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여, 회복적 정의를 묵상하라
교회여, 회복적 정의를 묵상하라
  • 신광은
  • 승인 2010.12.03 07:10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아나뱁티스트에게서 배우자⑤ 연평도 사태의 기독교적 해법

1. 철수(가명) 케이스

철수(가명)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철수가 학교에서 친구한테 맞았다는 것이다. 철수 엄마는 처음에는 중학교 2학년 남자 애들이 학교에서 싸우기도 하고 뭐 그런 게 아니겠는가 하고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퇴근을 하고 집에 가 애 상황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이빨도 부러지고, 코피도 나고, 머리를 맞아 정신도 오락가락 하고, 눈동자는 풀려 있었다. 큰 애도 놀라서 “엄마, 쟤 왜 저래?”라고 묻는다. 일단 병원에 입원부터 시켰다. 알고 보니 점심시간에 밥 먹는 줄 때문에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났다고 한다. 아빠 없이 혼자서 애를 키우는 입장에서 우리 애가 남의 집 애한테 맞았다 생각하니 너무 속상했다.

철수 엄마는 혹시나 철수랑 싸운 애는 어찌 되었나 걱정이 되서 알아보니 태산(가명)이는 멀쩡하단다. 철수만 일방적으로 맞은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저쪽에서 먼저 사과를 하고 치료비 문제를 협의해 와야 하지 않겠는가. 철수 엄마는 위자료 따위는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저 병원 치료비랑, 이빨 갈아 넣는 것만 해주면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사실 철수 엄마도 중학교 애들끼리 싸운 일을 키우고 싶지도 않았고, 먹고 살아야겠기에 자꾸 이런 일로 시간을 뺏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태산이네 식구들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 태산이 엄마는 병원에 찾아와서는 이빨 값 물어주면 되지 왜 애를 입원시켰느냐며 복도에서 화를 버럭 냈다. 철수 엄마는 ‘애 상태라도 보고 그런 말을 하시라’고 했지만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며 그냥 가버렸다. 며칠 뒤 선생님하고 태산이 엄마가 다시 병원을 찾아 왔다. 그때 철수 엄마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는데, 태산이 엄마는 침상에 누워 있는 철수에게 한다는 말이, “얘, 넌 병원에 편안히 드러누워 있어서 좋겠다. 우리 태산이는 시험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몰라”라고 했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것이 입원해 있는 애를 보고 가해자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태산이 아빠는 한술 더 떴다. 전화로 왜 병원에 입원을 시켰느냐, 왜 병원에다 맞았다고 말했느냐며 고래고래 소리소리를 질러댔다. 너무도 무섭고 분했다.

경찰에 문의를 했더니 2주 정도 시간을 줄 테니 학교 측하고 문제를 잘 풀어보란다. 그런데 학교 측의 반응은 철수 엄마를 또 한 번 황당하게 만들었다. 자초지종을 묻고 사건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학교 측은 때린 태산이보다 도리어 맞은 철수를 더 혼내고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철수가 다섯 대 맞았다고 하면 태산이는 한 대 밖에 안 때렸다고 오리발을 내민다. 그러면 학교 측은 “야, 야! 쟤가 한 대 밖에 안 때렸다잖아. 그럼 세 대 맞았다고 하자.” 엄마가 뻔히 보고 있는 데, 이런 식으로 조사를 하는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교장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더니 교감선생님 한다는 말이, “교장 선생님이 무슨 옆집 문방구 아저씬 줄 아십니까? 아무나 만나자고 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생긴 것에 대해서는 학교 측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을 것인데, 학교 측은 책임지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고 무조건 문제를 축소해서 무마시켜버리려는 생각 밖에는 없는 눈치였다. 철수 엄마의 분노는 점점 커져만 갔다.

