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운운하면 친일파 맞다
빨갱이 운운하면 친일파 맞다
  • 김기대
  • 승인 2019.03.06 12: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재인 대통령 3.1절 100주년 기념연설을 보고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100주년 기념 연설에서 빨갱이를 언급하는 것은 친일의 잔재라며 친일 잔재를 청산하자고 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위원은 ‘빨갱이를 빨갱이라 못부르는 나라’라며 비판했고 바른미래당 이준석 최고 위원은 “그러면 6.25때 공산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무엇이냐”며 대들었다. 그밖의 보수 매체들에서도 문대통령의 연설은 하이에나의 먹이처럼 뜯기고 있다. 

문재인대통령이 3.1절 행사에 참석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사진:오마이뉴스, 본지제휴)
문재인대통령이 3.1절 행사에 참석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사진:오마이뉴스, 본지제휴)

먼저 문제가 된 연설문의 일부를 보자.

“ 친일잔재 청산'은, 친일은 반성해야 할 일이고, 독립운동은 예우받아야 할 일이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 단순한 진실이 정의이고,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이 공정한 나라의 시작입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경찰 출신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규정되어 희생되었고 가족과 유족들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고,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잔재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어진 ‘38선'은 우리 안을 갈라놓은 이념의 적대를 지울 때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버릴 때 우리 내면의 광복은 완성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3.1절 100주년 기념 연설문 중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친일 ‘잔재’라고 했다. 친일파들이 저지른 것과 같은 수많은 악행의 구조가 사라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한 말이다. 그는 ‘변형된’ 색깔론이라고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이준석과 김순덕은 반공주의자들을 모두 친일파로 매도 했다고 우기고 있다. 반공은 이념으로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놓치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공산당이 빨갱이 일 수는 있어도 빨갱이가 모두 공산당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만큼 빨갱의 탄생에 대해서 공부가 안되었다는 뜻이다. 빨갱이는 혐오와 배제에서 출발했고 국민과 빨갱이를 나누는데서부터 시작했다.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선인문화사, 2009)에는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빨갱이 공포증이 생겨난 것은 세칭 ‘여순반란사건’ 때부터다.

빨갱이의 탄생(김득중 저, 선인문화사)
빨갱이의 탄생(김득중 저, 선인문화사)

제주 항쟁(4ㆍ3사건) 진압을 명령받은 여수 14연대가 동족 학살을 할 수 없다며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고 1948년 10월 19일에 봉기한 사건이 ‘여순반란사건’이다. 여순사건의 발발에는 북한의 지령도 남로당의 명령도 없었다. 하사관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여순사건은 지역 주민들의 참여로 인해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역사에는 좌익에 의한 학살극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고 부르는게 옳다. 

김득중은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 성립 초기 국가 형성 과정에서 노골적인 국가 폭력으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주체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임무를 맡은 군대와 경찰이었다.” 이러한 냉전적 역사 인식은 “파국의 유일한 원인으로 ‘폭력적 좌파 세력’을 제시하여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고 현재의 역사를 (탈)정치화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대 자유주의라는 '정치'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이승만 정권이 양민을 학살하는 '탈정치'극을 벌였고 그 교묘한 탈정치화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당시 친일 청산과 사회개혁이 더뎠던 것도 여순사건에 시민들의 참여가 많은 이유가 되었다. 이들은 이념 지향적 인물들이 아니라 해방 공간에서 다가올 사회의 모습을 고민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하부터 시작된 여수 순천 지역의 독서 모임 회원들이 대부분 여순사건에 함께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빨갱이로 규정함으로써 국가폭력을 정당화하고 국민과 빨갱이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처럼 빨갱이는 인간도 아니고 죽여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살아남으면 국민이 되고 죽으면 빨갱이가 되는 현실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해체되었지만 신분 해방의 체감은 일제하에서나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1923년 시작된 백정들의 형평사 운동도 이를 반증하는 사건 중 하나다. 따라서 1948년이라면 신분제 철폐가 완전히 체감될 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특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된 양반층은 배제적 계급이 없어진 상태가 불안했다. 천민 출신들도 마찬가지로 짧은 역사를 가진 신분 해방이 혹시라도 취소될까 두려웠을 것이다. 이들은 빨갱이를 새로운 ‘천민’으로 배제시켰다.

저자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 조건을 심사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국민’이 되었다는 말이니 ‘국민’이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불쾌하게 시작했다.

이 책에서 소개된 하구치 유유이치에는 여순사건을 최초로 연구한 일본학자다. 그는 여순사건이 국민당을 지원했던 미국과 싸운 중국의 인민 해방전쟁, 프랑스 제국주의와 싸운 베트남 전쟁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고 평가했다. 여순사건은 미국에 반대하는 봉기였고 거기에 이승만 정권에 대한 온갖 불만이 합쳐져 폭발한 사건이었다는 말이다. 여순사건 진압군에 미군사고문단원 여덟 명이 활동했다는 사실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가 이 사건을 처음부터 빨갱이로 몰고 갈 의도를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박정희가 빨갱이에 그렇게 집착했던 이유는...

