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노예의 삶, 그리고 회심
자발적 노예의 삶, 그리고 회심
  • 최태선
  • 승인 2019.02.17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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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땅콩사건의 당사자 박창진씨가 한 뉴스에 출연하여 한 말 중에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자발적 노예의 삶’

그는 그 사건 이후 새롭게 눈을 떴다는 말을 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잘못했다고 빌던 자신이 바로 자발적 노예의 삶을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며 이제 그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 그 사건 이전과 이후의 변화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회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정말 못 말리는 직업의식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창진씨의 그 변화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회심을 가장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시청각 교재라는 생각이 든다.

회심은 자각임과 동시에 깨달음이며 그것은 반드시 삶의 변화로 이어진다. 특히 자발적 노예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는가. 그 이유를 박창진씨가 말한 자발적 노예라는 단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발적으로, 다시 말해 스스로 원해서 허망한 욕정의 노예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좀처럼 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허망한 욕정이 주는 달콤함과 그것에 길들여진 관성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좀처럼 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그와 같은 상태가 노예의 상태이다.

영접기도로 삶이 변화되는 경우는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4영리와 같은 단순한 논리로 얼핏 자신의 노예 상태를 보게 된다. 세상에 죄를 안 지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이유가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니 그것도 그럴듯하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 모시면 그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망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영접하는 것만으로도 구원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으니 아니면 말고 밑져야 본전 식으로 영접기도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접기도를 했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없다. 왜냐하면 영접기도로 삶이 변화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는 삶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 정말 주님이 주인이신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아니 있기는 한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4영리와 같은 정도로는 박창진씨가 느낀 그런 자각과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창진씨가 겪은 사건은 그야말로 죽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그가 겪어야 했던 수모는 그의 머리에 종양이 생기게 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자발적 노예 상태라는 자각은 바로 그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알게 된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4영리로는 결코 그와 같은 자각에 이를 수 없다. 그런 정도의 자각으로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 그것은 복음의 남용이며 구원의 남발이다.

회심은 무엇보다 약육강식의 정글인 세상에 대한 이해와 절망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회심을 주로 죄와 관련지어 생각한다. 그러나 회심은 죄에 대한 각성보다는 우리를 욕망의 노예로 살게 하는 세상에 대한 이해와 자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가치관의 전복이며 세계관의 변화이다. 따라서 진정한 회심은 세상에 대한 절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보이고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를 욕망의 노예로 살게 하는 세상의 허망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것이 회심의 본질이다. 그것은 반드시 박창진씨의 경우와 같이 삶의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러한 삶의 변화로 이어질 때 비로소 시작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를 알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부족을 깨달아 앎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시고 또 그분의 보살핌이 얼마나 완벽한 가를 보고, 비로소 온전히 그리고 기쁘게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신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회심은 쉽지 않다. 회심은 새롭게 눈을 뜨는 것이다. 박창진씨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죽을 만큼 힘든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야만 새옹지마와 같이 더 좋은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를 이루어낸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회심을 통해 변화된 삶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이 땅 곳곳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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