급기야 태산이네 식구들은 ‘당신이 고소하면 우리도 고소하겠다’는 식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태산이네 아빠는 태산이가 철수를 때린 주먹이 다쳤다면서 2주 진단을 끊었다고 연락을 해왔다. 세상에! 때린 주먹이 다쳤다고 진단 끊는 일도 다 있는가. 이쯤 되니 철수가 가해자가 될 판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좋다, 한 번 해보자.’ 결국 철수 엄마는 경찰에 고소를 했다. 변호사도 선임했고, 계약금까지 걸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철수 엄마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경찰은 경찰대로 애들 싸운 것 가지고 고소까지 하느냐는 식으로 나왔고, 학교 측도 철수랑 철수 엄마를 따가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심지어 식구들도 ‘이제 그만 하자. 철수 엄마가 참아’라는 식으로 나왔다. 철수 엄마를 대변해 줘야 할 변호사마저 철수 엄마를 보고 참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철수 엄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자신들은 피해자인데 왜 자신들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가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철수 엄마의 억울함과 분노는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인간들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2. 응징할 것인가?

철수 엄마는 분노로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이것들을 요절을 내놓으리라.’ 하기야 누군들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마음을 먹지 않겠는가. 철수 엄마가 이렇게까지 독하게 마음을 먹은 것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철수 엄마는 종교인이 아니었지만 여러 종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섭렵하면서 늘 마음 씀씀이를 바르게 가지려고 애쓰며 살아왔던 교양 있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남에게 해코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철수 엄마였다. 그런데 막상 이런 상황을 맞고 보니 교양만 챙기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철수 엄마는 태산이네 집 식구들이 사람처럼 보이질 않았다. 아마도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분명 태산이네 집 식구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점차 싸움은 악마와의 싸움이 되어갔다. 증오와 분노로 몸서리를 칠수록 태산이네 식구들이 더 무서운 악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혹 사람을 보내서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니 길을 걷는 것조차 무서웠다. 분노와 증오가 공포와 뒤섞이니 거의 공황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복수심을 키웠다.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들 상태도 봐가면서, 복수의 수단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끝까지 가보자! 태산이 그 놈을 기어이 감옥에 보내고 말리라. 사실 태산이보다는 태산이 부모가 더 미웠다. 하지만 어쩌랴. 태산이를 처벌 받게 하지 않고는 부모를 응징할 길이 없는데……. 그 집 식구들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해주기 전에는 싸움을 그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 철수 엄마는 점점 또 다른 악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응징과 복수가 만들어 내는 일종의 거울 효과(mirror effect)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한 관계에 있는 두 당사자는 서로를 악마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이 악마가 되면 될수록 나는 의롭고 선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갈등은 점차 선과 악의 우주적 전쟁으로, 나아가 정의의 이름으로 사탄을 심판하는 종말론적 심판으로 비화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지난 60년간 남북한의 대결구도에서 보아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응징의 역설은, 응징을 하면 할수록 양측은 점점 닮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폭력적인 아버지를 증오하는 아들이 점차 아버지를 닮아가듯이 말이다. 거울상은 좌우만 바뀔 뿐 똑같은 모습을 비춘다. 마찬가지로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좌우만 바뀔 뿐 똑같아 진다. 심지어는 그런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나중에는 서로 의존적이 되고, 공생하는 관계로 비약한다. 응징은 점차 삶을 살아가는 목적이요, 방향이요, 가치요, 힘이 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원수 덕분에 살아가는 기이한 일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적대적 공생관계는 원한 관계에 있는 둘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남북한의 관계는 대표적인 적대적 공생관계의 실례이다.

3. 용서할 것인가?

