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기쁨을 박탈당한 상실한 현대인들
일하는 기쁨을 박탈당한 상실한 현대인들
  • 권영석
  • 승인 2019.02.26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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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하는 것이 기쁨이 되고, 일을 통해 보람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종류의 기쁨과 보람일지 상상이 안갑니다. 어떤 이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이라지만, 제게는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이 너무나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한 세상 사는 동안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일하면서 보내게 되는데,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것 말고 노동의 의미와 가치는 과연 무엇이며 어째서 인간 사회는 노동의 고상함과 참 의미를 찾기가 이리도 어렵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 첨단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노동의 보람을 되찾을 수 있을지, 만연한 냉소주의를 극복할 뾰족한 방법이 혹 없을까요?

A. 그렇습니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지 않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을 그저 필요악의 생계 수단 정도로 여기면서도 '다 그런 거지 뭐' 하는 식의 반-체념 반-위안으로 하루하루를 우울로 시작하고 우울로 마감하는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생존 자체가 하찮다는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서로 더불어 함께 [안전하게] 살기 위해 이웃의 생존을 내 자신의 생존만큼 귀하게 여긴다면, 실존 그 자체보다 더 고상하고 거룩한 것도 없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종사하는 일이 무슨 일이든 대부분은 사실 우리의 생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 하겠습니다. 실은 이런 연관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소비를 하는 것이고 그 소비와 연결되어 있는 수고에 대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려는 것이지요. 큰 그림에서 보자면 일하고 받는 보수란 이처럼 우리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지불하는 수고비 내지 감사의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실제로 소비하는 것은 이웃들의 노동을 소비하는 것이고, 노동하는 만큼 즉 노동을 소비하는 만큼 서로의 생존은 그만큼 상부상조를 통해 보장되고 확장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뜻이 이와 별도로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우리의 존재가 지속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풍이나 산불 또는 토네이도 같은 재해로 삶의 터전이 다 소실되어 망연자실(茫然自失)한 가운데서도 가족이 다 무사[하게 생존]한 것을 인해 한없는 감사와 감격으로 새로이 희망을 다잡는 것은 살아있음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겠지요. 생존 자체는 사실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의 선결 내지 필요조건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가옥이나 가재도구와 같은 삶의 터전은 사실 우리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지 궁극적인 것은 역시 우리의 삶 그 자체와 삶과 삶이 함께 더불어 정을 나누고 공존하고 공유하는 [사람]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자식의 교육비 마련을 위해 노래방 도우미라도 나설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를 윤리의 잣대로만 재단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생존 자체가 이처럼 소중하다 못해 절박한 것이기에, 인간의 생존을 위한 물질[의존]적인 측면의 필요를 당장 충족 시켜야만 하는 사람에게 일과 일자리가 의미하는 바는 우선적으로 생존 수단을 확보하는 문제이며 그렇기에 이는 그 자체로 거룩하다 하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은 이런 연유로 노동이 때로는 자칫 불가항력적인 강요와 착취를 동반하는 사용자의 횡포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여서 품을 팔아야 하는 셈이지요. 생존이 경각에 달린 이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얻게 되는 빵 한 조각은 절박하다 못해 처절한 감격일 수 있기에 절박한 기아 상황에서 연명을 위해 빵/돈을 훔치는 것은 정상참작의 여지를 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뒤집어 얘기하자면, 이런 사람에게는 일할 수 있다는 것(고용안정/취업/취직), 그리고 일을 해서 수입(최저 임금은커녕 최소한의 수입이라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곧 희망이자 안전을 의미하며, 해서 반대로 일자리를 잃는 것(고용불안/실업/실직)은 절망이요 불안을 의미할 것입니다. 