릴 성서한국대회와 비교하면서 참고할 만한 점들이 몇 가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쪼가리 믿음·모순된 믿음·뒤틀린 믿음

▲ Pentecost 2007의 주제는 '가난'. 수십년 동안 이론과 실천 영역에서 갈고 닦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미국의 교회와 교인들은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정치 지도자들은 '빈곤의 문제'를 정책의 주요 과제로 설정할 수 있도록 압박했다. (박지호)
이번 대회에는 수십 개의 기독교 단체 지도자들이 참여했으며, 회비를 내고 참가한 인원만 1,000명이 넘었다. 대회는 미국 정치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소저너스>를 중심으로 여러 단체가 함께 준비했다. <소저너스>는 짐 월리스라는 리더에 의해 1971년부터 시작되어 30년이 넘도록 언론·공동체·사회 운동 등을 종합적으로 실천해온 곳이다. 2005년 출간된 <God's Politics>라는 짐 월리스의 책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사회적 울림이 크다. 여기에 로널드 사이더 같이 연륜 있는 복음주의권의 대표적인 신학자와 요즘 미국 20대에게 샛별처럼 떠오르고 있는 쉐인 클레어본 같은 젊은 활동가들이 결합하여, 대회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이번 대회의 주제는 '가난'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에서 '가난'은 2008년 대통령 선거 주자로 나설 이들을 불러 세울 만큼 뜨거운 이슈일까. 그렇다. 3,600만 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연명하고 있으며, 그중 1/3이 넘는 1,300만 명이 어린이들이다. 지금도 뉴욕·워싱턴·LA 등 커다랗고 화려한 도시 다운타운의 바로 코밑에는 노숙자들이 즐비하다. 마약과 술에 중독되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방황하는 이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길바닥에 주사바늘이 굴러다니고 길거리에 쳐놓은 텐트 안에서 매춘을 하고 있다. 물질의 영이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어두운 그림자는 더욱 진하게, 더욱 넓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는 법.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교회와 국가가 날마다 수프를 끓이고 빵을 만들어서 이들을 먹여주자는 얘기인가. 물론 그것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의 핵심적인 가치가 뒤집어지지 않고는 가난의 굴레는 반복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유대인의 선민사상 못지않게 강고한 백인들의 선민의식, 거기서 비롯된 인종차별·경제 양극화·다른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 야욕의 팽창 등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세속적 가치 위에 미국이 서 있는 한, 가난의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가난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가 대다수 미국 교회와 교인들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다. 철저히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종교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문제가 관심거리가 될 수는 없다. 최근 설문조사에 의하면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이 일반인들보다 무감각하다. 반면에 '동성애' '낙태'와 같은 문제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신앙적 가치에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근본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오랫동안 동성애와 낙태와 같은 문제에만 집착하고 그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힘을 키우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해온 탓이 크다.

▲ 백인, 흑인, 해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의 복음주의 활동가들이 마음과 뜻을 모으고 있다. 미국 복음주의권에서 샛별처럼 떠오르고 있는 쉐인 클레어본이 다른 패널들과 함께 얘기를 하고 있다. (박지호)
그러나 한편에서는 전쟁을 반대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양심적 세력의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같은 책으로 한국에도 이미 잘 알려진 로널드 사이더 교수는 수십 년 동안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강조해왔다. 짐 월리스 역시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30년이 넘도록 기아와 빈곤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심과 정부의 정책을 촉구해왔다. 얼마 전부터는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이나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처럼 대형 교회 목사들도 지구 온난화 문제, 아프리카의 기아와 에이즈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고 있다. 부시 정부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고문행위에 대해 미국복음주의협회가 최근 한 목소리로 반대하기도 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를 교회라는 공간 안에 가둬두거나 죽은 다음 갈 곳이라는 시간 안에 가둬두고는 '세상 등지고 십자가만 보게 하는' 반쪼가리 믿음을 거부하는 목소리이다. 짐 월리스가 얘기하는 것처럼, 뱃속에 있는 생명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면서(낙태 반대) 이미 태어난 생명은 무참히 짓밟는 전쟁을 지지하는 모순된 믿음, 성경에서 몇 번 언급한 동성애 문제에는 목숨을 걸면서 성경에서 수도 없이 언급한 가난 문제에는 애써 외면하는 뒤틀린 믿음을 거부하는 목소리다.

늘 그렇듯이 이런 목소리들이 대세를 장악할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나라, 누룩과 같은 하나님나라, 밭 속에 숨어 있는 보석 같은 하나님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화두가 '가난'이라면 한국의 화두는 '통일'

올해 여름 한국에서 성서한국대회가 열린다.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닷새에 걸쳐 강원도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교에서 열리는 성서한국대회의 주제는 ‘통일’이다. 하나님나라의 핵심 가치인 '평화'가 깨지고 갈등과 불신의 어두운 영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바로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한반도이다. 분단된 땅, 분단 시대라는 시공간 속에서 '화해'와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작업을 벌여야 한다. 교회 안에만 갇혀 있고 죽은 뒤에나 기대하는 하나님나라의 허위의식을 깨고,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일궈나가야 하는 책임과 부담을 안고 있어야 한다.