2007년 미국 니켈마인이라는 작은 아미쉬 마을에서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딸을 잃은 아버지가 아미쉬 학교에 난입해서 여학생 5명을 죽이고, 여러 명에게 총상을 입힌 뒤 자신도 자살한 끔찍한 사건이 평화롭기만 하던 아미쉬 마을에서 일어났으니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사건이 있은 바로 다음날 피해자 가족과 아미쉬 마을 사람들이 가해자인 찰스 로버트 가족을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용서한 일이었다. 매체를 통해 보도된 아미쉬 사람들의 용서 사건은 용서의 위대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잘 알다시피 아미쉬는 아나뱁티스트들이다. 그리고 아나뱁티스트는 오랫동안 용서를 생활화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를 말할 때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용서는 정의를 폐기처분하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용서의 이러한 역설을 잘 보여준다. 용서가 정의를 대체하면 용서는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안겨준다. 태산이네 식구들로부터 그토록 몰상식한 대우를 받고 있던 철수 엄마에게 누군가 다가가서 ‘이제 그만 그 사람들을 용서해요’라고 한다면 이것이 옳은 조언일까? 철수 엄마는 어떤 느낌이 들까? 비록 그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용서’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철수 엄마는 그를 분명 태산이네 측에서 보낸 앞잡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특별히 개인 관계보다는 집단적인 차원에서 더 잘 일어난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용서’라는 말을 꺼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에서 자비나 사랑과 같은 것은 개인 윤리에 속하며, 정의와 평등이 집단 윤리에 속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는 아무래도 인격적인 개인 관계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기업이나 국가 등과 같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적용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필자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의 통찰이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나뱁티스트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용서를 늘 생활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나뱁티스트의 용서에 대해서 배우고자 할 때 그들이 용서를 대단히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용서가 자칫 정의를 폐기처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용서가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용서와 정의가 조화되는 제 3의 길을 찾고자 지난 500년 동안 실험과 실천을 계속해 왔다. 그들의 이러한 이해와 실천은 최근 정의에 대한 제 3의 길로 알려지고 있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로 나타나고 있다.

4. 두 가지 정의: 응징하는 정의 vs. 회복하는 정의

라인홀드 니버가 착각했던 것이 하나 있다. 그는 정의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정의 vs. 자비, 평등 vs. 사랑을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이분법적으로 이해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의란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응징과 같은 것이었으며, 자비란 피해를 받고도 돌려주지 않으며 참고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정의와 자비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된다. 이것이 결국 니버의 대안이 미지근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정의와 자비는 둘이 아니며, 하나님은 정신분열 환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오른팔과 정의의 왼팔을 가지고 계시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춘다.(시 85:10)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비와 만나는 정의, 용서와 만나는 공의를 찾고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응징하는 정의

가해자가 잘못한 만큼 고통을 안겨주어서 응징하는 것을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라고 한다. 이러한 응징하는 정의는 한마디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레 24:20)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내 눈을 뽑으면 나도 그의 눈을 뽑고, 그가 내 이를 부러뜨리면 나도 그의 이를 부러뜨리는 것이 정의라는 말이다. 이러한 동해보상법은 구약의 토라뿐만 아니라 함무라비 법전을 비롯한 여러 법전의 기본정신이다. 하지만 응징과 복수가 정녕 정의를 이룰 수 있을까? 글쎄…….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

첫째로, 폭력의 문제다. 통상 응징은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007시리즈>나 <다이하드 시리즈>와 같은 영화를 보면 폭력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악당의 폭력이고, 또 하나는 지구를 구하는 주인공의 폭력. 하지만 폭력이 지구를 구한다는 구속적 폭력(redemptive violence)은 신화에 불과하다. 자끄 엘륄의 말대로 폭력은 폭력이라는 현실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살인범이 저지른 살인은 끔찍하고 저주스럽다. 하지만 그 살인범을 죽이는 국가의 사형제도 역시 끔찍하고 저주스럽기는 매 한가지이다. 폭력은 정의를 아주 조금 이룰 뿐 온전한 정의를 이루지는 못한다.

둘째로, 르네 지라르가 잘 말했듯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복수는 너무도 자주 복수의 무한반복이라는 악순환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그래서 복수는 양심의 가책 없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악마를 만들어 낸다. 복수의 악순환이 반복되면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모두가 가해자가 되며, 급기야 모두가 공멸한다.

