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이끄는 삶'은 영악하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영악하다
  • 최태선
  • 승인 2019.03.14 0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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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해 믿음을 절대 잃지 마세요.”

빅토리아 앨런의 말이다. 그녀는 4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지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 대해 가족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가족들의 말을 듣고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깨어났다. 그러나 하반신이 마비된 채였다. 그녀는 수영에 도전했다.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하여 은메달 세 개와 금메달 하나를 자신의 조국에 선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비된 하반신에 도전했다. 그리고 깨어난 지 6년 만에 그녀는 자신의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있었고 걸을 수 있었고 하루에 6시간의 고된 노력 끝에 마침내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도전은 불가능에의 도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사람들의 합리적인 예측을 뒤엎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그런 그녀가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감동스런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감동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본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불가능을 요구한다. 복음을 자세히 음미해보라. 그것이 가능한가를.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불가능해 보인다. 무모해 보인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없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런 모든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영악하다.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가장 현저한 특성은 영악함이다. 영악한 사람들은 결코 불가능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설사 불가능을 극복할 수 있다 해도 거기에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땅 짚고 헤엄치기는 아니더라도 오늘날 영악해진 사람들은 결코 무모한 짓을 하지 않는다. 불가능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오늘날 사람들의 이 영악함이 복음에는 가장 치명적이다. 믿음이란 알지 못하는 것을 실제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모험의 요소가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악한 사람들은 모험을 분해하여 가능과 불가능으로 구분하거나 최소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마련이다. 불확실성을 제거한 복음, 불확실성이 사라진 기독교는 무엇이 되는가. 나는 그 대표적인 예가 ‘목적이 이끄는 삶’과 같은 가능성에의 매진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교회 할 것 없이 중대형교회 이상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목적이 이끄는 삶’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러한 사고가 오늘날 사람들의 영악함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결코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지 않는다.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고 그것을 피드백 하여 점점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은 것을 달성하게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취에 도취되어 자신들이 쌓아놓은 결과물에 만족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실질과 능률을 숭상하게 됨으로써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복음과 믿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악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더더욱 박차를 가해 복음으로부터 멀리 달아난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주님의 말씀이다.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약대는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까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면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오늘날 영악한 사람들의 사고로는 그래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처럼 영악하지 못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뒤돌아서지 않고 예수님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신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신앙이란 불가능에의 도전이다. 쟈크 데리다는 그것을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라고 표현했다. 맞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은 무모해 보인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처럼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베드로처럼 그렇게 어리석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들었던 말씀을 듣지 못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불가능에 도전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들은 결코 어리석은 투자가 아니다. 돌려받는다. 원금 정도가 아니다. 여러 배를 돌려받는다. 그것도 죽은 후에라야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금세에서다. 거기에 더해 내세에는 영생을 받는다. 본 훼퍼 목사님은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맞다. 값싼 은혜는 없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능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영악해졌기 때문에 불가능을 도외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그것은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다. 복음이 말하는 어느 것 하나도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불가능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고, 대가를 지불하고 그 모험에 뛰어들 때 우리는 금세에서 보상을 받음은 물론 내세의 영생을 받는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불가능에 도전할 무모한 사람들을 기다린다. 하나님 나라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나라이다. ‘가능의 함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불가능에 도전할 때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임한다. 그 샬롬이 우리 구원의 징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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