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이 준 조선 독립자금은 어디로 갔을까?
레닌이 준 조선 독립자금은 어디로 갔을까?
  • 김기대
  • 승인 2019.02.27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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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와 박열 ,  영화관에서 책을 읽다(3)

윤선생(정원준 분) : 전에 이동휘의 수하 한형권이 레닌한테 200만 루불의 혁명자금을 받은 일이 있어. 그런데 그 중 10만 루불이 없어졌어.

이근(정준호분)   : 김립 말씀입니까?

윤선생 : 김립은 벌써 김구가 죽였어.

한명곤 (김상중분) : 김립이 받은 돈의 일부가 단재(신채호)에게 갔다는 게 사실입니까?

윤선생 :  단재는 무슨 돈인지 모르고 받아서 조선전사 연구에 썼어. 이동휘 신채호 김원봉 좌파 모두가 추문에 휩싸였어.

한명곤  : 이승만쪽 공작아닙니까? 지난 번에도 그런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윤선생 :  한형권이 돈을 나눠서 배달하기 위해 어떤 중국인에게 돈을 맡겼는데 그가 돈을 들고 튀었어. 그러니 그를 죽이고 돈을 찾아와.

영화 ‘아나키스트’에서 의열단원들이 나눈 일부 대화를 축약해서 옮겨 보았다. 

영화 '아나키스트'
영화 '아나키스트'

이동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동시에 독실한 기독교 전도사였다. 105인 사건으로 유배되어 있던 이동휘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북간도로 망명해서 그곳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가담한 그는 밀정으로 오인받아 구속된 적이 있는데 이때 구명한 사람이 김알렉산드리아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여러 강의에서 소개했던 그 사람이다. 레닌과 협력관계를 맺은 김알렉산드리아는 극동인민공화국 외무위원이 된다. 한홍구에 따르면 이 직위는 장관급이므로 한국계 최초의 외국 장관인 셈이다. 그는 1918년 9월  30대 초반의 나이로 사형당하는데 한홍구가 어느 팟캐스트에 나와 김알렉산드리아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녀가 사형당할 때 마지막 소원이 ‘8보(步)만 걷게 해다오’ 였다고 한다. ‘왜 하필 8보냐?’라고 물으니,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8도라고 들었다. 내 한발 한발에 조선에 살고 있는 인민들,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라고 하면서 죽었다.” – 한홍구 교수 방송 중에서

사형당하기 얼마 전 김알렉산드리아는 이동휘, 김립 등과 함께  한인 사회당을 조직했다. 1919년 이동휘는 상해로 건너가서(이 때문에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은 상해파로 불렸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대통령인 우파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동휘에 대한 레닌의 신임은 각별했다고 전해진다. 1920년 레닌은 200만 루불의 독립자금 지원을 약속하고 그를 찾아온 한형권에게  40만 루불을 건넸다. 당시 루불화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었기에 금화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화의 무게가 문제였다. 하는 수 없이 일단 40만 루불을 수령했다. 나중에 20만 루불을 더 받게 되지만 임시정부의 분열 때문에 창구를 일원화 하지 못한 소비에트 측에서는 나머지 자금의 지불을 늦추다가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니 영화에서 200만 루불을 다 받았다고 하는 대화는 사실이 아니다. 

이동휘는 레닌이 준 돈이니 사회주의자들이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때문에 임시정부로 돈이 전해지지 않았다.  임시정부 내에서 김구 이승만 등 우파계열과 좌파 계열의 갈등도 이동휘의 이런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 분노한 김구는 노면직과 오종균을 시켜 한형권과 김립을 제거하도록 명령하고 김립은 상해에서 이들에 의해 1922년 암살당했다. 영화에서 "김립은 김구가 벌써 죽였어" 하는 그 대사다. 김구의 분노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임시정부가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에 지배력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돈을 착복이라고 단정짓고 암살을 지시한 사실은 김구의 ‘그릇’을 짐작케 한다. '백범일지'에서 심지어 김구는 이것을 정당한 응징이라고 썼다.  평소 김구가 반대파들을 "레닌의 방귀구멍을 꿀물 핥듯하는 자들"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이 돈이 임시정부에 전달되었다고 해도 안받아야 되었던 것이 아닌가?

‘아나키스트’에서 세르게이(장동건분)는 돈을 횡령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인을 암살한다. 이동휘가 중국 공산주의 운동에도 자금을 지원하면서 ‘황’이라고 알려진 중국인에게 돈을 주었다는 소문이 실제로 있었는데 영화는 그 ‘황’을 횡령자로 그렸다.

이동휘의 독단적인 배분이 문제의 소지는 있었겠지만 횡령이나 착복은 없었다는 것이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자금은 국내 공산주의 세력들에게도 전해졌고 일본의 공산주의 세력들에게도 전해졌다. 이동휘는 독립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영화 ‘박열’에는 식민지 조선의 '동북아 일보' 김성철 기자가 박열의 불령사 회원들에게 집단 구타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레닌의 지원금 증발사건은 많은 소문을 생산했다. 그 중 하나가 ‘박열’의 이 장면이다. 국내로 들어온 레닌의 자금을 동아일보 주필이었던 장덕수가 착복했고 이 소문을 들은 아나키스트 박열이 미국유학을 가기 위해 일본에 체류중이던 장덕수를 구타한 사건이다. ‘아나키스트’의 제작자가 이준익 감독이고 ‘박열’에서는 이준익이 직접 감독을 맡았으니 그는 아나키스트와 국제 공산당 자금 사건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덕수 건도 소문만 무성할 뿐 밝혀진 사실은 없다. 

