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서 보는 몇 가지 기독교인
내 주변에서 보는 몇 가지 기독교인
  • 박충구
  • 승인 2019.03.05 0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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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변에서 경험한 기독교인들의 여러 모습이 있다.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이라 할까.

첫째, 오만한 눈을 가진 크리스천이다. 스스로에게는 구원을 타인들에게는 저주와 심판을 선언하는 무모한 크리스천들이 있다. 비록 착하게 보이는 크리스천들이라 할지라도 얼마만큼은 이런 흑백 논리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 역시도 청소년기 시절에 이런 시각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아마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배타적 크리스쳔들이다. 이들이 타인을 정죄하는 습성은 이내 주변을 오염시킨다. 이들이 선언하는 심판과 저주의 대상은 비기독교인, 타종교인, 그리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등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이들이 주종을 이룬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들은 대체로 성실한 독서나 사고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보수적인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주입된 판단 구조에 무비판적으로 천작한다.

오만함을 지속시키는 논리는 매우 단순하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보다는 후기에 형성된 보수 신학으로 코팅된 신앙체계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자신들에게도 악이 있을 것이나 그것은 면죄되었고 타인의 악에 대해서는 가중 처벌하려 든다. 문제는 이런 교조적 심판자의 태도가 매우 비신학적이고, 비성서적이라는 것이다. 중세의 종교 재판관들이나 가졌던 시각이다. 이런 사고에 한 번 사로잡히면 자신의 정체성과 구원이 얼버무려져 굳어버린다. 누군가가 이러한 오만함을 비판하면 자기부정이 되고, 구원의 길이 부정되며, 마침내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까지 부정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둘째, 비기독교도에게 동정심을 가진 크리스천이다. 위와 유사하지만, 비기독교인, 타종교인, 이념이 다른 이들을 향하여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라고 간주하는 선교적이며 구원론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이다. 위와 다른 점은 종교 우월주의에 더하여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구원할 사명과 소명이 있다고 스스로를 여긴다는 점에서 저주와 심판에 그치지 않고 권면과 전도와 선교와 교육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그 근저에는 배타적 구원론이 자리를 잡고 있다. 기독교의 특수성은 배타적 구원론에 더하여 예수를 독점적으로 해석하는 데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자 예수 역시 종교화된 기독교 신학이 그려낸 예수다. 신비주의자들은 신비주의자 예수로 그리고, 수도원주의자들은 수도사로 예수를 바라보며, 교권주의자들은 예수를 교회의 머릿돌로 여긴다. 그러나 이들의 해석은 각기 자기 전통의 우월성을 은연중 강조한다. 온갖 희생과 봉사를 강조해온 종교가 그 희생과 봉사의 의미를 스스로 약화시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측은지심에는 역시 오만함이 묻어 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동성애자는 틀렸지만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틀린 것하고 다른 것을 이들은 구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첫 번째 부류의 변종이다.

셋째, 탈교회적 시각을 가진 크리스천이다. 앞서 설명한 두 부류에 속했던 이들이 자신들에게 세뇌되었던 배타적 신앙의 편협함을 인식하게 되면 이제까지 자신이 체득해 왔던 신앙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된다. 자연스러웠던 교회 생활이 피곤해지고, 낯설어지는 것이다. 배타적 신앙을 강조하는 목회자에게 상처를 입기도 한다. 헌금과 봉사 등 비본질적인 요구를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받으면 견디기 어렵다. 더구나 목회자의 처지에서 본다면 신도들의 충성심을 해체하는 비열성 냉담 신자는 경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회생활이 주는 안온함, 다양한 관계, 공동성, 그리고 익숙함에 매여 이중적 태도를 가지고 근근이 버티는 이들이다. 배타적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던 신앙생활이 곧 교회생활이었던 구조에서 교회생활 자체가 신앙 생활이 아니라는 자각을 가지면 배타적 신앙을 고취하는 설교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거기다가 정기 부흥회나 신앙 강연회에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 생활에 대한 비판이 섞인 강펀치를 맞으면 심각하게 탈교회적 삶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교회가 시간과 물질을 통한 봉사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갈등은 매우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신앙의 연조가 오래되고, 가족관계까지 얽힌 신앙인은 탈교회 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연조가 깊지 않은 이들은 쉽게 탈교회를 꿈꾼다.