셋째로, 복수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는 중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누가 정당한 심판자가 될 수 있는가? A와 B가 다투었다. 누가 이 두 사람을 중재할 수 있을까? 단순히 제 3자인 C가 중재자를 자청한다면 A와 B가 그의 판단에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중재자는 반드시 초월적인 존재, 곧 신이라야 한다. 때문에 현대 사법제도에서 중재자는 초개인적인 국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초월성이 사라진 세속사회에서 국가의 중재는 여전히 의문의 대상이다. 국가란 뭔가? 국가란 그저 다수의 3자들일 뿐이다. 결국 51%의 여론이 유일하고 현실적인 중재자가 되고 만다. 따라서 사법제도는 정당한 심판자의 부재를 은폐하는 기만이다. 나아가 국가들 간의 분쟁에서 중재자의 문제는 그러한 기만조차 통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남북한의 분쟁에서 누가 공정한 중재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넷째로, 재판의 공정성의 문제다. 오늘날 사법제도는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고 있는가? 영화 <라쇼몽>이 보여주듯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의 재판은 부득불 편파적이 된다. 현대 재판제도에서 공정성은 하나의 전제일 뿐 성취될 수 없다. 예컨대, 한국 검찰의 불공정성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O. J. 심슨 사건이 보여주듯이 미국 재판제도의 불공정성 역시 악명 높다. 불행히도 이러한 불공정한 재판은 현실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대로 현대의 재판제도는 힘 있는 자의 자기정당화로 변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섯째, 소외의 문제다. 현대의 형법제도의 특징은 개인의 복수를 국가가 가져간다는 데 있다. 예컨대, 철수가 태산이를 고발하면, 그 때부터는 국가가 철수의 복수를 대신하게 된다. 그래서 경찰이 조사하고, 검찰이 기소해서, 법원이 판단한다. 국가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는 말이다. 점차 최초의 문제는 철수와 태산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자신의 문제가 된다. 영화, <귀주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재판절차가 진행이 되면서 태산이와 철수는 자신들의 문제가 점차 자신의 손에서 떠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재판비용을 대기 위해서 둘 다 막대한 돈을 법률전문가들에게 지불하는 것이다. 우습게도 법률전문가들이 두 사람의 분쟁과 불행으로 돈을 벌어간다. 정의는 사라지고 점차 이해관계와 사업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여섯째, 응징하는 정의는 관계의 회복을 이룰 수 없다. 철수가 태산이를 고발해서 재판을 받게 하면 아마 모르긴 해도 태산이는 법이 정한 대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일정 부분 정의가 실현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두 집안은 영영 철천지원수가 되고 말 것이다. 두 사람은 물론이고 두 집안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된다.

일곱째, 응징하는 정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으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거나 행실을 바로 잡지 못한다. 통상 사람들은 단호한 응징만이 재발 방지를 약속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예컨대, 태산이가 실형을 선고받는다고 해서 태산이가 자신의 행동을 뉘우칠까? 또 그가 만에 하나 교도소에 들어갔다 해서 다시는 전과 같은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않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태산이는 교도소에서 철수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키우며, 복수의 칼을 갈고 나올 것이다. 또 그는 학교(교도소)에서 훨씬 더 정교한 기술과 지식, 방대한 네트워크를 습득해서 졸업(출소)하게 될 것이다. 그는 졸업 후 분명 훨씬 더 지능적이고 흉악한 범죄자로 거듭나 있을 것이다. 정의의 결과치고는 참 슬프다.

2) 회복하는 정의

정의에는 응징하는 정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회복하는 정의도 있다. 응징하는 정의의 목표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즉 복수가 목표라면 회복하는 정의의 목표는 둘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에 이르게 하며, 다시는 악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그냥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응징하는 정의와 똑같이 회복하는 정의도 잘못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분명 정의(justice)이다. 하지만 회복과 치유, 화해, 평화, 이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둘은 완전히 다르다.

회복하는 정의는 처벌을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회복하는 정의도 분명 처벌을 한다. 하지만 회복하는 정의는 다른 차원의 처벌을 한다. 응징하는 정의의 처벌은 자신의 잘못 만큼의 고통을 안겨줌으로써 균형을 이루려는 것이다. 하지만 회복하는 정의의 처벌은 가해자에게 고통을 안겨주기 보다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통합적 수치심’이라고 부른다. 이는 자신의 행동으로 생겨난 결과를 직시하게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피해를 보상하도록 책임을 부여한다. 바로 이 때 가해자는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은 누구를 정죄하는 부끄러움이라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책임을 느끼게 하여 건강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회복되도록 하게 만드는 부끄러움이다.

