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적 신자
제국주의적 신자
  • 박충구
  • 승인 2019.04.12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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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구 교수의 사순절 묵상] 예수생각-3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는 절기지만 인간의 죄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회개의 절기이기도 하다. 죄를 낳는 악이 현상인지 하나의 실체적인 것인지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은 그 실체성을 부정하는 전통이 강하다. 이원론적인 딜렘마를 피하기 위해 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보는 견해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악의 문제는 신학자를 우울에 빠지게 만든다. 악은 역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겹줄처럼 현실 속에서 부단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은 분리와 이견에서 기원하며 폭력과 착취의 양태로 모든 조직 속에 기생한다. 죄의 가장 큰 표현은 제국주의의 논리를 가진 집단이다. 제국은 타방을 제국의 중심을 위한 존재로 여긴다. 로마 제국의 생존 방식이 폭력과 착취였고, 그 폭력의 연장선에서 예수가 처형당했다. 십자가형은 당시 제국에 저항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자에게 가했던 로마 제국의 처형 방식이었다. 그들은 제국의 질서에 반하는 자들을 처참한 폭력으로 제압했다.

본 훼퍼와 십자가
본 훼퍼와 십자가

한 번에 2,000명 정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한 기록도 있다. 그 때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승만이 빨갱이로 몰아 죽인 수가 수 십 만이고, 6.25 전쟁에서는 약 400만 명이 살상을 당했다. 2차 대전 중에는 약 6,000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나는 예수 당시 권력을 장악한 옥타비아누스가 제국을 정비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지중해 북아프리카 연안부터 브리타니카까지 광대한 땅을 점령하고 있었던 때 제국의 폭력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살생을 당했겠나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위대한 자”라는 칭호 “아우구스투스”를 부여했다. 우리 주변의 위대한 자는 다른 이의 피눈물을 흘리게 한 자가 될 수도 있다. 거대한 폭력의 그늘 아래에서 예수도 처형당했다.

생각해보면 그 예수는 내 작은 아이보다도 나이가 어리다. 학자들의 연산에 의하면 기원후 30년 4월 7일이 예수가 처형당한 날이라고 한다. 나는 제국의 폭력과 인간의 죄를 구별하면서도 그 속성의 유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집단이나 개인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권력을 가진 이가 다양하게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기 때문이다. 죄는 개인의 성적 일탈이나 속임수 같은 부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따라서 사회적 차원을 가진다. 그래서 나는 “예수만 바라보라”고 가르치며 사회정치적 차원을 생략한 개인적 죄책과 그 죄책의 문제를 다루는 편협한 신앙적 사고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 “밀양”에서 처럼 신학 없는 사죄 선언은 그래서 간혹 너무나 경박하고, 천박한 도구로 전락한다. 본훼퍼는 이를 일러 “싸구려 은혜”라고 불렀다.

마귀의 자식들은 죄의식이 없다

성서의 진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죄 개념의 가벼움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악은 폭력과 착취의 양태를 띤다. 비폭력적인 제국의 신민도 군사주의가 벌어들인 폭력과 착취의 열매를 나누어 먹는다. 아비가 부도덕하게 자연적 재화를 거두어들이고 착한 자식이 함께 나누기도 하는 것이다. 자식들은 순진한 것이지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타방의 피눈물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축복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신성모독에 가깝다. 서른을 갓 넘긴 예수는 놀랍게도 이런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대들은 악마의 자식”(요 8장)이어서 악마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비를 악마로 둔 자식은 순진해 보여도 악마의 유산을 이어받고 그 영향을 받는다. 나는 이 구절을 개인사의 문제로 보지 않고, 예를 들어, 성직 세습하는 집안의 아비와 자식, 그를 두둔하는 집단, 혹은 제국주의의 논리에 안주하고 있는 집단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문제라고 본다. 성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바로 이들이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었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제국의 앞잡이 이승만을 편들어온 목사나 평신도, 무고한 양민을 죽창으로 찔러 죽인 공산 세력 역시 마귀의 자식이다. 다른 점은 낯과 밤 시차를 달리하고 나타나 동일한 악을 행했던 것이다. 이들은 마귀의 사주를 받아 무고한 하나님의 자녀를 죽였다. 사람이 아니라 마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으로 내려온 기독교인이 주도한 서북청년단도 일면 마귀의 자식이다. 5.18 망언자의 얼굴을 보라. 마귀의 자식은 죄의식이 없다. 너무 과도한 해석인가? 아니다 성서의 예수는 이런 눈으로 그 당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칭하던 이들의 진면목을 폭로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성전에서 돌로 치려했고, 예수는 성전에서 도망하여 피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요 8장 59절) 문제는 그들이 마귀의 자식인 것이 아니라, 마귀의 영향이다. 마귀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 그대는 마귀의 자식이다. 성서는 이런 실존의 상황을 일러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시대 이들의 사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적 힘의 지배, 돈의 지배를 하나님 의의 지배보다 더 믿었던 이들이다. 상당수 이들을 닮은 오늘의 기독교인을 내가 제국주의적 신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박충구 교수 / 전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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