몇몇 개인에게 항구적으로 점유된 교회는 타락의 깊이가 더 깊다

넷째, 탈 기독교적 크리스천이다. 신앙생활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다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이런 신앙생활의 관계성을 포기하면 일종의 관계의 진공 속에 빠져들게 된다. 이따금 교회가 그립지만 자신이 찾고 있는 그 안온한 신앙의 길은 이미 가슴에서 사라지고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그렇다고 낯선 새로운 교회를 찾아 나갈 용기가 없다. 그리고 교회에서 겪었던 갈등이 해소될만한 이상적인 교회가 없다는 사실도 자각하게 된다. 스스로 책을 읽고 영성적 삶을 사는 습성이 없는 이들은 서서히 비기독교화되어 간다. 아니 비교회적 신앙인이 되어간다.

참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심과 연구와 독서도 없이 기독교화된 적도 없었으므로(그저 교회화된 기독교인이 대부분이다) 탈기독교화가 아니다. 그저 교회 생활하다가 안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탈교회화된 이들은 외롭고, 마치 사막에서 안내자를 잃은 사람처럼 내적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일명 방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려보지만, 예전과 같은 열심이 식어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길을 찾지 않으면 소외감을 이겨낼 방도가 없다. 보수적 신앙의 모태가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반교회적인 눈을 가진 크리스천도 있다. 교회생활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있어서 보조적인 것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민감하게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하려 드는 이들이다. 교회가 신도들이 품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심을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 변환시키고, 그 충성심과 헌신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교회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게 된다. 교회가 하나님이 된 것, 그리고 교회 생활이 하나님 사랑으로 전치되는 것이 성직자 중심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 목사가 교회를 사고팔고, 교회를 주고받는 모양을 보면 하나님 신앙과 목사와 교회 중심의 신앙이 헛갈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일부는 목사에 대한 불신과 비판, 그리고 그런 목사를 옹위하고 있는 교회 중직에 대한 실망이 커져 교회를 등지게 된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교회, 인간의 소유가 되고 있다는 인식에 도달하면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 참된 ‘하나님의 교회’를 표방하는 집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도 한다. 기존의 교회를 비판하며 참 신앙의 길을 알려주겠다는 사이비 신앙에 쉽게 접속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신앙 구조가 배타적 신앙의 원형에 속하기 때문에 이전 교회보다 더 뜨거운 사랑, 더 강한 연대감을 보이는 사이비 공동체에서 참된 교회의 이상을 찾으려는 데 있다. 그러나 사이비 교회가 대부분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이비 신앙은 사랑이 아니라 집요함, 그저 헌신이 아니라 무사무욕의 전폭적인 헌신을 요구하며 더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사이비에 빠지면 정말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다.

신도들을 탈교회적,탈기독교적, 반교회적 인물로 만드는 것은 타락한 목사가 지배하는 잘못된 교회다. 몇몇 개인에게 항구적으로 점유된 교회는 타락의 깊이가 더 깊다. 문제는 교단마다 이런 불실한 목사들을 걸러낼 정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살려는 이들은 “영성적 편안함”이 있다면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영성적 편안함이란 목사가 하나님 사랑과 교회를 나누어 생각하고 , 교회와 목사를 구별하는 차원에서 형성된다. 그럴 때 교회는 참된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 목사가 교회를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교회를 향한 충성으로 해석하지만 않아도 신도들은 그 교회를 떠나가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시각은 예민한 신학적 양심을 필요로 한다. 양심적이며 탐욕을 이기는 목사는 교인을 내어 몰거나 흩지 않기 때문이다.

박충구 교수 / 전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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