그 밖에도 회복하는 정의는 제 3자가 나서기는 하지만 문제는 갈등 당사자들끼리 풀게 한다. 당사자들은 그 문제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며 관련 전문가들의 호주머니를 부풀리는 데 그들의 돈을 쓸 필요가 없다. 회복하는 정의는 폭력, 혹은 공권력의 도움을 최소화하고 대화를 최선의 문제해결수단으로 택한다. 결국 둘이 만나서 대화하게 하는 것이다. 회복하는 정의는 피해자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대로 정당하고 공정한 보상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보상은 가급적 가해자의 자발적인 결단으로 말미암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회복하는 정의는 둘 사이의 막힌 관계와 쓴 뿌리가 청산되는 것을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회복하는 정의는 과거에 일어난 잘못에 대한 문책보다는 앞으로 그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5. 화해 조정의 길

과연 그러한 일이 가능한가? 다시 철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철수네 사례는 회복하는 정의가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 경청

분노와 증오, 공포로 얼룩져 정상적인 생활조차 할 수 없던 철수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도움을 주고 싶어서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KAC)에서 평화 조정 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며 불쑥 나타난 이들의 출현을 철수 엄마는 신뢰할 수 없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일까’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한 번 만나자고 하는데 내키지 않았다. 만에 하나 이들이 저쪽에서 보낸 용역들이라면 자기 목숨도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겁부터 났다. 그래서 철수 엄마는 대로변에 있는 커피숍으로 장소를 정했다. 여차하면 대로로 뛰어나가 구조요청을 할 참이었다.

철수 엄마는 혼자 나갔는데 저쪽에서는 남자가 셋이나 나왔다. 벌써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철수 엄마에게 협상을 하라는 둥, 용서를 하라는 둥, 저쪽 편을 드는 일을 일절 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언이나 충고나 어설픈 위로조차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 보고는 그냥 듣기만 했다. 철수 엄마로 하여금 말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들어주었다. 들어주는 것, 이것은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해주지 않던 일이었다. 태산이 부모도, 학교 측도, 경찰도, 변호사도, 그리고 친척도, 누구도 해주지 않던 일이었다. 그런데 생판 모르는, 낯선 남자 셋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철수 엄마는 낯선 남자들 앞에서 태산이네 식구들을 향해 온갖 저주와 욕설을 해가며 푸념을 마구 늘어놓았다. 엉엉 울면서 말이다. 테이블에는 휴지가 산처럼 쌓였다. 세 시간이나 그랬을까. 그런데 이들은 시계도 한 번 안 쳐다보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들어주었다. 그러자 아주 조금이지만 철수 엄마의 가슴 한쪽이 시원하게 트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기만 했는데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철수 엄마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이지만 냉정과 이성을 되찾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회복하는 정의는 대화의 능력을 신뢰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의 말만큼 천시 여기는 것도 없다. 재판에서 가장 증거가치가 낮은 것이 사람의 말이다. 물증에 비하면 사람의 말은 바람 같은 것이다. 입에서 떠나 즉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말에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하지만 회복하는 정의는 바로 그 말에 모든 것을 다 건다. 정의란 무엇인가? 말이다. 땅에서부터 부르짖는 아벨의 피의 소리가 정의고, 그 소리를 듣는 것이 공의다. 억압당하는 약자의 목소리가 바로 정의이다. 따라서 회복하는 정의는 약자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피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말로 자신의 분노와 아픔을 표현하게 한다. 여기서 정의가 시작된다.

