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스님의 힘겨운 산 오르기
'산상수훈'- 스님의 힘겨운 산 오르기
  • 김기대
  • 승인 2019.04.21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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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가 궁극에 가서 하나의 진리로 만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잘 드는 비유가 등산로 이야기다. 다양한 등산로(종교)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결국 정상(진리)에서 만나게 된다는 이 비유는 사실 적합하지 않다. 대상으로서의 진리는 객관적이라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접근인데 이미 오래 전 칸트부터 이데아는 도전 받기 시작했다. 칸트는 진리의 판단에 ‘주관’을 가지고 들어 와서 주관과 객관의 상즉상입(相卽相入, 서로 걸림없이 융합하는 것으로 모든 현상은 인과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한 쪽이 본체<體⇒能>이면 다른 쪽은 작용<用⇒所>이 있게 된다는 화엄사상)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같은 산의 정상이라고 해도 등산로에 따라 주관적 체험이 다르므로 도달한 그곳은 ‘같은’ 정상이 아니다.

비구니 스님인 대해(속명 유영의)가 감독한 ‘산상수훈’이 화제다. 천국, 선악과, 예수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올리나, 하나님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영화에서 기독교인들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산상수훈의 팔복 중 첫 번째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의 의미를 분임토의를 통해 밝혀 오라는 교수의 과제를 가지고 학교 뒷 산 동굴에 들어간 8명의 신학생들이 서로 토론하면서 답을 찾아간다.

영화 '산상수훈'의 한장면
영화 '산상수훈'의 한장면

동굴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이데아는 제쳐 두고 이데아의 그림자만 보고 있는 동굴 속 죄수처럼 진리의 근원은 알기 어렵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동굴에서 깨달음을 얻고 밝은 세상을 마주한다. 이데아의 실체를 발견한 즉 깨달음을 얻은 신학생들의 밝은 표정에서 겨우 몇 시간 토론 끝에 진리를 확언(確言)하는 조급함이 보인다. 

첫 번째 장인 ‘천국’에서는 천국의 내재성과 외재성을 토론하고, 두 번째 장인 ‘선악과’에서는 선악과가 분별심을 가져왔다고 이야기 한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무한으로 복제할 수 있는 공장을 얻으신 거지”라는 대사를 통해 민중신학에서 이야기하던 전거(reference)로서의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장은 세 번째인 '예수님'이다. 각각의 불국토에는 그 나라마다 주불(主佛)이 있지만 동시에 하나의 붓다로 합쳐진다는 불교 사상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장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면서 종교의 ‘주관성’에 주목한다. 마지막 ‘하나님’ 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사도 바울의 ‘하나님의 성전’ 개념을 통해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라고 권고한다. 여기서도 정언선사의 ‘진심직설’에 나오는 진흙(망념)으로 덮여있는 보석(진심)이 원용된다.

감독이 설명하는 가난한 마음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마음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자기계발서 식의 논리가 아니다. 원효가 언급했듯이 여기서 마음은 통상의 마음과는 다른 초월적 실재로서의 일심(一心)이다. 감독은 초월적 실재로서의 객관과 마음으로서의 주관이 '둘'이 아님을 기독교 신앙에서 발견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하나의 등산로만 오르는 것은 아니다. 근본주의 등산로와 복음주의 등산로가 다르고 진보적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다원주의, 자유주의, 기독교 좌파의 등산로가 비슷한 듯 다르다. 그러므로 정상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 아니다. 정상에는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표상된 기표로서의 하나님만 있을 뿐이다.

대해 스님은 근본주의 또는 문자주의로 호명되는 기독교인들을 등에 지고 진리의 등산로를 힘겹게 올라서 당신들이 믿고 있는 신앙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라고 설파한다.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기독교권에서는 왜 이런 영화를 못 만드나 싶기도 하다. 그랬을 경우 영화의 몇몇 대사에서 발견되는 이단시비의 두려움이 영화 제작을 막는 것 같아 부끄럽고 동시에 새롭게 생각해 볼 신앙의 화두를 던지기 때문에 고맙다. 나 개인적으로는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관계를 본질과 현상으로 해석한 부분이 신선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분별심이 마음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영화 '산상수훈' LA 상영후 감독과의 대화의 시간을 갖고 있다
영화 '산상수훈' LA 상영후 감독과의 대화의 시간을 갖고 있다

여기서부터 ‘산상수훈’이 가진 고민이 시작된다. 이 영화를 봐야 할 근본주의나 문자주의자들은 스님이 감독이라는 사실이 거슬려서 영화관을 찾는데 주저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기독교 매체들은 벌써 뉴 에이지, 불이(不二)사상 운운하면서 깎아 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반면 기독교내에서도 영화 '산상수훈' 식의 해석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데 이 해석을 들어 본 이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다. 영화를 함께 본 교우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6개월치 설교를 두 시간에 요약해서 들은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무거운 짐인 근본주의를 등에 지고 기독교의 등산로를 오른 감독 스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기독교의 ‘어떤’ 주의자들이 되었건 간에 이 영화는 꼭 관람하기를 바란다.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의 장이 열릴 것이고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고백하는 신앙이 어떤 ‘방편’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사족 : 주연배우 백서빈의 연기가 좋다. 그는 배우 백윤식의 차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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