뮬러 특검과 워싱턴 정가의 진실 게임
뮬러 특검과 워싱턴 정가의 진실 게임
  • 권영석
  • 승인 2019.04.13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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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실(fact)과 진실(truth) 사이에는 때로 긴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이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실재성(factuality)에 관심이 있다면, 진실은 그 사건의 의도나 과정을 포함한 문맥 전체를 고려하여 그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는 것(truthfulness)에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같은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도 평가나 가치 판단은 보는 시각에 따라 서로 정반대이거나 다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의 해석이 다양할 수는 있으나, 해석의 차이에 따라 엄연한 사실이 없던 것으로 되거나 엉뚱한 사실을 새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흘러가고 나면 다시 되돌리거나 반복하는 것이 불가능한 게 바로 인간의 삶이 지니는 단선적 특성이며, 바로 이런 연유로 역사적 인간, 곧 피조된 시간과 공간이란 테두리의 제약 안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에게 팩트/팩션(factual)은 픽트/픽션(fictive)과는 확연히 구별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한 번 일어난 사건이나 사실은, 비록 보는 시각에 따라서 그 의미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으나, 사건이나 사실의 실존성 자체는 변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제는 팩트 자체에 대한 접근이 항상 용이하거나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실제로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진실을 찾아 가는 방향이 아니라, 진실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사실을 유추해 보는 역방향으로 접근해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첨단 사진/녹음 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도 사각 지대는 있게 마련이며, 악한 인간들의 은폐 노력 역시 그만큼 더 지능적으로 발달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짜 뉴스"(fake news)란 말 역시 은폐하는 자들이 더욱 자주 들먹이는 것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 사실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채 묻혀버리기 일쑤인 것이 인간 사회의 현실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더욱이나, 사실무근의 '만들어진 진실'이나 사실의 일부를 떼내어다가 '포장한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팩트를 호도하거나 왜곡할 위험성은 언제나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소위 제 4의 물결이라고 하는 "정보 사회"를 살면서도/살기에 정보의 홍수 속에서 끊임없이 팩트 체크(reality check)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400쪽이 넘는 뮬러 특검의 보고서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지만(공개 가능성조차 현재로선 장담할 수 없지만), 윌리엄 바(법무부 장관)가 4쪽으로 요약하여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사실상 그 동안 받아 온 혐의로부터 도리어 면죄부를 받았다는 결론이 그 골자이기에 워싱턴 정가가 몇 주 째 술렁이고 있으며, 온 국민들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욱 막장인 현실 정치 뉴스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듯합니다.

2016년 대선이 트럼프 선거 캠프가 러시아 정부와 공모한 사실상의 부정선거였다고 하는 혐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당성 자체와 공화당의 존립 근거를 뿌리째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에 사실상 뮬러 특검이 몰고 올 파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겠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년 간 러시아 연계설 조사 자체를 '마녀 사냥'(witch hunt)이라느니 [일단 물어뜯고 보려는] '날조된 음모'(hoax)라느니 하는 비난조의 트윗을 무려 181회나 날린 것만 보아도 러시아 스캔들의 심각성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하겠습니다.

민주당 역시 그 동안 발언을 자제하면서 '뮬러 특검 보고서'가 나오면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질 것이라면서 우회적으로 압박의 끈을 조여 왔다 하겠습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 탄핵의 움직임까지 보이면서 은밀히 뮬러 특검의 결과가 나올 시점에 맞추어 거사를 준비하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언론사들 역시 트럼프 대통령과 관련된 각종 자료화면을 모으고 인터뷰를 따 두는 등 녹음 구성에 필요한 제반 준비를 해 두고 마지막 결론 부분만 남겨두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결과는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고, 닭은 그야말로 도리어 의기양양하게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날아오르면서 자신을 좇던 개는 필시 미친 개였음에 틀림없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형국이 되고 만 느낌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2020 대선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신호탄이라도 되는 듯 그 동안 오므리고 있었던 발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마치 그간 트럼프 행정부에서 주장해 오던 정책들이 모두 정당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정치공세를 펴기 시작하는 모양새는 누가 보아도 좀 주제넘은 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대표적으로, 전 국민적 의료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오바마 케어를 폐기하고, 국경에 철의 장벽을 세워서 이민자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강한 미국"의 유일하고 확실한 대안인 것처럼 선동하고, 만시지탄이나마 녹색 혁명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민주당의 환경정책(Green New Deal)을 대안 없는 폄하와 조롱으로 일관하는 것만 보아도 2020 대선 역시 '드럼프'다울(Drumpfish)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내다보게 한다 하겠습니다.

윌리엄 바 장관이 뮬러 특검의 보고서를 비튼 것인지, 아니면 뮬러 보고서 자체가 이미 정치색을 반영하여 착색되었던 것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며, 아마도 2020년 대선의 결과가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 보고서의 진정성 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현 시점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캠프는 그 동안의 실추된 신뢰도를 일거에 만회할 기회를 얻게 되고, 반대로 그 동안 말을 아껴 온 민주당은 오히려 궁색한 처지에 내몰리는 '이상하게' 뒤집힌 모양새라 하겠습니다.