여순사건과 박정희

여순사건에서 박정희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박정희는 사건 발발 다음 날 도착한 토벌군 정보국장 김점곤의 안내를 맡았었고 여순사건이 끝난 11월 11일에야 체포되었다. 그의 남로당 경력이 문제였던 것이지 실질적으로 여순사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체포된 뒤 남로당 군사 총책으로 가지고 있던 군내 좌익 명단을 토벌군에 넘겨주었고, 이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여순사건 진압 당시 보여주었던 박정희의 ‘능력’을 높이 산 군 지도부와 미군에 의해 구제되어 출감했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좌익 성향의 인물이 아니었다. 해방 공간에서 좌익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사회주의 계열은 해방 후 주요 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등을 제시했고, 여운형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추구했다. 1946년 8월 미 군정청 여론국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선호도가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 사회주의 70%였다. 해방 후 어떤 국가 수립을 원하느냐는 동아일보 조사에서는 70%가 사회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선호한다고 응답했다.

박정희는 투철한 이념에 따라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그것이 대세로 보여 좌익에 줄을 섰을 뿐이다. 그러다가 여순 사건이 일어나자 항거에 참여했을 법한 그는 천연덕스럽게 토벌군 편에 섰다가 남로당 경력이 발각되자 동지들의 명단을 넘기고 살아남아 결국에는 권력을 쟁취했다. 권력을 잡은 뒤에는 여순사건의 진압 책임자들이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박정희가 집권이후 '빨갱이 사냥'에 그렇게 집착했던 이유는 이러한 그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1946년 대구항쟁의 주요 인물로 박정희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도 지워야 할 과거였다. 5.16 쿠데타 후 북에서 밀사로 내려왔던 박상희의 절친 황태성을 서둘러 사형시킨 것도 같은 이유였다. 박정희의 후계를 꿈꾸던 김종필도 빨갱이 청산 작업에 적극 가담했다. 5.16 직후 4일만인 5월 20일에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김종필이 초대 정보부장을 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정희를 의심하는 미국에 자기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참다운 반공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참다운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정치 지반인 전근대적인 유제가 위협을 당하면 ‘용공’이니 ‘빨갱이’이니 하는 상투적인 술어로 상대 세력을 학살시켰던 것이 한국적 매카시즘의 아류들이 저질러온 행적이었습니다. [……] 전국의 지성인 여러분! 무슨 일이 있든지 우리는 차제에 한국적 매카시즘의 신봉자를 우리 사회에서 일소시키기 위해 분연히 궐기하여 과감히 투쟁합시다.” ―1963년 10월 5일 5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박정희 후보의 광고문.

그의 전력을 사람들이 시비하자 이 내용을 신문에 싣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그나마 이러한 종류의 자기 변명도 못하게 금지 시켰다. 해방 직후, 한국 전쟁시기처럼 반대자는 그냥 빨갱이가 되는 것이었다.

“빨갱이는 대한민국 건국신화의 주요한 소재다. 빨갱이를 때려잡아야 국가의 국민이 된다는 이 비극적인 건국 신화가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건국 논란, 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재연되고 있다. 박정희 시절의 국사 국정교과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고난에 찬 민족의 역사이며 민족의 진로를 방해하는 내외의 모든 적은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투쟁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였다.”(빨갱이의 탄생)

김상숙의 ‘10월 항쟁’(돌베개)에는 한국 전쟁 당시 겁에 질려 탈영해 고향인 영천에 숨어 들었던 정동택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발각되자 동생인 9살 이쁜이도 처형당했다. 정동택 뿐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아내 또 다른 동생들, 그리고 같은 마을의 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다. 죄목은 한결같이 4년전 1946년에 있었던 대구 항쟁 가담자였다는 것이다. 이쁜이는 그 때 5살, 그 아이에게 주어진 죄목은 ‘요인암살’이었다.  전쟁 중 탈영은 중죄일 수 있다. 그러면 당사자만 처형하면 될 것을 그들은 왜 그렇게 잔인하게 무고한 사람들을 도륙했을까? 대구항쟁의 트라우마는 주민을 모두 잠재적 빨갱이로 보게 만들었다. 주민을 잠재적 빨갱이로 보고 신고를 하게 만들었던 보도연맹 사건에서 처럼 전쟁 중 국군과 경찰은 비교전 지역에서 조차 빨갱이의 씨를 말린다며 아무나 끌여다 죽였다. 

재판도 없이 평소에 감정이 안 좋은 사람을 그냥 빨갱이로 몰면 처형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이 겪는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감히 권력에게 저항할 생각을 못한채 숨죽여 살 수 밖에 없었다.

여순사건에서부터 시작된 빨갱이를 잡고 국민이 되자는 선동은 한국 전쟁기의 뒤늦은 대구항쟁 가담자 색출, 보도연맹 학살, 또 세월이 흐른 뒤의 광주 학살로 이어진다. 그래서 광주는 국민이 아닌 빨갱이가 저지른 일이 되어야 한다. 용산참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에게 빨갱이를 붙이면 학살은 정당화 된다. 자식을 잃고 슬픔에 잠긴 세월호 유가족에게도 빨간 색칠을 하면 ‘자식 목숨을 돈으로 환산하는’ 파렴치한 부모가 된다. 이제는 유치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정부를 빨갱이로 모는 지경에 이르렀다. 배제를 통해 자기 보존을 추구하던 ‘빨갱이’ 타령을 청산하지 않는 한 적폐 청산은 어렵다. 해방후 친일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 시작된 '빨갱이' 낙인 찍기, 그런 점에서 아직도 혐오와 배제의 영양주사를 맞고 살아가는 이들은 친일 잔재가 맞다.

 

* 이글은 필자의 저서 '교회는 언제쯤 너그러워 질까'에 나오는 '빨갱이의 탄생'을 새롭게 고쳐 쓴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