복지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불거진 '최저 임금'이니 '최저 생계비'니 하는 논의는 다 이 연장선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노-사 간의 갈등 역시도 대부분 이를 둘러싸고 야기된 것이기에 '죽자 사자'하는 생존권 투쟁으로 발전하기가 일쑤이지요. [생존을 위해 몸을 팔거나, 학벌 위주의 사회에서 자식[의 교육비 마련]을 위해 노래방 도우미라도 나설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를 원론적인 윤리의 잣대로만 재단하기가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개념상의 구분이겠지만, 이런 절대 필요에 구애/구속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 곧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난 상황에서라야 일은 취미의 연장이자 창조[적인] 작업으로 비로소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질 공간이 생기는 셈이라 하겠습니다. 적어도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의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수입이 있어서 그 일부 또는 전부를 흩어서 이웃을 구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창조주의 핵심 성품인 자비를 공유하는 보람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연장에 참여하는 거룩하고 고상한 미션 내지 소명의 차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주기도문 앞에, "우리에게"라는 대상이 명기되어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내게 주신 소출은 결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이웃의 필요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근자에 회자하는 '복지 사회'니 '수정 자본주의' 또는 '공동체 자본주의'니 하는 개념들은 다 이런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마지못해 하는 강요된 수고가 아니라, 자발적인 호기심의 발로에서 나온 작업/작품은 또 다른 창조/문화 창달로 연결되어서 인간의 생존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거나 나아가 스스로 인간의 품위를 유지함은 물론 사회 구성원들의 인간됨을 고양할 수 있게 된다면 이보다 더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물론, 이와는 정 반대로 먹고 살 걱정이 전혀 없는 이들 가운데서도 불로소득에 편승하여 한없이 게을러지거나 소모적인 오락의 늪에 빠질 수 있으며, 아니면 수입[을 늘리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함으로서 자칫 탐심의 늪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절대 빈곤의 절박한 상황에서 생존에 급급한 인간들보다 뭔가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 가능한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탐욕에 눈이 멀어서 생존수단인 부 자체를 최고 가치로 숭상하거나 나아가서 자신의 소유를 무기로 삼아 "갑질"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이웃에게 해악을 끼치는 이들이야말로 그 책임이 더욱 엄중하다 하겠습니다.

물론 궁극으로는, 환경의 어떠함 자체가 곧 인간의 어떠함을 좌지우지하지 않는 것은 [부자든 빈자든 주체성 있는 인간이라면 다] 매한가지일 것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고상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며, 빈자라고 해서 다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궁극적인 결정은 결국 인간 의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에게나 빈자에게나 일이 자발적인 수고(취미)가 되고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는, 빈부라고 하는 상황 자체를 상대화하거나 물질적인 환경이나 여건과 상관없이 자신의 존엄한 가치를 인식/인정/유지하는 초연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노동의 본질적인 가치를 또 다른 뭔가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이나 통로 정도로 격하 내지 저락시킴으로써 일의 본질적인 의미를 왜곡하거나 기껏해야 수단적인 가치로 폄하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옛 선비들이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이상적인 삶의 자세로 그리려 한 것이나, '부하게도 말고 가난하게도 말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 지혜자의 기도는 이런 맥락과 연결하여 보자면, 부나 빈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고상함과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와 도리를 드러내어 준다 하겠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 그것도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그저 생존 수단을 확보하는 데에 다 소모하고 만다면 비록 열심히는 살았을지 모르나 결코 고상하고 품격이 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노동을 통해 얻는 물질적인 보상이란 상대적 가치, 그것도 양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생존 자체가 힘들만큼 빈곤한 이들에게 일이란 생존 수단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삶의 여유를 찾게 해주는 고마운 것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마치 생존 수단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거나 가진 자들의 횡포에 휘둘리거나 아니면 저항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게 될 것입니다. 절대빈곤에 처한 나머지 일의 본질적인 의미나 가치를 생각해 볼 여유가 없거나/없어서 부자들의 횡포와 착취에 그저 굽실거리며 산다면 이는 보람이나 의미가 있는 인생과는 [아직은] 거리가 멀다 하겠습니다.

