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대표, 이 영화는 꼭 보시라
나경원 대표, 이 영화는 꼭 보시라
  • 김기대
  • 승인 2019.05.0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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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책을 읽다(5)-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0년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한 후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3 S (screen, sport, sex) 문화가 노골화 되었다. 그 중 성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봇물터지듯이 상영되면서 영화는 3S 문화의 가장 충직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퇴폐문화’로 불리던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으로 사회를 억압한 뒤 자신은 향락을 독점했던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은 향락을 나누어주는 인물이었다. 토속 에로물로 불리던 영화의 시작도 이 때였는데 이 분야의 ‘거장’은 정진우 감독이었다. 1970년대와는 딴판인 노출연기를 감행한 정윤희는 연기력 시비에도 불구하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로 일약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한다. 이 영화는 이듬해 상영된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와 함께 정진우 감독의 대표작이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잘 부응하는 ‘야한 영화’로만 남아있다.

정진우 감독을 조금 깊이 알면 이런 논란은 사라진다. 그는 23살에 첫 작품을 찍어 천재성을 인정받은 감독으로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에서는 1980년 광주의 비극앞에서 몸으로 밖에 울 수 없는 민중의 아픔이 절절히 드러났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도 기득권에 저항하는 여인의 몸짓을 담았다. 그래서 영화 평론가 박혜은은 이 영화를 “21세기 영화에서도 흔치 않은 강렬한 여성 서사”라고 높게 평가한다.

정비석의 단편 소설 '성황당'을 각색한 영화로 현보(이대근)와 순이(정윤희)의 사랑 이야기다. 남사당 패거리 누군가의 딸이었으나 산 속에서 버려져 헤매다가 숯을 구워 생계를 잇던 현보의 어머니에게 발견된다. 함께 살게 된 순이의 나이가 차자 현보와 순이는 결혼하고 마침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자 깊은 산 속 숯가마 터는 그 둘만을 위한 낙원으로 변했다. 배우 이대근이 맡아 왔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달리 영화에서 현보는 순이가 성장할 때까지 절대 서두르지 않는 순박한 청년이다. 결혼 후 그들은 마르지 않는 계곡 물에 함께 몸을 씻고 저녁이면 숯가마 옆에 앉아 고구마를 먹는 행복을 누린다. 현보는 마을 씨름대회에서 황소를 부상으로 타서 아내에게 옥가락지를 선물한다.

행복에는 항상 불청객이 있는 법, 현보의 친구 칠성이 숯가마터를 찾아와 순이에게 흑심을 품고, 산지기 김주사도 그녀를 노린다. 김주사는 현보가 산림법을 위반했다며 일본 순사를 데려와 감옥에 수감시킨다. 깊은 산 속에 홀로 남은 순이를 덮치려던 장면을 목격한 칠성은 김주사를 낭떠러지에 떨어 뜨리고 도망간다. 죽은 줄 알았던 김 주사가 다시 나타나 순이를 덮치려 하자 순이는 그를 껴안고 숯가마에 뛰어들어 함께 죽는다.

뻐꾸기는 탁란, 즉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새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뻐꾸기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자신의 백성을 버린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다. 순이는 처음에는 밤에 우는 뻐꾸기 소리에 자기를 버린 어미를 생각하지만 현보와 부부가 된 후에는 더 이상 뻐꾸기 울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구한말 신문이란게 생겨나면서 많은 민족적 담론들이 생산되었다. 영웅신화와 단일 민족 등의 개념이 그것인데 한(恨)도 그 중 하나다. 흔히 우리 민족을 가리켜 한많은 민족이라고 하는데 한은 근대 신문의 출현과 함께 만들어진 용어다. 일종의 계몽처럼 개화기 신문들은 ‘한’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고미숙은 우리 전통 소설에 한이 주제인 작품은 거의 없었다고 주장한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모두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사에 외침이 많기는 했지만 폴란드, 아르메니아, 아일랜드 등 우리보다 더 험한 꼴을 당한 역사는 수두룩하다. 고미숙의 표현대로 “20세기 초 정말 느닷없이 형성되어 역사 전체로 증폭되어” 간 개념이 ‘한’이다. 이는 영웅신화가 일제의 침탈에 힘을 상실하자 그 자리를 대신한 수동적 정염을 표현한 글자다. 나라를 빼앗긴데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개화기 신문들은 과거의 영웅을 기억해내거나 그도 벽에 막히면 한타령으로 방향을 전환시켰다. 거기에 더해 “오랫동안 참혹하고 처참했던 조선의 역사는 그 예술에다 남모르는 쓸쓸함과 슬픔을 아로새긴 것이었다”는 일본의 미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이 우리의 ‘한’을 확인시켜 준 꼴이 되었다.

