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예수님을 지키는 첨병들이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지키는 첨병들이다
  • 최태선
  • 승인 2019.03.31 0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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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를 다닐 때 조직신학교수님은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분이 가르치는 그대로 답을 써야 했다. 토씨라도 틀리면 여지없이 학점이 나오지 않았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키는 첨병이었다. 그분의 가르침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은 잊히고 추방당하신다. 그리고 그분에게 배운 목사들도 그 교수님처럼 자기 교회에서 예수님을 지키는 첨병이 된다. 물론 그런 목사들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 역시 예수님을 지키는 첨병이 된다. 그렇게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지키는 첨병들의 모임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예수님이 그렇게 허약하신 분이신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가 지켜드리지 않으면 맥을 못 쓰시는, 그래서 잊히고 몰락하고 추방당하시는 분이신가. 정말 인간이 그분을 지켜드리지 않으면 기독교는 망하는가.

과연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는 어떤가. 나 역시 예수님을 지키는 첨병이 아니었는가. 한 번 잘 생각해 보시라.

나는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과 다른 예수님을 경계한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하거나 적으로 간주한다.

이 부분에서 반드시 이단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런 위험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사고에서 이단이 시작된다. 자신의 이해와 다른 예수님을 모두 이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교회가 정통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단이 생겨난다. 그리고 서로가 자신이 옳다는 논쟁이 시작된다. 종교적 논쟁은 아무리 천박한 주제일지라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

어제도 정명석의 기사를 보았다. 그 더러운 자가 출소하였고 아직도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많다. 그런 이단들도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이 옳다고 주장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명석과 같은 더러운 인간도 자신이 믿는 예수가 옳다고 주장할 수 있고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것에 현혹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옳고 그름으로 이단을 가리려는 사고는 생각과는 달리 이단들의 발판내지는 인큐베이터가 된다는 사실을 보시라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처음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자리를 말살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 개혁을 주장하는 분들에게서도 나는 그것을 확인한다. 비단 개혁을 주장하는 분들이랴. 오늘날 교회 밖으로 나온 거의 대부분의 가나안 성도들이 바로 이 옳음이라는 '자기확신의 함정'에 빠진다.

그러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가.

그것은 선이 아닌 인간이 자기가 아는 선을 절대적인 선이라고 주장할 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 말은 하나님 한 분만이 전지전능하시다는 의미이다. 한 분만이 전지전능하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전지전능하지 않은 인간은 물론 유사전능한 사탄도 선이 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선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고 믿고 자신의 선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는 오직 선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악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는 선을 행한다며 행한 악들로 넘쳐난다.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재판, 마녀사냥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런 예들이 아니던가. 그것은 모두 인간이자신이 옳다는 '자기확신의 함정'에 빠져 일어나는 일들이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셨던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이 무엇인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당신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허리를 동이고 수건을 들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리고 당신이 그런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신 맥락과도 일치한다.

제자들의 목표는 옳음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의 숙명이다. 인간이 그 숙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사랑에 매진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탕자의 비유를 보라.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지적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들의 요구가 부당한 것이며 불의하다는 것을 몰랐을까. 아니다. 또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할 권이 없는가. 아니다.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아들이 못 떠나게 할 수는 없었을까.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대로 따른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멍청한가.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목사와 교수들은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까지 ‘옳음병’이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낙원 한 인간들의 숙명이다. 그것은 특히 많이 혹은 제대로 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빠지는 '자기확신의 함정'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옳음에 천착하지 않고 매 순간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것이다. 그분에게는 자신의 말도 자신의 행동도 없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 마음대로 하라.

어거스틴의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본다. 인간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을 인간의 지식 안에 가둘 수 없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 안에 갇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 자유인들의 나라이기도 하다. 물론 그 나라는 사랑의 나라이다. 사랑은 '자기확신의 함정'에서 벗어난 사람이 비로소 갈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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