반면, 생존 수단이 어느 정도 확보된 이들에게 일이란 생존권 확보를 위한 필요악의 차원을 넘어서서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추구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는 고마운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일의 수단적 가치에만 집중케 하여 돈/부의 노예로 만들거나 쾌락에 탐닉하는 소모적인 인생으로 저락시키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축적된 자본의 힘으로 [힘]없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협함으로써 이웃의 삶까지 파괴한다면, 이는 행복한 인생은커녕 병들고 뒤틀린 인생, 실로 암적인 인생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돈이 악의 뿌리'가 될 수는 없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양가적인 가치를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더구나 노동의 보상과 노동을 분리하여 이해하거나 상대화함으로써 노동의 본질적인 보람을 찾고 노동하는 기쁨을 유지하고 배가시켜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비록 가난하지만 일의 수단적 가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본질적 가치에 집중할 수만 있다면, 생존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만큼 유여하면서도 여전히 일의 본질적 가치를 놓친 채 [노동의 대가로 얻는 부의] 수단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인생들보다 훨씬 더 존엄하고 복된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해결의 실마리는 노동 자체의 가치와 노동의 보상으로 얻는 임금의 가치를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분리해서 이해하는 데서 찾아진다고 봅니다. 부[의 소유] 자체를 찬양하거나 비난하는 평면적이고 표피적인 이분법적 이해를 정당화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악의 뿌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 했습니다. 곧 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돈을 탐하고, 돈 되는 거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겠다는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면, 또 내가 가진 돈으로 무엇이든 함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자고해 있다면, 우리는 이미 탐심이란 우상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의 이런 탐심으로 인해, 어느새 돈이 우리의 탐심을 만족시켜주는 왕(viceroy)으로 등극하여 우리 위에 군림하게 된 것입니다. 돈 가진 자들이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 역시, [종이]돈이 마치 [진짜]신이라도 되는 양 돈의 힘을 믿고 그가 시키는 대로 그저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침내 돈을 왕좌에 앉히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조아린다면 모든 가치가 돈(화폐가치)을 중심으로 재편된 일사불란한 시스템 안에서 부품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나라에서는 개인의 아이덴티티니, 인권이니 관계니,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모두 하위적인 가치로 저락하게 되며, 이따금씩 자그마한 저항이 일어나서 정의니 자비니 하는 구호를 잠깐씩 외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커다란 일탈이나 모반은 용납될 수 없도록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살벌한 관계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야말로 빈자든 부자든 다 "설국열차"에 갇혀 있는 셈이라 하겠습니다. 차이라면 일등칸이냐 삼등칸이냐의 구분이 있을 뿐 동일한 설국열차에 갇혀서 뺑뺑이 돌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물질 의존적인 인간은 물질 중심의 의존적이고 구속적(拘束的)인 삶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자본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짜여진 체제 하에서, 생존을 위한 절대적 선결 수단인 돈의 가치를 상대화하기란 더더구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만큼, 아마도 재화의 일차적 축적 수단인 노동의 가치를 화폐 가치와 분리시키는 것 역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가 그가 벌어들이는 돈의 크기로 평가되며, 그 사람이 하는 일의 가치 역시 그 일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의 크기로 환산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는 일의 본질적인 가치에 주목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노동의 의미나 가치란 그저 임금으로 받는 돈의 종속적/하위적인 가치에 불과하게 됩니다. 심지어 소위 "사"자 직업인 전문직(vocation)에 해당하는 의사 교사 등은 물론이거니와 '순수''(fine)란 수식어가 가능한 문학이나 예술 그리고 종교의 영역마저도 결국은 자본의 논리/힘에 잠식당하고 만 세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한 마디로 이런 세상에서 일은 돈의 하위 가치이자 나아가서 하수인에 불과할 뿐, 일은 사라지고 돈만 보이기 일쑤입니다. 평직원과 CEO의 연봉 크기가 심하게는 몇 천배나 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맡아 하는 일의 가치에 주목하고 자랑스러워 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스스로 능력 있다 생각하는 소수 엘리트들만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도 CEO가 되어보겠다고 애쓰겠지만,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약간 있겠지만 결국 자신이 받는 임금을 높여주든지 승진을 시키든지 하는 인센티브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 수동적이고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체제 의식이 내면화하고 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능동적으로] 의미 있는 노동/일을 하는 주체(인격)가 아니라, 자본의 지시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노동력이란 객체(물질)에 불과하게 됩니다. 마치 국군 병사의 주검은 1종 곧 군사력/병력의 일부로서 국가의 소유물로 간주되듯이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는 노동력의 일부로서 사용자의 소유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노동자가 만일 상해라도 입게 되면 회사 측은 가능한 한 적은 비용으로 무마해 버리거나 산재 처리해 버리고 새로운 노동력으로 보충하면 그만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오우너 말고 나머지 직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결같이 [그 회사의] 주체라기보다는 객체로 간주되고 있는 셈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노동자의 가치는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상품 가치보다도 더 하찮게 평가되는 격이랄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돈의 원천인 재화란 결코 개인이나 한 회사가 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심지어 우리 자신까지 창조하신 것이기에 우리는 사실 재화의 진정한 창조자도 소유주도 못된다고 하겠습니다. 지구상에 만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생태계가 이미 [철저한 일관성을 지닌] 시스템으로 장착되어 있기에 인간 사회가 [노동/일을 통해] 농업을 위시하여 각종 산업을 육성하고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고 피차에 필요한 서비스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재화의 주인은커녕,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조차 못 된다 하겠습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겉으로 보면 소유만 넉넉히 확보되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될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재화의 근원이 되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도 창조하셨으며, 따라서 인간을 포함하여 삼라만상의 소유권은 지금도 여전히 그분한테 있는 셈이지요.

