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신은 폭력적'이라는 상투어에 대하여
'유일신은 폭력적'이라는 상투어에 대하여
  • 김기대
  • 승인 2019.04.10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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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문익환 목사는 공동번역 성서의 구약 번역에 참여하면서 의식화되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구약의 야훼는 내면적인 신앙의 공경 대상이 아니라 해방과 자유를 위한 투쟁의 동반자였다는 점을 깨닫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고 그의 벗이었던 장준하 선생이 1975년 의문사하자 두 절친(윤동주 장준하)을 먼저 보낸 문목사는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투쟁’을 통해 도달한 지점은 평화였다. 평화를 향한 소망 하나로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 위해 북한에 감으로써 ‘무법적 정의’(테드 제닝스)를 실천했다.

서남동 교수는 기독교 사상 1975년 2월호에 실린 ‘예수 교회사 한국 교회’를 통해 ‘한국 교회가 가진 전투성’이라는 조어(造語)를 했다. WCC 소속의 한스 웨버(Hans Weber)가 말한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전투 프런티어는 한국 교회의 전투’에서 따온 말이었다. 이 글은 민중신학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 논문이었다. 이 글에 대해 당시 서강대 철학과 교수 김형효가 문학사상 4월호를 통해 서남동의 주장을 ‘전쟁을 부르는 열광성’으로 깎아 내렸다. 김형효는 그가 전공한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을 빌어 민중 운운하는 것은 ‘추상의 정신’이라면서 위험한 사상이라고 경고했다.

문익환 목사(좌)와 서남동 교수(우)
문익환 목사(좌)와 서남동 교수(우)

김형효의 반론을 서남동은 같은 해 기독교 사상 4월호에서 두 가지로 정리하는데 하나는 ‘악을 한꺼번에 제거하겠다는 전투적 결단의 어리석음’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전쟁을 부르는 열광성’이다. 이 문제 제기에 대해 서남동은 재미있게 대응한다.

 

둘째번의 경고는 되풀이 읽어 보았지만 내게는 아주 불분명하다. 그러나 도둑놈이 제 발 저린다는 격으로 내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말해 보기로 한다. (서남동,민중신학의 탐구, 33쪽)

 

이 언급에서 보듯이 서목사는 첫번째 문제 제기, 즉 전투적 결단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둘째 경고, 전쟁을 부르는 열광성에 대해선 길게 설명하면서 그 도달지점은 전쟁을 부르는 열광성이 아니라 ‘평화의 이데올로기’라고 결론내린다.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 같은 이들이 이루고 싶은 것은 평화였다. 하지만 그것에 도달하기 까지 겪어야 할 과정은 지난했다. 박정희, 광주, 전두환을 거치면서 거저 얻어지는 평화를 말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들이 소환한 유일신 야훼는 억압된 민중을 해방시키는 동력이었고 가나안에서 기득권 세력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하는 ‘하삐루(히브리)’들의 전우였다.

그랬던 유일신 야훼가 지금은 배타적 폭력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40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일신이 폭력적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신들은 다 폭력에 동원된다. 수많은 신을 가진 힌두교와 다른 종교 신념을 용인하는 관대한 시크교의 싸움이 보여주는 폭력성은 유명하다. 또한 힌두교를 기반으로 하는 인도는 종교적 폭력이 극심한 나라 중의 하나다. 하위계급에 대한 폭력, 빈번한 집단 강간 사건과 그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로 인도는 이미 악명이 높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자유와 해방을 체험했다는 사람들이나 ‘폭력적 유일신’을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사람들 모두 개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신이 없는 종교는 그러면 관용적이고 비폭력적인가?

5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일어난 도교에 의한 불교탄압, 즉 삼무일종(북위 태무제, 북주 무제, 당 무종, 후주 세종이 주도했기에 세 명의 무제와 한 명의 세종의 이름을 따서 삼무일종이라 부른다)의 법난으로 불교도들이 겪은 피해는 막심했다. 무위(無爲)의 종교가 공(空)의 종교를 상대로 500여년 동안 폭력을 휘둘렀다.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좌)와 그의 저서 '불교 파시즘'(교양인/박광순 옮김)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좌)와 그의 저서 '불교 파시즘'(교양인/박광순 옮김)

불교 역시 폭력으로부터 비켜가지 않는다.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는 ‘선(禪)은 어떻게 살육의 무기가 되었나?’ 를 부제로 하는 책 ‘불교 파시즘’에서 불교의 파시즘적 폭력에 주목한다.

581년에 수나라를 건국한 직후에 수문제는 이렇게 선언했다.