▲ 2006년 열린 성서한국대회 모습. 2007년의 주제는 '통일'이다. 기독 청년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며 준비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사진 제공 성서한국)
미국에서 '가난'을 화두로 삼았듯이 한국에서 '통일'을 화두로 삼은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일이다. 이번 대회를 통해 기독 청년들에게는 통일을 준비하고 실천하는 삶에 대해 도전을 주게 될 것이고, 많은 통일 관련 기독 단체들은 먼저 마음으로 통일하고 연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Pentecost 2007은 2008년 미국 대선 주자들을 한자리에 불러서 가난에 대한 관심과 비전을 물었다. 그리고 CNN이 생중계했다. 성서한국대회도 2007년 대선 주자들을 불러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통일 의식과 비전을 따져 묻는 동시에, 통일에 대한 기독교 내 양심적 세력들의 생각을 언론을 통해서 일반인들에게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물론 그만한 역량과 콘텐츠를 한국의 복음주의 진영이 갖고 있다고 보기에는 미국의 그것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실천의 영역에서 연륜이나 영향력이 짧고 작은 것이 사실이다. 변혁의 막바지 단계에서는 정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정치적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실천과 연대의 작업이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리라. 성서한국운동의 집행기구가 현장 활동가 중심으로 이뤄지고 유지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 2006년 열린 성서한국대회. 복음주의 기독교의 사회 참여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흐름이 형성되었다. (사진 제공 성서한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미국 신학교 사이트를 살펴보다가, 이 학교 여름 강좌 중에 Pentecost 2007에 참가하면 2학점을 인정해주는 것을 보았다. 신학 공부가 캠퍼스 안에서만 이뤄지게 놔두지 않고 보다 폭넓게 현장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한 것이다.

성서한국대회에는 신학대학으로는 유일하게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가 참여하고 있다. 이 학교는 성서한국뿐만 아니라 예수제자운동(JDM)과 같은 선교 단체, <뉴스앤조이>와 같은 언론과도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젊은 교수들이 대거 포진한 덕인지 기독교 내 여러 단체들과의 교류 폭을 차츰 넓히면서 신학생들의 시선이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교수들만 성서한국대회에 참여할 것이 아니라 신학생들이 성서한국대회에 참가할 경우 일정한 학점을 인정해주는 정책을 세워주기를 조심스레 제안한다. 학생 때부터 폭넓은 경험을 하지 않은 채 뛰어드는 목회 현장은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이여, 바퀴벌레들과 놀아라

뉴욕에 사는 다섯 명의 1·5세 청년들이 Pentecost 2007 대회 취재 일정에 동행했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한인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이들은 우연한 기회에 짐 월리스의 <God's Politics>를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꾸려오다가 이번에 대회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을 단 며칠 사이에 경험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다녔던 교회에서는 도대체 들어볼 수 없었던,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신앙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얘기들을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들은 것이다. 이들은 이 경험을 잘 살려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보다 진지하게 고민하기로 했다. 대회 참가 이전과 이후의 신앙 색깔이 달라질 것은 당연한 이치다.

미국에 있는 대부분 한인 교회는 '생존' 내지 '부흥'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1·5세에 대한 관심을 얘기하지만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뉴욕에만 수백 개의 한인 교회가 있고 저마다 1·5세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맨해튼에 있는 한 미국 교회에는 수천 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화석처럼 굳어서 좀체 변하지 않는 한인 교회에서 1세가 1·5세와 2세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계승하겠다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난센스가 된 지 오래다. 자신들의 한계 안에서 믿음을 계승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들의 믿음을 축소시키거나 왜곡시키거나 단절시키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자신과 그 세대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믿음의 지평을 넓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미국의 복음주의 진영 곳곳에서 대안적 운동이 터져나오고 있다. <Irresistible Revolution>(번역서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의 저자 쉐인 클레어본의 표현처럼, 여기저기서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는 바퀴벌레들이 기어나와서 그 자리에 뭉개고 앉아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겁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바퀴벌레들이 노는 현장을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 "얘들아, 이제는 바퀴벌레들이랑 놀아라." 뉴욕에 사는 1·5세 청년들이 이번 대회에 참가해서 큰 도전을 받았다. 짐 월리스와 함께. (박지호)
미국의 한인 교회와 성도들, 특히 1·5세와 2세들에게 지금 여기서 '복음'은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를 놓고 계속 고민하고 있는 <미주뉴스앤조이>는 우선 작은 기도 모임을 시작하려고 한다. 모임은 작지만 기도 내용은 결코 작지 않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반도는 그나마 대치 상태가 연장될 뿐 전쟁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이라크는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에서, 레바논에서,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아프리카와 남미 곳곳에서 죽음의 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다.

여기에서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의 책임이 면해질 만한 곳을 콕 집어내기가 쉽지 않다. 미국에 사는 우리는, 아니 바로 미국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의 사도'로 필연적 부름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걸 소명이라고 하던가.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작은 기도 모임을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죽음의 악한 영이 지배하고 있는 지구촌에 화해와 평화와 용서의 영이 임하시기를 기도하려고 한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이기적인 믿음(이런 표현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사실이다)이 이타적인 믿음으로 질적으로 변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데 하나님이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는' 평화의 도구로 거듭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지금 이 시대의 우리 신분은 '평화의 사도', '화해의 사도'가 아닐까. 비록 공간이 다르기에 구체적으로 실천할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양성 속에서도 일관되게 추구해야 할 지금 시대의 일치가 있다면, 그것은 화해와 평화의 장단에 맞춰 하나님이 주신 생명 춤을 덩실덩실 추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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