실상이 이러한 데 우리는 마치 우리가 온 우주의 주인이라도 될 수 있는 양 집 평수를 끊임없이 늘리려 들고, 나아가서 동류 인간들까지도 함부로 소유하려/부리려 들고 틈만 나면 탐심을 극대화하기에 급급하고 있으니,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이 보시면 참으로 가관일 것입니다. 다 같이 종 된 주제에 서로 힘자랑 하고, 맡겨진 것들 곧 시스템의 논리에 철저히 순응하려다가 보니 어찌 어찌 내 손에 들어오게 된 재화나 학식이나 기술이나 건강 등등을 마치 순전히 나 혼자의 노력과 성취의 결과물인양 또 영원히 나 혼자만을 위한 전유물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니 말입니다.

한 마디로, 절대적인 의미로 재화의 사유화는 그 개념 자체가 심각한 오류이자 착각으로서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자 배반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재화의 창출 수단인 일 역시도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며 수단적 가치 내지 종속적 가치 또는 위탁적인 가치를 지닌다 하겠습니다. 절대적인 가치와 상대적인 가치를 혼동하거나 종을 주인과 착각한다면, 우리네 인생은 결국 거짓과 허상에 이끌려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사상누각이 될 것입니다. 출세가도를 추구하다가 남들보다 일찍 찾아 온 인생의 종착역에서 비로소 그간의 세월이 공허한 것임을 뒤늦게 자각하지만 돌이키기엔 만시지탄이 되는 셈이랄까요?! 오죽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질타하시고 기도를 독려하시는 문맥에서 맘몬을 가히 하나님에 견주어 섬기려고 드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두고 백합화나 참새보다 믿음이 없고 어리석다 하셨겠습니까? 꽃 한 송이 새 한 마리를 바라 볼 여유조차 없는 가운데 음식과 의복[등을 구매할 수 있는 수단인 재화의 크기를 목숨의 길이로 환산하려 들거나 심지어 돈]을 목숨보다 더 절대시하고 떠받드는 소비주의 맘모니즘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주님의 이 말씀은 도리어 한가하고 한심스런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볼수록 참으로 우리네 인생은 한심하고 거꾸로 된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물의 창조주보다 그분이 창조해 놓은 만물이 더 높고 위대해 보이는 세상, 이런 거꾸로 된 세상에서 노동의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를 얘기하기란 고속도로에서 역주행을 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동의 질이나 노동을 통한 결과물보다 노동의 대가로 받는 화폐의 크기가 더 우선적인 관심사인 그런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의미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해 주고 받는 임금에 다름 아닐 것이며, 매한가지로 노동의 질이나 노동을 통한 결과물보다 고용의 대가로 주어야 하는 화폐의 크기가 더 우선적인 관심사인 그런 사용자들에게 일의 의미는 값싼 노동력일 뿐 노동하는 사람이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용자에 의해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질 좋은 노동을 기대하기가 어렵듯이, 이런 노동자들을 사용해야 하는 사용자에게 노동자의 인권을 우선적인 관심사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맘몬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우리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살아야 하는 존재, 곧 "상실" 내지 "박탈"을 숙명처럼 안고 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 물질/재화가 주인이 된 세상에서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주체권/장자권(birth right)을 탐심이란 팥죽과 바꿔 먹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의 결과로 절대적인 상실과 박탈의 존재로 저락하고 말았다 하겠습니다.

