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베(경원) 상의 발언
나베(경원) 상의 발언
  • 지성수
  • 승인 2019.03.21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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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일로 유학원을 찾아야 할 일이 생겼으나 알고 있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유학원을 알만한 주변 사람들 몇 명에게 물었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교민주소록에 보면 수 십 곳의 유학원 전화번호가 있다. 그러나 기왕이면 소개를 받아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소문을 해보았더니 내 주변에 아무도 유학원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스스로 놀랬다.

호주에 처음 와서 했던 일이 유학생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유학생 센터이어서 유학원 연합회도 만들고 심지어는 유학생들 하숙을 치기도 했었다. 그런 내가 교민 사회의 한 부분인 유학 사업과 전혀 인연이 없고 내 주변인들 가운데도 관계가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물론 호주의 유학 산업이 축소된 탓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말해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처럼 한국사회에서도 기득권층은 서민계층의 실정을 전혀 모른다. 한 땅에 살고는 있지만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생각할 일이 없는 것이다. 하나의 좋은 예로 나베(경원) 상이 '반민특위 활동이 사회를 분열시켰다'는 말은 어쩌다 튀어나온 실언이 아니다. 그런 사고를 가진 집단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의 생각인 그런 것이다. 그들은 정상적인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귀에는 나베 상의 말은 일반 국민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이들에 대하여 “우리가 남이가?”라고 하는 소리로 들린다. 즉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향하여 ‘내 밑으로 모여!” 하는 것으로 들리는 것이다.

나경원 의원(사진:SBS 화면 캡처)
나경원 의원(사진:SBS 화면 캡처)

기득권자들에게 서민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듯이 나에게 유학생은 ‘느껴지지 않는 존재’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당시의 기득권들에게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이스라엘 민중들을 '땅의 사람들(암하레츠) ‘ 이라고 불렀고 그들과 함께 했다.

30 여 년 전에 김지하가 제 정신이었을 때 쓴  ‘밥’이라는 작은 책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1895년 4월 5일 해월 최시형 선생이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경기도 이천군 설성면 영산동에서 숨어 있을 때 수운 선생 득도 일을 맞아 제사를 지냈다.

“선생은 벽을 향해 음식을 차리고 멧밥과 신위를 벽 아래 벽을 향하여 절하고 비는 '향벽설위(向壁設位)'를 문득 거꾸로 뒤집어 벽 쪽에 있던 멧밥과 신위를 번쩍 들어다 제사 지내는 상제(喪制) 앞에다 갖다 놓고 내가 나를 향하여 절하고 비는 '향아설위(向我設位)'로 바꾸어 놓았다.

선생의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란 제자들에게 “앞으로 오만 년 동안 바꿀 수 없는 법을 내가 오늘 지었다. 만약 선생님이나 조상의 영이 지금 오신다면 생명 없는 벽 근처에서 어슬렁거릴 까닭이 있겠느냐? 반드시 살아있는, 대낮의 영인 내 안에 오시지 않겠느냐? 생명의 밥을 바로 이 산신령에게 바쳐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 하셨다. “

즉 제사의 주체가 조상의 귀신이 아닌 제사를 올리는 인간이라는 선언!

이 얼마나 혁명적 선언인가? 조상의 혼이라는 귀신에게 드리던 가치를 살아 있는 인간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 혁명적 사상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그때까지 조선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던 당시의 국교라고 할 수 있었던 허례허식에 쌓여 있던 유교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살아 있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 세우는 거사였다.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의심 받거나 변경돼 본 적이 없는 제사 형식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해월 선생의 이런 행동은 자신이 처한 보잘 것 없는 현실 때문에 스스로의 인간의 존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민중들에게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자각 시켜주는 상징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예수나 해월 선생처럼 이렇게 깨우쳐주지 않으면 인간은 ‘말 타면 종 부리고 싶은’ 타성적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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