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는 깨어났는가
평신도는 깨어났는가
  • 최태선
  • 승인 2019.04.14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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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는 깨어났는가.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C채널은 9일 오후 '이슈를 보는 창' 코너에서 오 목사와 인터뷰를 방송했다. 방송 중 진행자가 공동의회가 96.42%의 찬성으로 재신임한데 대한 입장을 묻자 오 목사는 감격스런 표정으로 "눈물과 겸손으로 성도들이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충성하겠다"고 답했다."

기사를 보면서 여전히 오정현 목사는 목하 제자타령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교회 사람들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처럼 애굽에서 나온 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스쳐지나간다. 그렇다면 오정현 목사의 두 번째 위임식에서 특송을 부른 1000여명의 청년들이 온전한 제자가 될 세대인가. 안타깝지만 나는 그 청년들에게서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지도자 동지를 향해 열광하는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연상된다.

옥한흠 목사(좌)와 오정현 목사(우)
옥한흠 목사(좌)와 오정현 목사(우)

그런 그들에게서 나는 선잠에서 깨어난 평신도들을 본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제자훈련의 목표는 잘못된 목표이다. 평신도가 잠에서 깨어나면 제자가 된다는 발상은 애초부터 잘못된 발상이었다. 평신도라는 말은 전형적인 계층구조(hierarchy)의 산물이다. 평신도가 잠든 이유는 평신도들이 게으르거나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깨어나서는 안 되는 계층구조가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증경 총회장이 당회장으로 있는 한 교회에 근무하던 한 신학생의 말을 기억한다. 그는 자신의 교회 당회장의 가르침이라면서 평신도들을 어린아이 취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직자들은 아무리 나이 많은 장로라도 유치원생 취급을 해야 한다고 그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신학생 하나뿐인가. 그가 근무하던 교회의 당회장뿐이던가. 아니다. 신학교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한 교수는 신학생들에게 목사는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늘 강조하였다. 확고한 hierarchy식 사고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평신도의 반대말은 성직자이다. 그러니까 평신도를 깨운다는 사고는 관리자인 성직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평신도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러니 평신도들을 깨우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 결과가 바로 대형교회이다. 왜 제자훈련이 많은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였는가. 그것은 제자훈련이 교회 성장의 비책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hierarchy가 바로 세상의 구조이며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대인들이 있다. 성서는 그들을 이방인의 집권자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니까 평신도들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라면 평신도들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잠들게 만드는 hierarchy를 타파해야 했다. 그리고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훈련을 하는데 모두가 평등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게 아니라 불평등의 상징인 대형교회가 되는 것을 보고 다시 깨달음을 얻어야 했다. 하지만 욕망에 이끌려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해석했기 때문에 오늘날 오정현 목사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옥한흠 목사님의 평신도를 깨우겠다는 목표가 선한 의도에서 나왔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평신도를 깨우고 있는 자신이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처럼 되고 고관들처럼 되었다는 사실을 그분은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오정현 목사와 같은 후임을 세우게 된 것이다. 나는 오정현 목사가 주일 점심에 자신 혼자만을 위한 출장 뷔페를 이용한다는 기사를 보고 완전히(!!) 절망했다. 오정현 목사는 물론 그런 자신들의 목사를 이해하는 그 교회 교인들 모두가 hierarchy에 순응한 이방 민족임을 확인한 것이다.

평신도를 깨우는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사라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제자훈련은 북한의 천리마 운동과 다르지 않다.

hierarchy하에서 평신도를 깨우면 그들은 희생양이 될 뿐이다. hierarchy는 희생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권력을 가진 자들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희생하는 구조가 바로 hierarchy가 아니던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온갖 교회의 불의들은 목사가 잘못되거나 평신도들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다. 구조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이어야 할 교회가 세상의 방식을 따라 hierarchy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모든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문제 역시 구조적인 문제인 것이다.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갑질 사건이나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장자연 사건이나 김삼환 부자의 세습이나 오정현의 거짓이나 전병욱의 성추행이나 그 본질에 있어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모른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다. 모두가 성공에 목이 매여 다른 이들을 짓밟아 죽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 그것을 빨갱이로 알아듣는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두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하루치 품삯을 지불하시는 하나님을 불의한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잔인한 시장의 자유를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이해한다.

하나님 나라에는 평신도가 없다. 만일 있다면 그는 깨어나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김을 받아야 할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평신도를 깨우는 사람은 잔인한 사람이다. 그들이 깨어날수록 그들의 희생만 증가하기 때문이다. 내 말이 틀리는가. 그것을 아직도 보지 못하는가.

그래서 나는 드리던 예배를 멈추고 새로운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hierarchy가 아닌 모두가 평등한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생생하게 살아 하나님의 영광이 된 성도들을 보고 싶다. 아무도 더 높아지려 하지 않고 아무도 더 가지려 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싶다.

우리의 교회들은 평신도를 깨우는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사라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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