이런 상실과 박탈의 겉으로 드러난 증상이 다름 아닌 "소외"라 하겠습니다.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달이 가속화하면서 인간의 "소외"도 더욱 가속화하여 왔으니,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소외는 물론이거니와 노동자와 노동의 소외 나아가서 노동과 임금의 소외, 그리하여 소외가 일상이 되고 맘몬은 그 소외의 네트워크에 힘입어 현대 사회의 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1차 산업이 근간이던 시절에는 토지가 재산 목록 1호에 해당하였으나, 화폐 제도가 안정되고 산업이 다양하게 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부동산만이 아니라 기술을 포함하여 주식, 채권 등의 동산이 재산 목록에 편입되면서 맘몬의 세력권은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었음에도 맘모니즘은 도리어 잘 드러나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상은 보람과 의미보다는 무의미와 공허함이, 풋풋함과 따스함보다는 냉정함과 차가움이 지배하게 되었고, 거저 주는 자비와 긍휼보다는 대가조차 제대로 쳐 주지 않으려는 무자비와 자린고비가 지배하는 사회, 인색하고 각박한 사회로 변해왔던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일하는 기쁨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고, 기쁨을 기대하는 것이 도리어 염치없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일하는 기쁨의 회복을 꿈꾸기에 앞서서 기쁨의 회복을 기대하기조차 힘들게 된 이 세상의 실상을 여실히 인식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 전도자가 기왕에 간파했듯이, 노동이란 것도 역시 허무로 귀결되기 딱 좋은 것임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 [그나마] 지혜일 것입니다.

하루하루 땀 흘려 일하면서, 거기서 얻는 수입/소출에 감사하며, 그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혹 잉여 수입이 있다면 어려운 이웃들에게 십시일반으로 흘려보내며 더불어 함께 생존하는 것 그 자체를 작은 기쁨이자 일하는 보람으로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맡은 일은, 그 일의 대가로 받는 보수가 얼마이든 상관없이, 성심껏 그리고 내 지혜와 경륜을 최대한 집약하여 소위 완성도를 높이려고 애쓴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내게 자긍심이 되고 보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로 말하자면, 적당히 눈가림만 하고도 높은 보수를 받는 인간에게 진정한 자긍심이란 불가능한 법이며, 자신이 맡은 일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그저 고소득만으로 만족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죄의식과 수치감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본래 그렇게 [피동적/피조적이고 진정성 없는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본질적인 가치를 우습게 여기는 세상이지만 그런 대로 인간 사회가 이나마 질서를 유지하고 더디지만 진보해 올 수 있었던 데는, 비록 당사자는 의도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의식조차 못할지라도, 이 같은 인간의 본래적 창조성/창의성과 성실성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함께 일하게 된 동류 노동자들을 귀히 여기며 더불어 동병상련하는 우정을 키울 수 있다면 이 역시 적지 않은 기쁨과 보람일 수 있겠습니다. 비록 일 자체에서 얻는 기쁨은 아니지만, 피차 처지를 헤아려주고 공감해 준다면 그런 우정 자체는 일과는 별도로 의미 있는 일이며 우리의 인생 여정에 큰 기쁨의 근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일이 재미있던가, 아니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재미있던가 둘 중의 하나만 있어도 직장 생활을 견디기가 수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에 더하여, 이런 노동의 여정에서 마음과 뜻이 합치되는 사람들과 연대하거나 동지애로 연합하여(예컨대 노동조합) 노동의 본질적인 가치 회복에 천착하거나, 아니면 지역사회/인류사회 속에서 의미 있는 봉사가 될 수 있는 새로운 노동 영역을 함께 개척하거나 벤치마킹하는 것도 꿈꿔볼 수 있겠습니다. 자원봉사는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리적인 기업 역시도 노동의 본질적인 가치와 생산품의 공익적인 가치와의 연관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우리의 일은 기쁨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만성 우울증의 진원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오를수록 리더십의 영향력도 늘어나게 마련이기에, 초심을 잃지 않고 견딘다면 악순환의 고리를 멈추고 선순환 쪽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역사(役事)의 여지가 넓혀질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자신의 노동이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수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가슴 한 켠에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기에 누군가 불씨를 붙여줄 수 있으면, 역사(歷史)의 방향은 바뀔 수 있다고 봅니다.