영화에서 순이는 어미로부터 버림받은 한많은 존재이지만 현보와의 현재적 삶이 한을 압도한다. 일제하를 살아가던 그들에게 독립운동을 하거나 반일정서를 가지지 않았다고 따져 물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반상(班常)의 계급이 있던 조선사회나 일제하 사회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매일 계곡물에서 정화 의식을 치르고 새 힘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며 산다. 새힘은 그들이 인지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수탈의 형식을 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거부로 작동한다.  현보가 잡혀간 후 칠성은 현보의 출옥때까지 순이를 보호하겠다며 색동 저고리를 입혀 순이와 함께 산을 내려간다. 순이가 잠시 앉아 쉴 때 비싼 옷에 흙을 묻힌다며 칠성이 타박하자 순이는 그 자리에서 본래의 누더기 옷으로 다시 갈아 입고 숯가마터로 돌아 온다. 제국주의와 함께 들어온 자본의 위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순이의 모습이다. 

순이는 봉건의 때가 남아 있던 일제하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니라 매 순간 주체적 결단을 한 여성이다. 남편의 출옥을 하염없이 울며 기다리기 보다는 홀로 숯을 만들며 숯가마를 지키는 독립적 여성이었다. 남편을 감옥에 보낸 김주사가 다시 나타나자 그와 함께 불 속에 몸을 던지는 마지막 결단을 했다. '오뉴월에 서리를 내리게 하는 여자의 한'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개입한 외세를 처절하게 응징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순이는 숯가마로 뛰어 들며 웃을 수 있었다.

아감벤은 불이 모든 신화의 시작이라고 했다. 불에 대한 기억이 소멸하면서 신화가 역사 속으로 들어 왔다. 불에 대한 희미한 기억은 역사 속에 남아 있지만 불이 가진 (숯으로 다시 태어나는)재생성은 그 힘을 잃었다. 2년전 촛불은 불의 기억을 되살리는 불씨가 되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그런데 황교안 자한당 대표는 이제 횃불을 들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불은 모든 것을 태운 뒤 새롭게 출발하는 재생의 불이 아니라 파괴의 불이다. 황교안 당대표가 험한 말을 쏟아내자 나경원 원내대표도 뒤질세라 의미없는 말을 배설한다. 순이가 매일 계곡에서 정화예식을 하듯이 가톨릭 신자 나경원은 정화(영세)의식을 거쳤다. 이제 자유한국당의 선배들이 행한 모든 적폐들을 과감하게 껴안고 재생의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는 나무를 태워 숯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숯을 다시 불속으로 집어 넣는 일을 하고 있다.

"원시적 자연과 강압적 시대 , 욕망과 권력, 지배와 피지배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박혜은)가 영화에 흐르는데 나경원 대표와 그 정당은 충돌을 회피하고 강압과 권력, 지배의 편에 일찌감치 서버렸으니 발생할 에너지가 없다. 그들은 일본순사와 외세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김주사의 편에 섰고, 칠성이 순이에게 준 옷처럼 백성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나경원의 선택을 눈치 챈 시민들은 청와대 청원 게시판으로 집결했다.

나아가서 임이자 의원을 이용한 성추행 기획은 스크린속 순이에게 부끄러워 지는 장면이다. ‘나약한 여성의 몸’(황교안-박근혜), ‘키작고 못생긴’(이채익-임이자), ‘시집도 못간 예쁜 우리 현진이’(한선교-배현진) 등의 표현은 여성을 ‘한’의 정서에 묶어 두려는 치졸한 시도다. 그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여성주의는 지난 세대 남성들이 가진 여성관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힘겹게 이룬 민주화의 둥지에 탁란해서 '독재타토', '헌법수호'를 외치는 뻔뻔함을 보이고 있다. 자기 알을 탁란하는 과정에서 본래 둥지 주인새의 알을 땅에 떨어뜨려 깨뜨리는 뻐꾸기처럼 지금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본래적 의미를 깨뜨리고 있다.  

여성 정치인의 리더십이 부족한 한국 정치 지형에서 나경원은 좋은 지도자가 될 외적 조건은 충분히 갖춘 인물이다. 이제 덕목과 내용만 채우면 된다. 지금도 안늦었다. 적폐와 함께 과감하게 숯가마로 뛰어 들라! 좋은 숯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하면 황교안이 스스로 하얀 재가 되도록 불사르겠다고 했듯이 그와 함께 하얀 재가 되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영화>

뻐꾸기는 밤에 우는가,정진우 감독, 1980년

<책>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고미숙 지음, 책세상, 2015년

제국, 그 사이의 한국, 앙드레 슈미드 지음, 정여울 옮김, 휴머니스트, 2007년

불과 글,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책세상. 2016년

물의 생기와 불의 광기(영화평), 박혜은,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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