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틀렸나?
예수가 틀렸나?
  • 박충구
  • 승인 2019.02.2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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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새들을 염려할 때가 있다. 새들은 냉장고도 없고, 저금통도 없다. 그날 먹을 것 그날 찾아 먹어야 한다. 심지어 텃새가 아니라면 일정한 잘 곳도 없다. 그나마 깃털이 달려 있어서 최소한의 체온을 유지할 수는 있다. 예수는 이런 새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런 삶의 방식을 일러 예수는 하늘 아버지가 기르시는 것이라 하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새는 어렸을 때는 엄마나 아빠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고 자라다가 때가 되면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어야 한다. 자연이 식탁이고 집이다. 사람들이 자연을 훼손하면 새들도 떠난다. 식탁이 사라지고 집이 망가져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도 수렵 채취의 시대엔 새와 비슷했다. 점차 움막을 짓고 터를 잡아 살았지만 최소한의 먹을 것과 살 공간을 가지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자연이 제공하는 것을 무상으로 얻거나 사냥하여 먹을 것으로 삼았다. 건강하면 사냥을 했고, 건강을 잃으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수명이 짧을 때의 이야기다.

늘날 우리는 삶의 터전 자연을 잃었다. 아니 누군가가 독점해 버렸다. 그리고 대대로 물려주는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 버렸다. 문명과 문화를 즐기고 고급 명품들을 걸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이 너무 많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 자연을 독점하고, 자연을 훼손하고, 자연을 비자연으로 만드는 대신 그들의 욕망권에서 배제된 이들은 자연이 주던 것들에 대한 상속권을 잃었다.

문명은 인간만 생존하기에 유리한 조건들을 찾아서 인간만 수명을 연장했다. 16세기엔 평균 수명이 45살이었던 인간은 오늘날 83세가 되었다. 배나 길어진 생애를 살게 되었다. 유년기를 제외하면 우리는 과거의 사람보다 두 배나 길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과거의 가르침은 이런 삶을 준비할 지혜를 주고 있을까?

어찌 생각하면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스스로 살아가던 삶의 근저를 파괴하고 얻은 인간만의 배타적 영역, 그중에서 독점력을 가진 자의 영역, 그중에서 소유한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는 이런 문명의 본질을 배타적 소유의 비인간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저주받은 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

1세기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예수는 옳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서 예수는 틀렸다.

예수는 자연주의적 삶을 예찬했지만 우리는 자연에서 거리가 먼 문명 속에서 살아간다. 냉장고와 저금통장이 없으면 일상이 불가능하고 노후가 절망적일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던 삶의 구조도 저마다의 편리를 찾아 해체된 지 오래다. 아무도 돌보아 줄 수 없는 삶의 구조 속에서 버려진 채 사람은 오래오래 죽어간다.

1세기 예수가 살던 시대에서 예수는 옳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서 예수는 틀렸다. 우리는 염려해야 한다. 하루하루의 삶을 염려해야 하고, 자식이 경쟁력을 가지도록 교육해야 하고,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도 준비해야 한다. 삶이 연장된 것같이 죽어감의 시간도 무척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이 세상을 떠난 이들 중 사랑하는 가족 곁에서 죽은 이는 약 15%밖에 안 된다. 76%가 삶의 자리에서 병원으로 추방되어 죽음을 거부하는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여 모진 고통을 겪다가 죽는다. 문명은 죽어가는 이에게서 혈육을 빼앗아 가고, 의학은 죽어가는 그를 낯선 병원에 가두어 둘 권위를 얻었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추방되기 시작하면서 죽음의 과정에 들어서는 셈이다. 자연에서 멀어진 우리는 죽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통계에 의하면 여성은 약 14년, 남성은 약 9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이런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는 2000년 전과 똑같이 말씀하신다.

그가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 시대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염려하지 않았던 그런 자연의 상태와 유사한 권리를 모든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사회를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 없이 성경을 들고 설교하는 그대가 탐욕스럽게 물질을 탐하고, 교회까지 자식에게 넘겨주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신도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를 배반하고 문명이 조장한 이기성에 순복하는 것이 아닐까? 이웃을 배제하며 하나님의 것을 나와 내 자식만 독점하고 소유하고 대대로 누리는 법칙, 과연 그것이 예수의 제자가 따라야 할 길인가? 하늘의 새처럼 아무런 경계 없이 누구나 공유하던 자연을 독점하는 것은 예수가 보았던 그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지 않은가?

박충구 교수 / 전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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