[솔직히, 만의 하나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 더불어 뭔가 뒷거래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면, 사태는 훨씬 더 심각해졌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미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지구상의 가장 대표적인 적성국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거나, 국가 전체를 대표하기보다 대표성의 권위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아젠다를 앞세우고 사익을 챙겼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 정도 되면 수습이 불가능한 사건 중의 대사건이라 해야 할 것이니 그나마 요약본대로가 불행 중 다행인 셈이라 하겠습니다.]

검은 것은 검다 하고 흰 것은 희다하는 담백하고 진정성 있는

인격과 공사를 구별할 정도만큼은 담대한 용기의 소유자들이 필요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뮬러의 인간됨이 법무부 장관의 인간됨보다 더욱 진실되고 신뢰도가 높게 인지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을 숨기거나 은폐 왜곡할 수 있는 개연성은 정보가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거나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용이하게 개재되게 마련인데, 비밀 정보를 취급하는 권력 기관에서는 이런 개연성이 더더욱 높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중앙정보부나 보안사 내지 안기부 같은 기관들이 권력을 찬탈하거나 연장하는 수단으로 참 사실을 호도하거나 거짓 사실을 지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으며 그로 인해 민주주의는 질식하고, 민주주의의 주인인 국민은 [애매한] 고통을 억울하게 당해야 했던 것에 비견할 수 있겠습니다.

한 마디로, 사실을 밝히려는 쪽과 사실을 숨기려는 쪽의 대결 구도에서 미국의 의회와 미국민들은 이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2년 가까이 끌어 온 정치 공방과 그로 인한 혼돈을 해결할 열쇠는 역시 무엇이 진실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뮬러 보고서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작금의 상황은 뮬러 대 트럼프의 대결 구도가 로버트 뮬러 대 윌리엄 바의 대결 구도로 변화된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공화당 지지자들의 40%는 뮬러 보고서 내용이 어떻든 상관없이 여전히 트럼프를 지지하겠다고 하는 콘크리트 지지층으로서, 그들은 진실에 대해 아예 눈을 감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라 하니 미국인들의 민도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뭔가가 의미 있고 가치가 있으려면 이는 반드시 진실에 기반하여야 하며, 진실의 기본은 두 말할 여지없이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가공 내지 날조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진실성이나 진정성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다 하겠습니다. 때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위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사실을 판도라 상자에 숨겨 둠으로써 뭔가 챙길 것(benefit of doubt)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뮬러 리포트를 판도라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걸어 잠그려는 쪽이나 반대로 어떻게든 판도라 상자를 열어젖히려는 쪽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작금의 워싱턴 정가는 그야말로 미국 민주주의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위기를 몰고 올 정보가 들어있기에 뮬러 리포트를 공개하더라도 중간 중간 먹칠을 해서(black-out) 내놓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 앞에 사실을 사실 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허약하고 떳떳하지 못한 관료주의 시스템 자체가 바로 미국의 위기이자 수치라 해야 할 것입니다. 당리당략을 법치적 합리로 포장하기만 하면 뭔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지난번 캐버노 청문회의 경우처럼) 구조적 한계를 각성하고 혁신하려는 계기를 만들어 내거나 각질화된 체질을 과감하게 바꾸기 위해 대의멸친(大義滅親)하려 드는 개인적 "일탈"이 이어지지 않는 이상 작금의 민주주의 제도는 무늬만 그럴듯할 뿐 도리어 국민의 혈세만 축내는 정치놀음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뮬러 특검에 대한 기대는 단순히 반 트럼프 내지 트럼프 혐오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미국 민주주의의 체질적 변화에 대한 소망에 기인한 측면이 많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 할 수 없는 사회, 그런 사회는 인간을 인간답게 고양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물질문명의 이기는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문명의 이기가 진리와 공의를 억압하고 자비와 사랑을 감금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면 이는 문명사회가 아니라 첨단의 야만사회라 해야 할 것입니다.

뮬러 보고서만 나오면 뭔가 일단락이 되리라 생각했던 소박한 국민들의 기대를 희석시키기 위해 차일피일하면서 판도라 상자의 자물쇠만 자꾸 갈아 채우는 식의 막장 드라마를 쓰고 있는 이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길게 보면 역사는 언제나 사필귀정의 역사 곧 진리와 정의가 결국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불변의 진리와, 따라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곧 인간다운 사회, 인간다운 정치의 근간이며, 또 이를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결코 복잡하고 현란한 수사나 현학적 장광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검은 것은 검다 하고 흰 것은 희다하는 담백하고 진정성 있는 인격과 공사를 구별할 정도만큼은 담대한 용기의 소유자들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계각층에서 이런 이들이 책임 있게 권한을 행사할 때에 역사는 비록 더디지만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인간은 더욱 고상해 질 것입니다. 뮬러 특검의 후폭풍이 강한 미국보다 고상한 미국을 선택하는 분별력과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함을 깨닫는 계기로 연결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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