세르게이가 중국인 횡령자를 죽이고 찾은 돈의 일부를 착복한 뒤 잠적하자 분노한 상해의 의열단이 세르게이를 찾아 내어 상해로 압송한다. 세르게이는 사면의 차원에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고 일본인을 죽이지만 그것은 의열단 지도부가 놓은 덫이었다. 거사를 치르게 한 다음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세르게이는 의열단에 의해 살해된다. 같은 독립군에 의한 암살은 김립의 암살과 버무린 장면이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영화 '박열'의 한 장면

사회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론적으로만 따지자면 민족보다는 계급을 우선하는 사회주의, 어떤 제도도 부정하는 아나키스트이지만 국가(민족)를 강점한 세력에 대해서는 투쟁할 수 밖에 없었다. 레닌도 결국은 민족을 생각했고, 스탈린과  트로츠키와의 갈등에도 이 문제가 한 몫했다. 김일성도 브루조아적 민족주의와 결별해야 한다면서도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라는 말로 민족을 우선했다. 단재 신채호는 요즘의 유사역사학 비슷한 주장과 아나키스트 운동을 함께했다.

아나키즘과 저항적 민족주의는 함께 갔던 예는 ‘세 깃발아래에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은 아나키즘을 비롯한 유럽의 급진적 운동과 연관을 맺고 있었고 쿠바의 저항적 민족주의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었다. 우리의 독립운동 진영에도 이러한 흐름이 전해졌고 의열단이 그 중심에 있었다. 해방이후 남과 북 모두에게 배척당했던 의열단장 김원봉은 남과 북 모두에서 저항적 민족주의 대신 국가적 민족주의가 주류가 되어가는 과정을 참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임스 스콧은 "어떤 법이 정의롭고 합리적인 것인지 자신의 머리로 직접 판단하는 훈련을 통해 날렵하고 민첩한 정신자세를 유지”하라고 권한다. 그것이 아나키즘의 출발이다.  

‘아나키스트’에서 도산 안창호가 의열단원을 찾아와 폭력을 쓰지 말라고 그의 사상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말을 하는데 모든 대원들은 그를 무시하고 내 보낸다. 그들은 무모할 수 있으나 영화 카피처럼 당당했다. 독립운동가의 고정관념을 깨고 그들은 멋을 내었다. 실제로 그렇게 멋있는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감독은 독립운동가의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을 것이다. 각본이 박찬욱인 걸 보면 그 다운발상이다. 독립운동가들도 어긋난 사랑과 질투 때문에 힘들었고 세르게이는 마약의 힘을 빌리기까지 했다. 박열도 그랬다. 그는 ‘멋’보다는 빈민의 삶을 택했고, 찾아온 사랑을 일본인이라고 해서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독립이라는 거대 담론과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이라는 개인의 선택이 잘 조화되어 있었다.

1974년 8월 일본 도쿄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에서 폭탄이 터졌다. 사망자 8명을 포함해 수백여명이 부상을 입은 이 사건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 가‘ 일제 침략 기업에 대한 공격’의 차원에서 자신들이 했다고 밝혔다. 결국 모두 검거되어 사형을 당하거나 징역형을 살았는데 후지이 다케시는 ‘무명의 말들’에서 폭파라는 방법은 부정적이지만 어쨌든 “일본인 혁명가로서 무엇보다 먼저 관철시켜야 할 것은 일제의 역사, 일제의 구조 총체를 청산하는 것”이라며 침략을 막기 위한 실천적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의열단원이나 박열의 불령사, 미쓰비시 사건처럼 때로는 무모해보이는 시도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미쓰비시 폭파같은 이런 종류의 사건이 잦아들면서 일본이 제국주의 망령을 더 강력하게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후지이 다케시의 주장이다. 이 사건은 한국 감독에 의해 ‘늑대부대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다.

삼일운동 100년, 100년전 그날 저항의 서사를 담았던 태극기는 폭력의 상징으로 변모했고 성조기와 이스라엘기가 함께 날리는 진기한 장면이 일상이 되었다. 삼일운동 100년을 맞으면서 후지이 다케시의 다음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도 미래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와의 대결이다. 과거가 차지하고 있는 그 자리를 비우지 않는 한 미래가 들어설 자리도 없다.”

100년 동안 현재를 왜곡되게 구성하려고 온갖 짓을 다해온 세력들- 친일파, 반공주의자, 정치군인들, 근본주의 우파 정치인들, 5.18 부정 세력들-을 어떤한 방법을 써서라도 청산해야만 미래가 가능하다.  

 

<영화>
아나키스트, 유영식 감독, 2000년
박열,  이준익 감독, 2017년
늑대부대를 찾아서, 김미례 감독, 2017년

 

<책>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 로버트 스칼라피노, 이정식  지음, 한홍구 옮김, 돌베개, 2015년
세 깃발 아래에서 -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서지원 옮김, 길, 2009년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 , 제임스 C. 스콧 지음, 김훈 옮김, 여름언덕, 2014년
무명의 말들 , 후지이 다케시 지음,  포도밭출판사,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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