탐심이 서로를 소외시켰고, 소외가 또 소외를 가속화시키고, 탐심이 요행의 옷으로 포장되면서 세상은 온통 요행 세상, 한탕 세상으로 변해 왔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탕을 거머쥔 자들은 폭력/금력을 함부로 휘두르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찌질함을 인격 깊숙이 내면화하여 무기력하고 우울한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唯我獨尊)하고자 하는 "나-먼저" 주의 내지 "오직 나만 주의"가 결국 이웃을 밀어내고, 가족도 밀어내고 심지어 창조주까지도 밀어내고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다른 사람보다 내가 먼저 그리고 넘치도록 충분하게 거머쥐겠다'는 탐욕으로 변질되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고혈을 빨아서라도 내 안전과 쾌락을 먼저 확보하고 봐야겠다는 적대감이 이글거리는 인간 정글을 형성하고 말았다 하겠습니다. 이런 세상은 사실 "소외"란 말[ 정도]로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리만큼 뒤틀리고 도착된 세상이라 하겠습니다. 그냥 아나키 정도가 아니라,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들끼리 서로 물고 먹는 악질 아나키의 흉악한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백주 대낮에 벌어지는 총칼부림이나 강력 흉악범죄 소식, 작금의 지위고하를 막론한 낯 뜨거운 성폭행 소식은 결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일상사로 간주되고 있지 않습니까? 나라와 나라 간에도 걸핏하면 폭격에다 테러는 물론 보복성 관세 전쟁으로 지구촌 전체는 거대한 정글이 되고 만 느낌입니다. 그 결과 지구의 생태계 전체가 교란되고 마실 물과 들이쉴 공기조차 여의치 않은 거대 재앙이 미세먼지처럼 뒤덮고 있어서 자조 섞인 회의와 체념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었던 한 세기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전 지구적 규모와 심도로 이 시대를 어둡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하겠습니다.

희망의 단초는 우리의 '설국 열차'를 멈춰 서게 하고 열차 밖으로 뛰어내리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열쇠는 우리의 체질이 되어 버린 소외와 그 소외의 원천인 탐심의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행성을 준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외와 탐심으로 깨어져 있는 우리의 상실한 자아와 서로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화해시키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 박탈과 상실을 친히 당하시고 소외의 깊은 골짜기로 나아가셨으며, 당신의 의로우심에도 불구하고 불의하고 탐욕으로 가득한 죄인, 그것도 신성모독죄의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극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리에게 의로운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 양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셨으며 하나님만을 의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데리고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당신의 복음을 위탁하시고 그 나라의 과업에 함께 참여하도록 초청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이 승리가 있은 이래 벌써 세월은 솔찬히 흘렀습니다만 아직도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이며, 그 때까지는 우리에게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과 인내의 경주를 중단할 수 없겠습니다. 다만 그 날이 올 때까지는 우리의 가슴에 심겨진 신앙의 불씨와 첫 열매 이후로 여명처럼 밝아오는 희망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거룩한] 마중물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은 스스로 고갈되지 않도록 종말론적인 소망과 그에 기반한 거룩하고 유쾌한 삶의 태도를 믿음으로 내재화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두운 역사 속에서 간간히 승리의 뿌듯함을 경험하였던 기억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주님께서 몸소 겪으심으로 인류 역사에 영원한 획을 그으신 그 부활의 소망만큼은 실패와 좌절의 우울함이 일상처럼 만연한 이 세상에서 희망과 기쁨의 여명을 언제까지나 찬란히 밝혀줄 것입니다. 노동의 기쁨을 회복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얼마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가능하며 가능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상실과 박탈로 인한 소외를 극복하고 온전하고 순전한 관계를 회복할 새하늘과 새땅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서 일은 곧 사랑의 수고이자 기쁨의 원천이 될 것이며, 서로 섬기는 노동의 수고야말로 돈을 배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가하고 서로 서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고 온전히 발현하기 위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일하는 기쁨을 되찾고 새록새록 노동의 의미와 보람을 맛보아 알아 가기를 기원하며, 마지막으로 몇 가지 실천적인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1. 노동/일을 통해 얻는 보수가 얼마이든,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만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물은 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지으신 것이며,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것이기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자족하는 마음이 제자도의 기본이자 출발점이라 하겠습니다. 2. 노동의 대가로 얻는 수입이 혹 다른 이들에 비해 많거나 물려받은 재산으로 인해 여유가 있다고 한다면, 궁색할 것까진 아니어도 청빈한 삶(simple lifestyle)을 살고 나머지 잉여 수입은 궁핍한 사람들에게 돌릴/흘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청빈이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단순하고 가난한 삶을 선택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3. 보수는 일의 대가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여기고, [보수와 상관없이] 성심을 다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창의성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맡은 일을 잘 감당하도록 애쓰면 좋겠습니다. 4. 잘 할 수 있는 일(can do), 특히 그 중에서도 내가 나서서 해야만 하겠다 싶은 일(should do)을 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건승을 빕니다.

권영석 목사 / 전 학원복음화 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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