2) 만남

몇 차례 조정자들을 만나면서 철수 엄마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 조정자들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것은 태산이네 식구들을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철수 엄마에게는 죽기보다 더 싫은 일이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그들과 한 자리에 마주 앉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코앞에서 본다는 것, 그들과 말을 섞는 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싫었다. 하지만 철수 엄마는 조정자들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상당한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왠지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더 중요한 것은 아직 중학교 2학년생에 불과한 태산이를 처벌 받게 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일을 키우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두 집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태산이네 식구들도 만남의 자리에 나왔다. 그들은 왜 나왔을까? 화해 조정, 곧 ‘화해 권고 제도’는 사법부와 연계되어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법원이 재판 과정을 일시 보류하고 화해 조정 프로그램에 사건을 위탁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때문에 화해 조정의 결과는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재판부는 그 결과를 최대한 판결에 반영한다. 만일에 화해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재판은 사법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따라서 태산이네 식구들 편에서도 화해 조정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셈이다. 이 점에서 보면 회복하는 정의와 응징하는 정의는 꼭 대립적이지 않다.

껄끄러운 두 집안 식구들이 만남의 자리에 나타났다. 회복적 정의가 추구하는 것은 관계의 회복이다.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만남이다. 이런 점에서 두 집안 식구들이 다시 만났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이로써 이미 목표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아직 대화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얼굴을 대하고 만나는 순간 이미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찾아진 것이다.

철수 엄마는 만남의 자리에 나오기 전에 얼마나 긴장하고 초초했는지 모른다. 만남의 장소도 전에 조정자들을 만났을 때처럼 도망치기 알맞은 곳으로 정했다. 그만큼 긴장되고 두렵고 껄끄러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철수 엄마가 태산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철수 엄마는 뭔가에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직 앳된 그 어린 중학생에게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던 것이다. 태산이는 악마가 아니었다. 철수랑 똑같은 어린 학생에 불과했다. 그런 태산이를 처벌 받게 하겠다고 광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도리어 악마가 아닌가 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화해의 영이 철수 엄마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은 것이다.

3) 대화

재판에서 판사는 절대 권위를 갖지만, 화해 조정의 경우 조정자는 조력자요, 협력자이다. 조정자는 서로 만나기 싫어하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서로 대화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양측이 서로 대화할 때 조정자는 나서지 않고 잠잠히 들어주고 증인이 되어 준다. 그러다가 자칫 갈등 당사자가 흥분해서 또 다른 폭력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상황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또 조정자는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대화를 할 때 가급적 대화의 방향을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조정자가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거나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 당사자끼리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고, 자신들끼리 합의해서 문제를 푸는 것이다. 그런 다음 합의된 내용에 양쪽 모두 동의하고, 승인하는 합의문을 만들어 내는 것을 돕는 것이 바로 조정자가 할 역할이다.

보통 대화는 피해자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당한 피해와 고통을 하나씩 토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섭섭했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철수와 철수 엄마는 그간 자신들이 어떤 물리적, 심리적 고통을 당했는지를 쏟아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에 조정자 앞에서 다 했던 얘기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왜냐하면 가해자인 태산이와 태산이 가족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 동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일이었다.

“그때를 기억하시죠? 태산이 아빠가 제게 전화해서 막 소리 지르고 그러실 때……. 그때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그리고……” 태산이네 식구들은 철수와 철수 엄마가 하는 얘기를 묵묵히 들었다. 물론 얘기 도중 서로 다른 내용이 나올 때 이에 대해서 바로잡기도 했지만 주로 철수와 철수 엄마가 얘기했고, 태산이네는 들었다. 태산이네 식구들도 철수네 사정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짐작하는 바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철수와 철수 엄마의 입에서 직접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이것을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체험이다.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들의 눈물 섞인 이야기를 들으면 가해자들의 마음에는 동정과 공감, 미안함이 생겨난다. 태산이네 식구들도 그랬다. ‘아, 그랬구나. 그랬겠구나. 그렇게 아팠구나…….’

4) 화해

철수네 식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태산이네 식구들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의 입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바로 이것이었다. 철수랑 철수 엄마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되었을 일인데, 그 말을 안 하니까 약이 오르고, 화가 나고, 억울하고, 분이 치밀었던 것이다. 그런데 직접 면전에서 그들의 입으로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 이제는 살 것 같았다.