전륜성왕의 무력으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비로운 분(부처)의 이상을 전파했다. 백번의 승리와 백번의 싸움을 통해 우리는 열 가지 불교의 미덕을 실천하도록 장려했다. 따라서 우리는 전쟁의 무기가 (불전에 공양하는) 향이나 꽃처럼 되었다고 본다. 즉 이 가시적 세계의 들판이 영원히 불토와 똑같아질 것으로 본다. (불교 파시즘, 288쪽)

책은 주로 2차 대전 시기에 일본이 저지른 만행과 선불교의 연관성을 다루는데 난징 대학살과 2차 대전 중 일본 군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겐조 선사는 스승 겐포의 말을 전한다. “절대자인 부처님께서 사회의 화합을 깨뜨리는 자들이 있을 때 그들을 죽이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위의 책, 41쪽)

그러므로 유일신이어서 꼭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는 그것을 악용하는 이들에 의해 폭력적이 된다. 신이 하나이거나 많거나, 신이 있거나 없거나는 폭력성과 인과관계가 없다. 히브리인들이 유일신을 채택한 것은 남들보다 일찍 신의 보편성에 대해 눈뜬 것일 뿐이다. 승산으로만 보자면 다신사상을 가진 부족들과 싸우는데 아군도 신이 많아야 유리한 것 아닌가?

이 논쟁은 일(一)과 다(多)의 싸움이며, 보편과 개별의 고민이고, 전체와 부분의 논리이다. 한마디로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충돌이다. 모더니즘이 합리성에 기초해서 이룬 성취들이 쇠락해갈 즈음에 나타난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성의 빈틈을 잘 파고 들었다. 계몽과 이성의 횡포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후기근대의 사상’은 복음이었다.

 

계몽주의 프로젝트는 신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지몽매한 종교적 믿음을 런던 스트랜드가의 커피 하우스에서 일어날 법한 대화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19쪽)

 

근대가 종교를 파산시키는데는 실패했지만 그로 인해 종교는 가벼워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도덕, 이성 같은 무거운 주제는 버리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 계승했다. 이미 가벼워진 종교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유일신이냐 아니냐 폭력이냐 관용이냐의 등의 관념적 논쟁 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세속적 무력을 확보한 이들은 후기 근대형 교회가 포기한 유일신 이미지를 등에 업고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한다 . 아직 교회가 전투해서 얻어야 할 것이 많은 시절에 “당신들이 가져간 그 폭력적 유일신 이미지는 우리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라고 조롱한 결과다.

야훼신앙이 가진 전투의 동력과 목표를 상실해서 한가해진 이들은 사소한 일에 전력을 쏟아 붓는다. 통일, 정의, 평화, 반핵 등의 거대 담론에 투신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지만 그들은 이미 소중한 자산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전투적 프론티어'의 역할을 상실한지 오래다. 근대적 가치(도덕, 계몽)를 추구하면서 도구는 후기근대적이니 전투에 승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일신의 폭력성을 ‘애용’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우파(멀게는 네오컨에서 가깝게는 태극기부대까지)에 대응하는 방법은 폭력적 유일신론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기독교 좌파들, 또는 그와 연대해야 하는 세력들은 바로 이러한 폭력성(폭력이란 말이 거슬리면 저항성이라고 해두자)을 자신들의 공적 영역으로 가져와 의제를 선점하는 일이다. 테리 이글턴의 “영국 백작 같은 귀족 휘그 당원에게 신은 본질적으로 영국 젠틀맨이었다”(위의 책, 15쪽)는 말을 비틀자면 21세기 한국에서는 저항적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귀족 행세를 하며 폭력적 유일신 비판을 소일 도구로 삼아 신을 젠틀맨으로 만들어 놓았다. 

문제는 유일신이 아니다. 신학보다 앞서가고 있는 현대 철학에서 기독교를 어떻게 차용하고 있나 보면 답이 나온다. 그들에게 유일신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알랭 바디우(사도 바울), 조르조 아감벤(남겨진 시간), 야곱 타우베스(바울의 정치신학), 자크 데리다(법의 힘), 슬라보예 지젝 등은 폭력의 서사도 외면하지 않으면서 신자유체제 안에서 망가진 세상을 복원하는데 성서를 빌려 온다. 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신학자라면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 존 밀뱅크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신학이 ‘급진적 정통주의’로 불리는 이유를 보면서 오늘날 신학과 교회가 가야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신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고 자조적인 전망을 내놓았던 유신론자 도스토옙스키와 달리 무신론자 지젝은 이 말을 비틀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신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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