철수 엄마는 백 년 묶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 됐다.’ 바로 이 지점이 용서의 지점이다. 용서는 정의를 대체할 수 없다. 정의가 없는 용서는 또 다른 폭력이다. 뉘우침이 없는 ‘평화 선언’만큼 가증스러운 것도 없다. 그럴 경우 용서는 그 본래의 능력을 잃고,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회복하는 정의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말을 직접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게 한다. 그리고 피해자는 그 사과를 받아들임으로써 정의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태산이네 식구들도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사업을 크게 하시던 분들이었는데 얼마 전 사업이 망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고 계시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이 일이 터졌고, 또 철수가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니 너무 걱정되고 힘들었다고 했다. 보험으로 처리해 주려고 했는데, 철수 엄마가 사고가 아니라 싸워서 입원했다는 얘기를 하는 바람에 보험처리도 안 되었다고 했다. 거기다 태산이 아빠 성격이 워낙 불같아서 앞뒤 안 보고 그렇게 말을 해버리는 일이 많단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했다.

‘세상에, 세상에……. 그랬구나…….’ 태산이네 식구들도 악마가 아니었다. 그저 삶에 지쳐 힘들어 하는 평범한 이웃이었다. 그러니 이제 철수 엄마도 미안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구나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앉아 있는 중 2짜리 태산이를 보니 너무 짠하고, 미안했다. 그래서 철수 엄마는 진심으로 태산이에게 용서를 빌었다. “태산아, 미안하다.”

악마는 없었다. 갈등이 상처를 낳고, 상처가 아픔을 낳고, 아픔이 악마라는 허상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알고 보면 그쪽도 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이웃이요, 형제다. 문제는 바로 그렇게 그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기까지가 힘든 것이다. 회복하는 정의는 이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그래서 용서하고 화해하게 한다.

5) 합의

뉘우치고 용서하는 시간이 있은 뒤, 이제 대화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로 넘어가게 된다. 우선 치료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화해가 없는 상태에서 치료비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껄끄럽고 역겹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뉘우침과 용서가 있은 뒤 치료비 이야기는 비교적 쉽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돈은 나중 문제다.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갖게 되고, 피해자 역시 가해자의 상황을 배려할 수 있게 되면 돈 얘기는 금방 끝난다. 철수네 케이스도 그랬다. 어렵지 않게 치료비 문제를 해결했고,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액수와 지불 날짜까지 합의했다.

물론 합의에는 태산이가 앞으로는 철수를 때리지 않겠다는 약속도 포함되었다. 철수네 역시 고소를 취하하고 이 문제를 더 이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합의문은 조정자와 함께 작성되었고 양측이 서명을 해서 법원에 넘겨졌다. 법원은 이를 그대로 판결에 반영했다. 결국 합의를 통해서 태산이는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철수네 역시 원한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 참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 것이다.

6) 성숙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사과를 받고, 치료비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철수 엄마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악마의 탈을 벗어던질 수 있어서 더욱 기뻤다. 그 동안 자신이 분노와 증오의 노예가 되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으면서도 달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이제 더 이상 복수의 화신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꿈만 같았다. 태산이네 식구들을 생각만 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그러다가도 행여나 그 집 식구들이 또 무슨 계략을 꾸미지는 않았을까 하며 두려워했는데, 이제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태산이네 식구들이 약속한 날짜에 치료비를 보내오지 않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내 이럴 줄 알았어. 그 인간들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 뭐 이런 식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보류했던 법적 절차를 다시 시작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철수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정자도 없이 직접 태산이네 집에 전화를 했고, 혼자서 태산이네 집을 찾았다. 그리고 치료비 지불이 늦은 이유를 물었고, 여차여차한 사정으로 치료비 지불이 늦었다는 해명을 들었다. 그러자 철수 엄마는 액수도 다시 조정해 주고, 일시불이 어려우면 할부(?)로라도 가능하다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결국 태산이네 집 식구들은 약속을 잘 지켜주었고 모든 문제는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회복하는 정의가 또 하나의 열매를 맺었다. 회복하는 정의는 대화, 조정, 사과, 보상 등을 넘어서 갈등 당사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자신감, 창조성, 여유, 용기, 관용 등 얻어 낸다. 이것이 바로 회복하는 정의가 맺어 내는 아름다운 열매다. 이것은 응징하는 정의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것들이다.

7) 헌신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철수 엄마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끔찍한 고통으로 지옥 같은 나날을 겪고 있는 데 갑자기 누군가가 불쑥 자신에게 찾아와서 그 모든 문제를 전부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이다. 철수 엄마는 ‘로또 복권을 맞은 것 같다’고 말하고 다녔다. 누구보다 조정자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자신의 감사를 받을 분이 그들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엄청난 행운을 안겨다 준 누군가가 또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분은 천사나, 혹은 하나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큰 올케가 자기 교회에 가보자고 초청을 했다. 기독교에는 별 관심이 없던 철수 엄마였는데, 그 순간 철수 엄마는 하나님께 가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철수 엄마가 처음 예배에 참석했을 때, 철수 엄마는 서투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베풀어 주신 은혜에 깊이깊이 감사하는 기도를 올려 드렸다.

물론 조정자들은 모두 크리스천들이었으며, 한국의 아나뱁티스트 크리스천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정 과정에서 일절 전도하지 않았다. 자칫 화해 조정이 어설픈 전도 행위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전도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철수 엄마는 그들의 신실함과 섬김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결국 철수 엄마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들의 섬김과 도움으로 철수 엄마는 크리스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인도 화해 조정자로 섬기고자 훈련 프로그램을 신청해 놓고 있다. 철수 엄마는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헌신했다.

6. 마치는 글

최근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적어도 네 명이 죽고 수 십 여명이 다치는 끔찍한 불상사가 일어났다. 국민들은 북한의 도발에 분노할 뿐만 아니라 초기 대응이 미흡했다 하여 정부와 군을 질책하고 있다. 이에 정부와 군은 두 번 다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노라며 무기를 재배치하고, 각종 군사훈련을 강행하고, 교전수칙을 재개정하고, 연일 서로를 향해 엄포를 놓고 있다. 한반도에 점점 전쟁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피해자의 절규, 정부의 단호한 대응, 국민의 악화된 여론,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반응이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도 똑같이 반응한다면 이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을 맡은 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닌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 노릇을 해야 하는 교회라면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의 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교회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회복적 정의를 진지하게 묵상하는 일일 것이다. 회복적 정의는 개인 간의 분쟁뿐만 아니라 국제 분쟁에도 효과가 있다는 여러 가지 임상결과들이 있다. 회복하는 정의는 분명 남북한의 분쟁에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낼 것이다. 한국 교회는 갈등과 분쟁이 있는 그 한 가운데 서서 성 프란시스와 같이 평화의 중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철수네와 태산이네 식구들의 갈등과 분쟁을 평화롭게 조정해 주었던 평화 조정자들과 같이 말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올려 드릴 수 있는 평화 조정자가 필요한 때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신광은 / 열음터교회 목사 

신광은 목사는 한국 교회 내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갈등, 죄와 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며 아나뱁티스트들이 실천해왔던 제3의 길, 곧 구속적 길에 주목했다. 한국 교회에도 그 적용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앞으로 '아나뱁티스트로부터 배우기' 시리즈를 연재할 계획이다. 한국 <뉴스앤조이>와 <미주뉴스앤조이>에 썼던 글들을 역어 <메가처치 논박: 교회여, 크기에서 자유하라>를 최근 펴냈으며, 김기현 목사와 함께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을 번역했다.

<문의>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 http://www.kac.or.kr 전화: 02-554-9615
평화 조정자 프로그램 담당자 : 이재영 간사
회복적 정의 시민사회 네트워크: http://www.rj.or.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짜장라면 2010-12-05 09:05:35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바두기 2010-12-05 04:51:53
너무 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눈앞이 맑아지는 기분이어요. 이런 종류의 화해와 용서가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에게 원하시는 그 방법이라 믿습니다.

이곳에서 연일 댓글로 상대를 공격하는 기독교인들도 제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이글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뭔가를 깊이 묵상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